덕후의 엄마

by 모아진빛

갓 태어난 나를 보고 친가 어른들은 '완전 H(고모)네!'하고 외쳤다고 한다. 이마께의 살짝 노르스름한 잔머리, 심심한 듯 동글동글한 이목구비, 낯가리고 예민한 성향 등. 고모와 친가 사람들의 특징을 쏙 빼닮은 첫 손주이자 조카였던 '나'는 친가 데뷔와 동시에 친탁이 확실하다 결론이 났고, 무슨 행동을 해도 역시 친가의 누구를 닮았다는 평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손 마디가 굵은 걸 보니 지 애비를, 콩을 안 먹는 걸 보니 지 고모를, 마실 나간 집에서 넉살 좋게 할머니들 사이에 앉아 있는 걸 보니 지 할애비를 쏙 빼닮았네-. 가뜩이나 어린 시절 할머니댁에 맡겨져 길러진 어린 나는 뭘 먹어도, 뭘 입어도, 무슨 행동을 해도 언제나 친가 어른들을 닮았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야 했다.


다행히(?) 나이가 들며 친가 식구가 아닌 엄마를 닮은 부분도 하나씩 발견이 됐다. 친가 식구들처럼 아담한 키이지만 엄마처럼 팔다리는 길쭉한 부분이나, 아구에 비해 큰 이 때문에 활짝 웃을 때 뭔가 어색해지는 입매, 잠자리나 환경에 예민해 집을 떠나면 돌아올 때까지 고생을 하는 성격 등. 잊고 있다가도 불쑥불쑥 발견하게 되는 모녀 사이의 공통점은 오랜 시간 친탁 도장이 찍혀있던 나에게는 참 신기하고도 반가운 일이기도 했다.

경제력이 생긴 캥거루족으로서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가며, 나는 엄마와의 공통점을 보다 다방면에서 발견하고 있다. 그 중 요즘 나에게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엄마와 나의 취향에 대한 것인데 취향도 유전이 되는 것인지 즐겁게 보던 텔레비전 속에서, 눈을 반짝이며 집중하던 공연장 안에서, 나는 나와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는 엄마를 발견하면 불현듯 즐거워 진다.



1. 장민호와 김우형

미스터 트롯이 전국 중년 여성들의 마음을 두드리던 2020년. 트로트 멜로디는 명절의 시골집에서 말고는 거의 들을 일이 없었던 나는 전국을 휩쓴 그 열풍이 내심 낯설고 어색했다. 인터넷과 텔레비전 채널 곳곳에서 그 방송과 출연자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며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또래 친구들과 요즘 그게 그렇게 인기라던데 나는 잘 모르겠어- 하고 때이른 평을 하기도 했다.(정말 경솔하고 경솔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 열풍이 내 생활 곳곳까지 퍼지며 나의 생각은 180도 달라지고 말았다. 점심시간, 존경하는 베테랑 직장 상사가 수줍은 소녀처럼 '임영웅'에 대한 애정을 고백하시는 모습을 보며 내심 놀란 날을 시작으로, 무뚝뚝한 할머니께서 미스터트롯 출연진들이 나오는 방송을 틀어놓고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 간간이 연락을 주고 받는 대학 동기가 그 방송을 재미있게 보고 있다는 소식까지. 내 주변까지 그들의 매력에 하나둘 물들어가고 있음을 확인하며 나 역시 그 열풍의 한 가운데 놓여있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는 게 바빠 드라마 말고는 이렇다 할 취미가 없었던 엄마도 핸드폰을 붙들고 그들의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설거지를 하는 부엌에서, 잠들기 전 머리맡에서 엄마의 핸드폰은 정겨운 옛 노래가락들을 구성지게 뽑아냈다. 심지어 정기적으로 검사 받을 것이 있어 집에서 조금 떨어진 병원으로 함께 이동하던 날, 엄마는 나에게 '장민호'의 노래를 틀어달라 요청하기도 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라 핸드폰과 차 오디오를 연결하고 장민호를 검색해 나온 가장 첫 노래를 눌러주자 그 노래 말고 이런 제목의 노래가 좋다면서 엄마는 그동안 크게 내색 않던 팬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집에서 넉넉히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길. 아- 모란이- 아- 동백이-, 구성진 노래를 따라 부르는 엄마의 신난 옆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엄마가 특히 좋아하는 노래들을 돌아가며 틀어주느라 한동안 나의 알고리즘에 장민호 씨의 영상과 노래가 종종 올라왔지만, 그날의 일은 나에게 퍽 재미있고 귀여운 추억으로 남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겼던 그날의 기억은 친구의 한 마디 말로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 당시의 나는 '하데스 타운'이라는 뮤지컬, 그 중에서도 하데스 역을 맡은 '김우형' 배우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리스로마 신화 이야기를 바탕으로 사람과 삶, 사랑과 사람의 이야기를 심도 깊게 던져주는 이 극에서 하데스는 공정이라는 이름 뒤 매몰찬 세상의 이치를 확인시켜 주는 냉혈한 사용자이자 불안과 의심으로 바래져 가는 사랑의 의미를 되찾고 새로운 계절을 기약하는 뜨거운 남편으로 등장한다. 그 배역을 큰 키와 낮은 목소리, 천둥같은 카리스마와 부드러운 손짓으로 완성해가는 김우형 배우는 그해 여름, 말 그대로 나의 아이돌이었다. 쓰리피스 정장을 차려 입고 무대를 누비는 하데스를 보기 위해 나는 틈만 나면 공원을 산책(표를 잡는다는 뮤지컬 덕후 용어)하며 눈에 불을 켜곤 했다.

함께 덕질 상황을 공유하며 간간이 같이 뮤지걸을 보러가기도 하는 내 친구는 그 뮤지컬을 보고 후기를 나누던 중, 장민호를 좋아하는 우리 엄마의 이야기에 엄마와 딸의 취향이 완전 닮았다며 우스갯 소리를 했다. 취향도 유전이 되나? 깔깔 웃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날 차 오디오를 채우던 남자답고 구성진 목소리와 텔레비전 속에서 정장을 입고 노래하는 멋드러진 장민호의 모습이 낯설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아! 우리 모녀는 잘생기고 남자다운 사람을 좋아하는구나!(적고 보니 너무 당연한 얘기 같지만) 예기치 못한 곳에서 나는 엄마와 나의 공통점을 또 하나 발견하고 신나게 마음 속의 손가락을 하나 접었다. 이번 공통점은 여러 공통점 중에 꽤 귀여운 공통점인 것 같다고 생각하며-.



2. Music is someone's life

책, 국내 및 해외 아이돌, 국내 및 해외 배우, 스포츠, 만화, 인형 등... 어린 시절부터 나는 꽤 많은 분야를 기웃거리며 덕질을 이어 왔다. 하나에 꽂히면 한동안 그것만 열심히 파다 흥미가 다할 즈음이면 또 새로운 덕질거리를 물색하는, 세미 덕후의 삶을 살아왔달까. 그리고 뮤지컬은 그 얕고 넓은 덕질 생활에서 그나마 꾸준히 그 깊이와 시간, 열정을 유지하고 있는 분야 중 하나이다.

대학 시절, 우연한 기회로 보게 된 뮤지컬은 내 취향의 지침을 돌려놓았다. 이야기가 좋아 국문과에 진학한 나에게 멋진 배우들이 노래를 부르며 가혹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을 헤매는 2~3시간의 경험은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눈 앞에서 쉬지않고 튀어 나오는 꿈만 같은 일이었다. 그 후 나는 용돈을, 또 월급을 아껴 무대에서 인물들이 살아가고 살아내는 삶을 관람하며 많은 감명을 받아 왔다. 그리고 그렇게 한두 달에 한 번씩 극장에서 배우들이 내뿜는 삶을 향한 열정을 느끼고 오는 날은 무미하고 건조한 나의 삶에 색과 향기를 입혀주는 시간이 되었다.


당연하고 자연스럽게도 좋아하는 것은 나누고 싶어지는 법. 좋은 작품이 올라오면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고 주변 사람들 중 관심을 보일 것 같은 사람들에게 운을 띄우곤 했다. 때로는 관심 없는 척, 때로는 몰랐다는 듯이 '이번에 무슨 공연 올라온다던데 들었어?' 하고 말을 건네곤 답변을 기다리는 일은 소심한 나에게는 꽤 긴장되는 일이었다. 상대의 반응에 따라 괜히 표정 관리를 하게 된달까.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렇게 긴장 않고 운을 띄워도 되는 사람을 한 명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우리 엄마. 어두운 곳이 무서워 영화도 부담스럽다던 엄마는 '같이 뮤지컬 보러 갈래?' 하고 묻는 나의 물음에 고민도 않고 '그럼 좋지', 하고 답을 했다. 그렇게 엄마와 함께 보게 된 <맘마미아>. 엄마는 공연장 곳곳을 다니며 포즈를 취하고, 집념의 산책 후 건진 좋은 자리에서 두 손을 꼭 모으고 공연을 관람했다. 공연이 끝나고 모두가 일어나 아바의 노래를 즐기는 커튼콜 무대에 신이나 들썩들썩 팔을 움직이는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비싼 표값이 아깝지 않다 느꼈다.

그렇게 <맘마미아>를 시작으로 우리는 <연극 햄릿>, <시카고>, <지킬 앤 하이드> 등, 이런저런 공연을 함께 보러 다니고 있다. 좋은 것을 보면 엄마 생각이 나는 간헐적 효녀답게 엄마가 좋아하겠다 싶은 극 소식을 들으면 내가 볼 생각보다 엄마를 보여줄 생각에 가슴이 뛰기도 한다. 공연장 근처에서 가볍게 식사를 하고 포토 스팟에서 포즈를 취하는 엄마를 열심히 찍어주고, 가끔은 둘이 마주서서 사진을 찍기도 하며 채워가는 엄마와 나의 관극 일지.


이젠 혼자 공연을 보러 가는 날에도 엄마는 나에게 무슨 공연을 보러 가는지, 어떤 내용인지를 물어보며 눈을 빛내곤 한다. 심지어 직장에서 문화생활을 하는 날, 동료들에게 뮤지컬을 보러 다녀오자 의견을 내고는 나 없이 뮤지컬을 보고 오기도 한다. 이루어 지지 않아 더 아름다운 사랑이었다고, 어떤 배우가 노래를 그렇게 잘하고, 연기가 그렇게 좋더라고. 다녀와 후기를 푸는 엄마의 폼이 과연 뮤덕의 엄마답다.

진지한 상황에서 갑자기 노래를 부르는 것을 어색해 하거나, 어두운 공연장과 편안한 의자 때문에 꿀잠을 자고 나오는 사람들도 많다는데. 함께 본 공연 표를 버리지 않고 화장대에 차곡차곡 쌓아놓는 우리 엄마를 보면, 진짜 취향도, 덕질도 유전이 되는 게 아닐까 꽤 신빙성 높은 추측을 하게 된다.



3. 대문자 F모녀

이렇듯 우리는 잘생기고 목소리 좋은 남자와 극적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함께 뮤지컬을 보러 다니기 전에도 엄마의 거의 유일한 취미는 저녁 시간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를 보는 것이었고, 나는 뮤지컬 외에도 소설, 만화책 등 이야기를 읽는 것을 좋아한다. 가끔 미술관 나들이에 갈 때도 우리는 화가의 기구한 삶이나, 그림 속 인물들의 고뇌하거나 슬퍼하는 표정 앞에서 오래 머무른다. 이 표정 좀 봐-, 아이고 쯧쯧-. 서로 멈춰 서서 가리키는 작품과 설명은 언제나 그런 '이야기'에 가까운 것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공통점은 아무래도 우리 모녀가 모두 감성적인 'F'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는 K장녀병이 있어 나와 내 가족이 처한 일에는 냉정해지지만,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일에 공감을 잘하고 눈물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드라마나 영화, 다큐멘터리를 볼 때도 아 이쯤 울 것 같다 싶으면 자리를 피하거나 딴 생각을 하곤 한다. 사람을 대할 때도 그렇다. 이런저런 이유로 힘들어하는 지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을 쉼없이 깜박이며 촉촉해지는 눈가를 말리려 애쓰곤 한다.

우리 엄마는 나보다 더하다. 통화를 할 때마다 수화기 너머 사람보다 더 크게 화를 내고, 우리 남매가 밖에서 무슨 일이라도 당해오면 자기가 당한 것처럼 더 아파하고 걱정하고 맘을 졸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지 못한다.


수십 년 동안 드라마를 봐온 K드라마 권위자답게, 엄마는 드라마의 전개 과정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짚어내는 능력이 있다. 저 둘이 바람 피겠네-, 저 배역은 곧 극에서 퇴장하겠다-. 드라마를 보며 엄마가 던진 말들은 예언처럼 척척 들어 맞는다. 신기하다 치켜세우면 이 정도는 껌이라고 능청을 떠는 엄마.

하지만 배불리 저녁을 먹고 소파에 기대 앉아 소화를 시키던 평화로운 주중의 저녁. 그동안 보는 지도 몰랐던 드라마를 찾아 틀고 있는 엄마에게 '엄마 그거 봤었어?'하고 묻는 내 말에 '이제 이 드라마도 막판이라 좀 재밌어.'하는 엄마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엄마가 어느 순간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엄마의 드라마를 즐기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어떤 드라마가 시작하면 초반 회차를 보면서 그 드라마의 스타일이나 등장 인물의 성격을 파악한다. 등장 인물들의 소개가 끝나고 남주와 여주가 가까워질 때쯤 출생의 비밀과 각종 계략이 난무하며 주인공이 고난에 빠지는 중반 부분이 시작되면 잠시 그 드라마에서 눈을 돌려 조금 더 먼저 시작했던, 전개가 더 빠른 다른 드라마로 채널을 바꾼다. 그렇게 먼저 시작한 다른 드라마의 주인공이 잃어버렸던 엄마와 조우하고 악인과의 계략 싸움에서 이기며 해피엔딩을 맞으면, 그때쯤 잊고 있던 그 드라마로 돌아와 주인공이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을 보며 속시원해 한다.

나는 엄마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데, 극 중 인물들이 고생하는 것이 보기 힘들어 드라마를 잘 시작하지 못한다. 주인공이 곤경에 처하거나 오해를 살 때면 내가 그런 상황에 있는 것처럼 가슴이 저릿저릿해지는 대문자 F. 드라마를 한 번 시작하면 극 중 인물에게 감정을 깊이 이입하고, 감정소모도 클 것을 알아서, 평이 좋은 드라마는 머릿속에 잘 저장해두고 있다가 1~2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마음의 준비가 된 어느날, 유행도 인기도 상관 않고 뜬금없이 보기 시작하는 편이랄까. 하지만 이야기는 너무나 좋아하기에, 채널을 돌리다가 혹은 인터넷을 유랑하다 마주한 재미난 장면들이 계속 눈에 밟힐 때면 인터넷 클립이나 쇼츠 영상을 보며 극의 흐름만을 따라 갈 때도 있다.


괴로운 건 볼 수 없어, 하지만 궁금해. 이야기를 너무나 좋아하지만, 이야기 속 누군의 가엾고 딱한 모습은 견디기 어려운 마음 약한 우리 모녀. 소파에 앉아 꿈도 사랑도 가족과의 행복도 모두 쟁취한 주인공을 보며 함께 뿌듯해 하는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엄마가 볼 다음 드라마를 기대한다.






나는 여전히 친가 식구들을 많이 닮았다. 다 자란 나의 얼굴을 보며 친가 식구들은 여전히 고모를 쏙 닮았다 평하고, 흰머리가 빨리 났던 아빠처럼 서른이 넘으며 머리 곳곳에 난 흰머리를 감추려 노력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엄마를 많이 닮았다. 팔다리만 길쭉한 체형, 커다란 이, 예민한 잠자리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좋아하고, 멋진 가수나 배우를 좋아하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며 마음 아파하는 취향까지, 우리는 참 많이 닮았다. 그리고 내가 발견한 좋은 것들을 엄마와 함께 나누며, 서로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관찰하고 살피며 우리는 점점 더 닮아갈 것이다.

우리가 닮은 점을 하나하나 손꼽아 가는 나날들이 참 소중하고 기쁘다. 이토록 똑닮은 우리 모녀의 매일이 장민호와 김우형의 노랫소리처럼 감미롭고, 우리가 함께 보는 뮤지컬과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결말처럼 행복하길, 그저 마음으로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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