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씨엠립
가족끼리 1년간 여행을 했다고 하면,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어디가 제일 좋았어요?’였고 다음이 ‘가족이 같이 다니면 싸우지 않나요?’였다. 첫 번째 질문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두 번째 질문은 좀 의외였다.
캄보디아 씨엠립에 도착했을 때부터 우리 가족에겐 티격태격 자잘한 싸움이 이어졌다. 가족끼리의 본격 여행길에 오른 지 열흘이 넘어가던 무렵이었다.
한국에선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었어도 24시간 붙어있진 않았고 첫 여행지인 필리핀 세부에서는 어학원 생활이라 친구들도 많고 학교생활 같아서 별 문제가 없었다. 8년이나 연애하고 결혼한 지 11년 차였던 우리 부부는 싸운 적이 거의 없었는데 이쯤에서 그런 자부심이 깨지기 시작했다. 셋이서 24시간 묶여서 돌아다니다 보니 소소한 충돌에도 감정이 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족끼리의 여행도 적응기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말다툼의 주요인은 역할분담이었다. 아직 여행 초기라 역할분담이 잘 안 되어 있어서 이건 왜 안 했느니, 그럼 네가 하라는 둥 말다툼 패턴이 똑같이 되풀이되었다.
준이는 준이대로 친구가 없어 심심하다고 하고 남편은 이럴 때 친구들 만나 술이라도 마시며 풀어야 하는데 나랑 준이 외에 제3의 창구가 없었다. 나도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우린 가족과 함께 있는데도 각자 외로웠다.
호텔 위성방송에선 한국의 연말 연예대상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었는데 각자의 외로움엔 연말이란 분위기도 한몫했다.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데는 참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한 것 같다. 가족이 제일 중요한 행복의 조건이지만 가족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갈등 해결책으로 수영장 딸린 좋은 호텔에서 하루를 푹 쉬었다. 수영도 하고 맥주랑 맛있는 밥도 사 먹고, 화해의 기념 화투도 세 판 쳤다. (우린 조그만 상자에 화투랑 카드를 가지고 다니면서 심심할 때 셋이서 치곤 했다.)
이렇게 우린 서로의 모서리를 둥글게 마모시켜 갔다.
그 후로 여행에 익숙해지면서 티격태격하기는 해도 사이좋게 다녔는데 여행 10개월째, 시리아에서 다툼이 생겼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사소해서 민망한 문제였다.
아침에 호텔 문을 나서는데 남편이 나에게 호텔로 돌아가 지도를 얻어오라고 했다. 난 관광안내소에서 하나 얻으면 되니까 굳이 호텔까지 돌아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싫다고 하는 게 목소리가 서로 점점 커지더니 급기야 길에서 소리 지르고 헤어지게 됐다.
남편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데 준이가 나를 따라왔다. 준이에게 왜 엄마를 따라왔냐고 했더니 자기도 지금 후회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생각해보니 우리 둘 다 동전 하나 없었다. 배낭엔 물이랑 바나나뿐이었다.
다시 호텔로 돌아왔는데 남편이 없었다. ‘호텔에서 기다리지 어딜 간 거야?’ 하면서 다시 나오는데 길 건너 노천카페에 남편이 앉아 있었다. 보는 순간 피식 웃음이 났지만 꾹 참고 슬슬 화해할 준비를 했다.
우릴 기다리는 동안 남편은 다이어리에 다음 같은 메모를 썼다.
'오늘은 정말 크게 싸웠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머리가 아프고 이상하게 폭음한 다음날처럼 오른쪽 안면근육이 아팠다.
거기다가 아들은 호텔을 옮기고 싶다고 아침부터 투덜댔다. 그 과정에서 몸은 아프고 짜증은 나고 그래서 결국 현주랑 크게 싸웠다. 가끔 현주는 고집이 너무 센 게 아쉬울 때가 있다.(지가 얼마나 잘났다고, 절대 안 진다.)
지금 카페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아들과 현주를 기다리고 있다. 돈을 내가 다 가지고 있어서 이들이 빨리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30분이 지나도 오질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고민할 것 같다. 찾으러 가야 할지 계속 기다려야 할지. 빨리 와라~ 고집 피우지 말고.'
탁자 위에 놓인 이 글을 읽다가 웃고 말았다.
싸울 땐 누구나 다 이유를 갖고 있다. ‘사실은 하나지만 진실은 여러 개’라고 양쪽 다 맞다. 싸울 땐 마음속에 한계선을 그어놓고 절대 넘지 않는 게 중요하다.
딱히 어느 시점인진 모르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싸움이 잦아들고 셋이 찰떡처럼 친해지게 됐다. 정확히 표현하긴 힘들지만 이 장기간의 여행이 우리들에게 어떤 화학적 작용을 해서 친밀함에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 같다.
여행의 중반기쯤에 인터넷으로 남편의 후배가 물어왔다.
‘선배, 여행하면서 뭐가 제일 좋았어?’
남편의 답변은 ‘아들하고 와이프하고 평생 친구가 된 거.’
가족은, 특히 아이가 어릴 땐 서로 부대끼며 지내는 시간이 많아야 정도 많이 든다. 세상에 장담할 일은 없지만, 이 여행으로 준이에게 호된 사춘기가 들이닥쳐도, 경제적으로 어려워져도 우린 잘 헤쳐 나갈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