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행 Apr 21. 2023

행복한 맥주의 나날과 백 투더 스쿨

벨기에-룩셈부르크-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니스

 파리에서 출발한 렌터카는 벨기에, 독일, 오스트리아로 이어 가고 있었다. 유럽 렌터카여행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맥주가 맛있는 곳을 따라가는 코스여서 우린 이 코스를 ‘맥주벨트 여행’이라 불렀다. 이때의 사진들 속에 남편은 늘 맥주잔을 들고 흡족하게 웃고 있다.    

  맥주가 1,538종류나 있다는 벨기에를 시작으로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옥토 페스트로 유명한 뮌헨을 거쳐가며 아주 풍족하게 맥주를 마셨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도 우린 모차르트 생가 대신 슈티겔 맥주공장을 견학했다.

슈티겔 맥주공장과 틀니로 맥주병 따는 법을 알려준 사진

 예쁜 맥주잔들이 인상 깊었던 벨기에와 캠핑용 가스통을 찾아 헤매던 룩셈부르크를 지나 남편이 좋아하는 독일에 도착했다. 아우토반을 달리던 남편은 감탄사를 남발하며 좋아했다.

남편은 독일이 ‘합리적이라서’ 좋다고 했다. 자칭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강조하는 남편으로부터,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이라는 평을 듣는 나에게 독일은 다른 유럽 나라랑 별 차이 없어 보였다. 그저 룩셈부르크에서 그토록 찾아 헤매던 캠핑용 가스통을 찾아내서 기뻤을 뿐이었다.

 하이델베르크 캠핑장에서 새로 산 가스통을 연결해 저녁을 지어먹은 우리 가족은 과일까지 챙겨서 먹는데 옆 텐트의 독일 청년 둘은 잔디에 누워 맥주만 마시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밥 대신 마시는 그 맥주는 젊음의 상징으로 보였다.

 하이델베르크를 떠나 도착한 로텐부르크는 독일의 로맨틱 가도와 고성(古城) 가도가 교차하는 관광의 도시로 마치 놀이공원 세트장 같았다. 동화 속 마을 같은 이 작은 도시도 술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넘치는 관광객들에 섞여 돌아다니고 있을 때 정시를 알리는 시청사 시계탑에서 술잔을 든 인형들이 나왔다.  이 시계탑의 이야기는 17세기로 거슬러 간다. 17세기에 틸리(Tilly) 장군이 이끄는 가톨릭 동맹군이 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 틸리 장군은 약 2.8L의 포도주를 단숨에 들이켠다면 도시를 구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이 도시의 시장은 제안을 받아들여 원 샷으로 포도주를 마셔 결국 도시를 구했다고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술 마시는 것으로 실천한 시장이라니... 만약 우리 남편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이 도시뿐만 아니라 독일 전체를 구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다. 남편은 아직도 학교 다닐 때 ‘빨대로 500cc 맥주 빨리 마시기’ 내기에서 2.8초의 기록으로 우승했다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로텐부르크의 시계탑

 '술의 추억'은 오스트리아에서도 이어졌다. 기대를 품고 샤프베르크 산악열차를 타고 올라갔는데 자욱한 안개가 모든 것을 가리고 있었다. 마치 천국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처럼 앞서 걸어가는 사람들의 실루엣만이 희미하게 보였다. 실망을 머금고 이승의 마지막 지점인듯한 휴게소 문을 열자, 오스트리아 노인 단체관광객이 가득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신선들처럼 보이던 관광객들은 큰소리로 합창하며 흥겹게 맥주를 마시면서 우리에게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혈색 좋은 할아버지들, 높은 톤으로 웃는 할머니들은 어색하게 맥주를 따르던 우리에게 호쾌하게 건배를 제의했고 무슨 노래인지도 모르지만 우리도 같이 흥얼흥얼 따라 불렀다.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도 노래와 왁자하게 웃는 농담과 연설이 이어졌다. 한국 노인관광객들에게 관광버스 춤이 있다면 이분들에겐 합창이 있었다. 


짙은 안개로 사진 속의 모습은 아예 보이질 않았다.


 그러나 맥주의 행복한 나날은, 프리첼을 곁들여 자몽맥주를 마시던 얼음동굴과 소금광산으로 유명한 힐슈타트에서도 이어졌지만 영원하진 않았다. 여행 중 남편에게 가장 큰 위기는 등 뒤에서 악어가 텀벙거리던 아마존도 아니었고 돌 섞인 비바람이 불던 칠레의 또레스 델 파이네도 아니었다. 바로 술이 금지돼 있던 중동이었다. 금주의 여행기간 동안에 싱글 거리던 남편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졌었다. 물론 금지됐다고 못 구할 리는 없었지만 애 데리고 다니는 입장에서 굳이 술을 먹겠다고 돌아다닐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집트 다합 바닷가 카페에서 금주의 기간을 끝내고 맥주를 마시는 순간, 나조차도 모든 스트레스와 주름이 펴지는 걸 느꼈다. 

 이때 내겐 깨달음의 순간이 왔다. 남편은 친구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늦게까지 술을 마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는 진정 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여름이 끝나가던 그때, 돌아갈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맥주의 기간 동안 준이는 호숫가 바닥에 떨어진 사과를 주워 먹던 거만한 백조에게 물리기도 하고 알프스 얼음물이 흘러고인 호수에 들어가 수영도 했다. 야외술집에서 옆 테이블의 유럽 노부부들과 친해지기도 했다. 

 독일 뮌헨에서는 미술관을 둘러보다 지쳐서 잔디밭에 누워 있는 사이에 네 잎 클로버를 발견했다. 

 '어떤 행운이 찾아오려나. 무사히 여행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인가?'라고 생각하는 사이에 준이가 얕은 비명을 질렀다. 

 아동복 가게에 ‘back to the school’이란 광고 문구를 본 것이다.  머지않아 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생각에 압박을 받았나 보다.  

  뮌헨에 갔던 때는 8월 말이라 여름 햇빛이 가을빛으로 바뀌어 가고 가지 끝에 달린 사과는 부분적으로 빨갛게 익어갔다. 우리의 시간도 그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여행 기간이 오래될수록 여행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져 갔다.

면역력이 떨어졌는지 벌레들한테 물렸는지 아니면 따가운 햇볕 때문인지 몸 이곳저곳이 가렵고 긁어서 딱지가 앉아도 즐거웠다. 여권이 나오면 반공교육을 받고 온 동네 사람들이 구경을 오던 시절부터 배낭여행을 다니셨다는, 나일 강 투어에서 만났던 부산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여행하다 한국에 돌아갈 날이 가까워지면 어디 도망갈 곳이 없나, 다른 곳으로 또 여행할 핑곗거리를 자꾸만 찾게 된다.'라고 하셨었다. 

 이때의 나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몸은 피곤에  이겨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데 마음은 자꾸만   곳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돌아다니는 곳이 아무리 바가지가 심하고 불편하고 더러워도 마음은 개의치 않았다

 가족끼리도 여행이 오래될수록 신뢰가 깊어지면서 친밀해졌다. 서로서로 화도 내고 미안해도 하면서 정들어 가고 있었다다른 사람들 눈에도 그런 점이 보이는지, 한국에 돌아온 직후 만났던 친구도 준이와 내가 굉장히 친해 보인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때 아이에겐 돈 많은 부모보다 시간이 많은 부모가 더 좋은 부모라는 걸 배웠던 것 같다. 같이 뒹굴며 노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같이 밥을 먹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준이와 더 친밀해졌다.

 이때 쌓아둔 친밀감을 밑천으로 그 무섭다는 중2도 그럭저럭 무사히 넘길 수 있었고 속얘기를 나눌 수 있는 가족이 될 수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파리에선 뭘 먹어도 맛있다 그런데 한국음식도 간절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