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비아 스피츠코프
캠핑에 익숙해질 때쯤 도착한 스피츠코프에선 진짜 야생 체험을 했다.
캠프 사이트라는데 나뭇가지 같은 걸로 겨우겨우 둘러친 화장실만 있고 물이 나오는 곳도 없었다. 더위 때문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챙 모자까지 쓴 채 망연자실 앉아 있는 남편의 등 뒤 바위 위로 도마뱀이 기어갔다. 그 선명한 색깔에 더위로 지쳐있던 준이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한가롭게 나왔다가 우리를 의식한 도마뱀이 후다닥 자리를 피하자 다시 준이는 흐느적 녹아내렸다.
동물들이 물을 찾아 이동하기 때문에 아프리카는 건기에 가야 동물을 많이 볼 수 있다. 대신 건기엔 숨이 막힐 정도로 덥다고 한다. 우리가 도착했을 땐 우기였는데도 이렇게 더운데 건기는 얼마나 더울까? 아마 몸이 햇볕에 구워질 것 같다.
더위가 조금 가라앉을 때, 포크로 만든 팔찌를 멋지게 휘감은 가이드를 따라 바위산에 올라가서 부시맨들의 벽화를 구경했다. 이곳의 벽화는 그냥 방치되어 있었다. 만약 이런 바위그림이 유럽에 있었다면 세계사 책에도 나오고 철저한 보호를 받았으리라.
이 가이드는 가끔씩 관광객을 잃어버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란 우리들은 가이드 놓칠세라 열심히 따라다녔다. 더구나 이곳에선 가끔 표범도 나온다고 했다.
캠프로 돌아와 보니 모닥불이 피워져 있고 동화책의 마녀가 갖고 있을 것 같은 검은 무쇠냄비엔 닭이 끓고 있었다. 닭이 익는 동안 노래를 들으며 요리사인 요요가 춤춘다. 올가가 따라 추고 남편과 준이도 추고 내가 동영상을 찍는 동안 모두 신나게 웃으며 춤춘다.
그날 밤은 텐트도 치지 않고 바위 위에 침낭만 깔고 잤다. 바위 위에 나란히 침낭을 깔고 누웠는데 둥그런 보름달이 너무 밝았다.
“누가 불 좀 꺼주세요. 달빛이 너무 밝아 선글라스가 필요해.”
호주 아가씨 프리실라가 웃으며 말했다.
“내겐 선글라스가 아니라 문(moon) 글라스가 필요해.”
프리실라 옆에 누운 내가 말했다.
킥킥 웃던 준이는 금방 잠이 들고 어느새 나도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땐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다.
나미비아의 에토샤 국립공원 캠프 사이트에 도착하자마자 타는 더위를 잊으려는 듯 모두 수영장으로 몰려가 풍덩. 나와 프리실라만 그늘에 누워 잠을 청했다.
내가 조그만 탑처럼 생긴 건물을 보면서 “저건 라푼첼에 나오는 성 같다.”라고 했더니 프리실라가 못 알아들었다. 주절주절 내용을 이야기하니 그제야,
“아! 르펀~췔↘!”
하면서 라푼첼은 어느 나라 발음이냐고 무시하듯 물었다.
아~ 영어가 싫다. 프리실라 넌 영어가 모국어지만 난 어렸을 적에 ‘라푼첼’이라고 동화책에서 읽었고 영어 발음 따윈 들어본 적도 없단 말이야. 그리고 지금 호주인인 너와의 의사소통을 위해 내가 유창한 우리말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어로 말하고 있는 거거든.
가끔씩 영어권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아는 개념인데 영어 단어를 몰라서 헤맬 때가 있다. 그러면 그들은 우리에게 그 단어의 개념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면서 약간 교양이 딸리는 동양인 취급을 한다. 우리도 학교 다닐 때 다 배웠다고, 그런데 예를 들면 ‘삼투압 현상’이란 단어를 영어로 아는 일반인이 얼마나 되겠냐고 묻고 싶어 진다.
복수의 기회는 찾아왔다.
바오밥보츠와나의 바오밥 플래니트라는 캠프 사이트에는 바오밥 나무들이 있어 입구에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조각상을 세워 놨다. 취미가 여행이라 일 년에 몇 개월씩은 꼭 여행을 다니시고 호주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암 조직을 연구하러 미국으로 가실 교양 있는 과학자께서 어린 왕자를 모른다고 하셨다.
“뭐? 프리실라, 어린 왕자를 들어본 적도 없어?”
난 최대한 나긋나긋 친절하게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설명해 줬다.
너무 유치했던 것 같다... 그래도 통쾌한 걸 어쩌랴.
(물론, 모든 박사학위 소지자가 어린 왕자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