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와 자유에 관한 단상

by 바다숲

날개를 지닌 것들은 자유로워 보인다. 어릴 적 시골 큰집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뭔가 날아와 마당에 퍽하고 떨어졌다. 사촌오빠와 조심조심 다가가 보니 새총에 맞은 참새가 죽어있었다. 이후 일은 아마도 내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은 아닐 것이다. 어느 순간 사촌오빠가 참새를 석쇠에 굽고 있었다. 징그럽게도 먹을 게 없던 시절이었다. 커피숍 유리창 너머 보도블록에 참새가 날아와 나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이렇게 작고 귀여운 것을. 죄책감이 들어 차마 참새에 대한 글은 못 쓰겠다.


한참을 앉아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키보드는 하얀색이고 모니터 둘레는 검은색이다. 한글문서 바탕은 흰색이고 글씨는 검은색이다. 멍하게 바라보다 갑자기 비둘기가 떠오른다. 비둘기는 흰 바탕에 검은 점이 있기도, 반대로 검은 바탕에 흰 점박이가 있기도 하다. 흔히 보는 회색과 초록색 황색 등 다양한 컬러의 완벽한 조화가 기가 막히다. 목덜미의 은은한 보랏빛은 마치 조류의 왕족처럼 고귀한 느낌을 준다.

우리나라는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속설 때문인지 까치는 성스럽고 반가운 이미지다. 까치를 본 날은 설레 하며 복권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죽음 곁에 있는 까마귀만큼이나 새까맣다. 흰색과 검은색의 조화가 깔끔하나 자로 잰 듯해서 우아한 맛이 없고, 생기가 없다.

그에 비해 비둘기는 다양한 컬러의 조합이 튀지 않고 오묘한 색감의 조화가 은은하면서 자유분방해서 생동감이 넘친다. 특히 오후의 햇볕이 내리쬘 때 움직임에 따라 빛을 반사하는 초록 깃털은 예술의 경지이다. 또 나만 아는 비둘기의 훌륭한 점이 있다. 바로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이다. 내가 지나갈 땐 좀처럼 길을 터주지 않고 오히려 내 쪽으로 툭툭 걸어 나오며 점점 구석으로 몰이를 한다. 이놈 보통 비둘기가 아니구나! 속말하며 몰이를 당해 길가에 붙어 걷다가 얼른 피하곤 한다. 그러나 겁을 모르는 아이들한테는 오히려 몰이를 당하다가 푸드덕 날아 도망간다.


동네 하천변엔 까치, 비둘기, 참새들이 한데 어울려 노는 그들만의 공원이 있다. 지나가다 보고는 비둘기가 참 예쁘구나 하고 다시 감탄한다. 비둘기 개체수가 많아지면서 닭둘기니 비위생적이니 하는 뉴스에 파묻히고, 흔하기 때문에 아름답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 건 왠지 억울하다. 곁에 늘 있는 것들의 아름다움과 귀함은 잊기 쉬운 법이다.


비둘기는 땅을 떠나 하늘을 날기도 하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기도 한다. 그런 그들의 자유는 하늘에서 일까? 땅에서 일까? 큰 의미 없을 수도 있다.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서든 자유로우니까 말이다.

나의 자유는 이곳을 떠나서 일까? 이곳에서 일까. 자유라는 말은 늘 가슴을 뛰게 하지만, 지금은 감히 꿈꾸지 못한다. 그리고 집에 있는 파랑새를 찾아 온 세상을 헤매는 인간의 특성상, 저곳에 가면 다시 이곳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몸이 오래 한 곳에 묶여 답답할 땐, 마음 한 자락 뚝 떼서 저 멀리 보내 본다. 잠시 눈을 감고, 나는 지금 좋은 이와 별들이 와락 쏟아지는 깊은 산 속 대청마루에 누워있다고 상상해본다. 별과 함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쉬고 있는 내 아바타가 있다고. 떠나는 것만이 자유는 아니다.


옷이 어깨를 누르는 짐짝처럼 숨 막히게 할 때가 있다. 옷장을 비워 어깨에 지고 의류함에 탈탈 털어 버린다. 옷을 버리면 옷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욕심과 부담을 버리면 일로부터 자유를, 나를 돌아보고 기대를 버리면 관계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그렇게 버리고 또 버린 후, 가진 것들을 아름답다 여길 때 비로소 자유가 시작되는 것 아닐까.


벚꽃 구경하겠다고 헤매고 다닌 강원도보다 우리 집 앞 벚꽃이 더 크고 흐드러지게 피었다는 것을. 제주도 가는 비행기 위에서 연신 감탄하며 수십 장 찍어대던 구름보다 늘 걷는 산책길의 구름이 더 희고 웅장하다는 것을. 일몰시각, 방충망을 열어젖히면 형형색색으로 물든 베란다 너머 하늘이 그 유명한 코타키나발루의 노을보다도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 이곳이 훨씬 더 멋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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