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할 땐 어떤 옷을 입을까
어느 여행 가이드 책에도 옷을 예쁘게 입으란 말은 없었다. 너무 화려하면 소매치기의 표적이 될 수 있으니 간소하게 눈에 안 띄는 색으로 입으라고 적혀 있었다.
그 말을 믿고 남대문 시장 등산복 전문매장에 가서 예쁜 옷들은 제쳐두고 가격 대비 기능 최고인 고어텍스 잠바를 샀다. 남편 옷은 군청색으로 내 옷은 회색으로.
이 회색 잠바가 일 년 내내 나를 우울하게 할 줄이야.
여행을 멋 내러 가는 건 아니지만 남미를 가든 아프리카를 가든 다른 여행자들은 꽃분홍색 잠바도 잘만 입고 다녔다. 내가 입은 헐렁하게 큰 아저씨용 회색 등산 잠바는 어떻게 입어도 촌스러워서 오히려 눈에 띄었다.
떠나기 전에 시어머니가 걱정 어린 말투로,
‘절대 돈 많아서 여행 다니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고 다니고 누가 물어보면 그 나라에 돈 벌러 왔다고 해라.’라고 신신당부했는데, 누가 물어보지 않아도 우리는 어린애 데리고 막일이라도 해서 돈 벌러 온 부부처럼 보였다.
아르헨티나의 최남쪽 칼라파테에서도 우리 옷이 가장 돋보였다. 안 그래도 동양인이 드물어 지나가면 쳐다보는 작은 동네에서 똑같은 잠바를 군청색, 회색으로 입고 애는 검은색으로 입혀 며칠간 정처 없이 돌아다니니 사람들은 우리를 쉽게 기억할 수 있었을 거다.
주로 여름인 곳을 따라 여행 루트를 짜서 매일같이 잠바를 안 입어도 되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남미 지역은 고산지대라 잠바 안에 스웨터까지 껴입어야 했으니 잠바를 꺼낼 때마다 저절로 불평이 나왔다. 남편은 그래도 기능성은 최고로 좋은데 뭘 투정하느냐고 얘기하지만 그 기능성 때문에 쉽게 버리지도 못하는 게 더 싫었다. 티셔츠 같은 옷들은 몇 개월에 한 번씩 새로 사도 되지만 잠바는 쉽게 버릴 수도 없다. 남미 지역의 특산품인 두툼한 스웨터라도 사 입고 싶어도 있는 옷을 버리지 않으면 배낭 부피 때문에 새로 살 수도 없었다.
남미 여행 때에 내 꿈은 유럽에만 도착하면 이 두꺼운 회색 잠바를 한국으로 부쳐버리고 하늘하늘, 패셔너블한 옷으로 갈아입으리라는 것이었다. 한국으로 부쳐도 돌아가서 과연 입을까 의심스러웠지만 정든 잠바를 버리는 비인도적 행위를 자행할 수는 없었다.
적당히 밝은 색 옷으로 준비할 걸 후회막급이었다. 현지에 가도 다 사람 사는 곳이라 싼 옷들은 얼마든지 있어 한국에서부터 많이 준비할 필요도 없었다. 다니다 보니 현지에서 유행하는 옷들을 사 입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었다. 특히 바람 잘 막아주는 페루산 줄무늬 바지는 적극 추천 아이템이다.
페루에서는 두툼한 야마 털 스웨터로, 에콰도르에선 하얀색 블라우스로, 뉴욕에선 시가렛 팬츠에 탱크톱이나 원피스로, 다른 여행자들은 어떻게 그렇게 그 지역에 맞는 옷을 잘들 입고 다니는지. 아마 우리 같은 장기 여행자가 아니거나 하나 사면 두 개 버린다는 철칙을 지키는 여행자일 것이다.(옷보다도 더 중요한 일은 짐이다. 내가 산 옷은 다 내가 지고 다닐 짐이 된다.)
결국 회색 잠바는 유럽에서도 들고 다니다가 호주 캠핑이 끝나고 더 이상 잠바 입을 일이 없게 되자 과감하게 버려졌다. 남편과 준이 잠바는 기능성 등산복이란 명분으로 한국에 와서 옷장에 걸어 놨지만 그 후로 한 번도 입은 적이 없다. 준이 잠바는 금방 작아져서 다음 임자인 사촌동생에게 넘겨졌지만 남편 잠바는 이사 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옷장에 버티고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