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산다칸
고대하던 오랑우탄을 보러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섬의 북동부에 있는 작은 도시, 산다칸에 왔다. 조그만 산다칸 공항 건물엔 새들이 둥지를 틀고 있었고 맑은 밤공기가 시원했다. 청정한 느낌이 우리나라 제주도에 온 것 같았다.
바닷가에 위치한 게스트하우스를 뜻하는 백패커스에 자리를 잡았다. 여행 초보자였던 우리는 아침에 공용 부엌에 있는 식빵과 우유를 먹어도 되는지 고민했다. 망신은 잠깐이라 용기를 내어 물어보면서 이런 곳에선 밥을 해 먹을 수도 있다는 걸 배웠고 화장실도 공용을 쓰기 시작했다. 방은 좁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준이는 개미가 많다고 질색을 했다. 준이에게 개미 정도는 이제 친구로 지내야 편하게 다닐 수 있다고 일러두었다.
아침나절 작은 시골 동네 같은 산다칸 시내를 둘러보고 오랑우탄을 보러 나섰다. 우리가 찾아간 세필록 오랑우탄 재활센터는 야생에서 유기된 오랑우탄을 재활훈련시켜 고향으로 돌아가게 돕는 곳이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이곳을 보면서 꼭 와봐야지 했던 곳이다.
이곳은 재활센터라서 오랑우탄들이 모여 있지만 야생에서 오랑우탄은 혼자 생활한다.
숲 속의 외로운 사람.
오랑우탄은 ‘숲 속의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오랑우탄은 매일 저녁 혼자서 새로운 잎사귀들로 둥지를 만들고 아침밥으로 그 잎사귀들을 먹는다. 유인원을 보고 있으면 자꾸 인간들의 생활이 겹쳐 떠올랐다. 털색도 환하고 귀엽게 생겨서 명랑하게 살 것 같았는데 막상 오랑우탄의 생활을 들으니 외로운 자취생 같았다.
느릿느릿 오랑우탄들이 점심을 먹으러 밧줄을 타고 걸어 나왔다.
다음날 아침 일찍 정글 지역인 키나바탄 강 투어에 합류했다. 미니버스에 친절한 가이드 한 명과 우리 가족을 포함해 열 명 남짓한 관광객들이 탔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 곳에 야자나무 플랜테이션이 끝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준이야, 저게 플랜테이션이라고 하는 거야.”
학교 다닐 때 배운 플랜테이션의 개념을 설명해 주었다. 플랜테이션은 기술력을 앞세운 자본가가 현지인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특정 농작물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을 말한다.
이 무지한 관광객은 ‘이게 말로만 듣던 플랜테이션 농장이구나.’ 하고 별생각 없이 스쳐지나갔다. 플랜테이션은 과거의 문제라고만 생각했지 현재에도 문제가 되는지는 잘 몰랐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세계에서 빈곤을 없애는 30가지 방법’이라는 긴 제목의 책에서 이곳 플랜테이션의 문제에 대해 읽게 되었다. 이 지역을 다녀왔기 때문에 이 내용을 유심히 읽게 되었다.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섬은 세제나 가공식품에 널리 쓰이는 팜유의 최대 생산지라고 한다. 팜유는 식물성 기름이라 환경 친화적이라고 광고되고 있지만 실제론 환경파괴의 주범이다. 팜유를 생산하는 야자나무 플랜테이션은 지역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야생 밀림을 밀어낸 자리에 만들어졌고 단일 작물로만 이루어져 자생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농약도 많이 필요하다. 이곳엔 맨몸으로 농약을 다루느라 병들어가는 일꾼들이 많고 아이들은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책에서는 해결책으로 ‘수입 기름을 쓰지 않는다거나 세제보다는 비누를 사용하고 환경과 인권을 생각하는 플랜테이션에서 생산된 팜유를 사용한다.’가 제시되고 있다.
정글투어의 첫 코스는 고만통 동굴이었다.
이 동굴 앞에는 제비집을 채취하는 노동자들의 임시 주거지가 있었다. 제비집은 바다제비의 침샘 분비물로 만들어지는데 동굴의 높은 지점에 있어서 노동자들은 이 캄캄한 동굴 꼭대기를 안전장치도 없이 밧줄과 사다리만으로 올라가 제비집을 딴다고 했다. 돈을 벌기 위해 목숨을 거는 셈이다.
먹고 산다는 것이 제비집을 사 먹는 사람들에겐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이고 채취하는 사람들에겐 얼마나 비장한 일인지를 생각하면서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어둠침침한 동굴 바닥에선 바퀴벌레가 우글거리고 천정엔 박쥐들이 빽빽이 매달려 있었다. 할리우드 모험 영화에 나올듯한 분위기였다. 바퀴벌레나 박쥐들은 우리를 별로 신경 안 쓰는 것 같은데 우리들은 지나치게 조심하며 지나갔다.
키나바탄 강에 도착해서 잠시 쉬었다가 배를 타고 동물들 구경에 나섰다. 멀리서 야생 원숭이랑 오랑우탄도 보이고 휘청거리는 나뭇가지 위에 돌돌 몸을 말아 자고 있는 초록색 뱀도 보였다. 새들은 너무 많아서 관심 밖이었다.
이곳은 야생 오랑우탄과 함께 프로보셔스 원숭이가 유명하다. 커다란 코에 성기가 새빨개서 약간 민망해 보이는 원숭이지만 사나워 보이지는 않았다. 성적 매력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렇게 진화했다고 가이드가 설명했다. 암컷들은 모두 집을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수컷 원숭이가 혼자 앉아 나뭇잎을 먹고 있는 걸 보자니 부인이 가출한 집에서 혼자 밥 먹는 아저씨의 모습처럼 약간 처량했다. 오랑우탄도 그렇고 이 동네 원숭이들은 혼자 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저녁을 먹을 때, 같이 보트에 탔던 호주 커플이 준이에게 조그만 코알라 인형을 선물로 주었다. 강가 나무에 있던 조그만 동물들까지 잘 찾아내던 커플이었다. 그들이 야생동물들을 발견하면 그제야 우리 가족은 ‘어디? 어디?’ 하며 고개를 두리번거리기 일쑤였다. 알고 보니 아프리카나 남미 등에서 동물 보는 투어를 많이 해서 내공이 쌓인 커플이었다.
이들이 코알라 인형의 이름을 지어보라고 하자 준이가 ‘알라’라고 지었다고 했다. 코알라의 알라이기도 하고 말레이시아는 이슬람 국가라서 신을 알라라고 부르니까 알라로 지었다고 했다. 알라는 지금도 준이 방 벽에 꼭 매달려 있다. 아프리카에서 사 온 펭귄 인형이랑 아부다비에서 온 낙타 인형, 필리핀에서 온 거북이 인형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