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동네

by 바다숲

중앙시장에서 유명한 칼국수 집에서 법원 방향으로 죽 내려가면 늘 가던 커피숍이 나온다. 상호는 바뀌었지만 여전히 커피숍이라 반갑다. 자주 가던 가게들이 지금은 다 사라지거나 바뀌었다. 가끔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을 때, 오래 살던 그 동네를 찾아간다. 거기선 스무 살에서 서른 살의 나를 만날 수 있다.



오래된 벽돌집들이 늘어서 있다. 저기 보이는 페인트 벗겨진, 피자 가게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세 번째 집이 내가 살던 집이다. 집들이 어찌나 비슷비슷한지 술 먹고 귀가할 때면 헷갈려서 다른 집의 열쇠 구멍에 열쇠를 밀어 넣기도 했다. 대문을 들어와 유리로 된 현관문을 한 번 더 열고 들어서면, 방벽은 누렇고 거실과 천장 모두 다 오래 묵은 나무색이다. 시간이 70년대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오래된 집이 다 그렇듯 웃풍이 세서 겨울엔 밖이나 매한가지였다. 하필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온 날, 눈이 많이 내렸고 내내 위태롭던 보일러가 고장 나 작은 난로에 의지해 밤을 보냈다.

눈이 오면 전화해서 “주머니에 손 넣고 다니지 마라.”고 걱정해 주시던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에 슬픔과 절망은 하나라는 걸 알게 되었다.


작고 마른 몸집에 까랑까랑한 목청의 앞집 할머니는 다 늙은 장가 안 간 아들과 새벽마다 시끄럽게 싸우셨다. 수도세 전쟁이 일어났을 땐, 맨발로 달려 나와 적군의 편에 서셨다. 승리했지만, 이후 할머니는 인사도 받지 않고 매섭게 쳐다보곤 하셨다. 가끔 집 앞에 쓰레기를 몰래 버리시기도 했지만 모른척했다.

마귀할멈의 현신 같은 할머니가 끝없이 거슬리듯, 가난도 끝없이 계속될 것 같았다. 에어컨 없이 푹푹 찌는 더위 속, 줄줄 흐른 땀을 훔치며 아무리 책장을 넘겨도 머리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밤에 불을 다 끄고 창문을 전부 열면 조금이나마 버틸만했다.


산을 깎아 만든 이곳 달동네에서도 삼백여 계단 위 최고층에 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올라가면 지쳐서 한참 땀을 식혀야 했다. 공부하다 잠깐 쉴 때 계단에 앉아 집들을 내려다보며 혼잣말을 했다. ‘저 많은 집들 중에 왜 내 집은 없을까? 언젠가 가질 수는 있을까?’ 고개를 저었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매일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지친 몸을 이끌고 누운 침대 밖은 작은 소리도 선명하게 들렸다. 귀마개도 소용없었다. 새벽녘 간신히 잠들고 여섯 시에 일어나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떼고 비좁은 화장실 겸 세탁실에서 샤워하며 잠을 쫓았다. 도서관으로 퇴근하며 일과 공부를 지겹게 반복했지만 번번이 시험에 떨어졌다. 방은 도둑맞은 듯 정신없고 어지러워서 마치 내 머릿속 같았다. 어디로 가는지 뭘 하는 건지 뿌연 안개가 자욱했다.


그땐, 너를 버리는 것 말고는 방법을 몰랐다. 언젠가 마음이 식은 자리에 현실이 들어 오고 원망이 차오를까 두려웠다. 매일 밤 얇은 벽 뒤의 소리들에 판단력이 흐려졌던 것일까. 아니다. 터미널에서 울던 너를 차갑게 버려두고 버스에 오른 나는 너보다 더 많이 더 오래 울었다. 선택은 내 몫이 아니었고 불행도 내 탓이 아니었다.


아직도 시야를 가로막고 있는 이 안개를 걷어내야겠다. 그토록 바라던 눈부신 내일이, 바로 오늘이다.


이제 좀 쉬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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