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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숲 Feb 03. 2024

어제, 민원

오랜만에 찾은  바닷가 앞 카페는 컵이 바뀌고 맛도 바뀌었다. 힐링을 위해 찾은 바다인데 춥고 어둡다. 아직 겨울이다.


어젯밤 깬 밥그릇이 생각났다. 어제 낮에는 저녁을 안 먹겠다고 했다가 저녁에 맘을 바꿔 맛있는 걸 먹자고 했다. 남편은 짜증스럽게 반응하며 왜 자꾸 말을 바꾸냐고 했다. 한번 말을 뱉었으면 지키라고 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낮에 한 통화 내용을 복기하는 진상 같은 남편을 보다 결국 화가 치밀었다. 요구르트를 먹기 위해 밥그릇을 꺼내 식탁에 세게 놓다가 힘조절을 못해 산산조각 깨진 도자기조각이 부엌과 거실  사방에 튀었다. 배가 너무 고프고 참담했다. 모래알보다도 소소한 일로 이렇게 기운 빼고 싶지 않다.


민원을 받았다. 그리고 오늘 잠을 5시에 깼다. 아무래도 마음이 쓰였나 보다.


며칠 전 책제목만 한 페이지 길게 적어 와서는 책을 다 찾아주고 없으면 예약 걸어달라던 분이 있었다. 선임이 지난번에도 싸워봤지만 어쩔 수  없었으니 그냥 해주라고 했다. 그분이 오늘 전화를 해서 이미  읽은 책이라며 예약 취소를 요청했다. 평소처럼 예약 취소와 관련되어 제재 사항을 전달드렸다. 그분은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니들이 내가 본 책인지도 확인 안 하고 예약을 또 걸어서 이렇게 된 거 아니냐 니들 잘못인데 왜 내가 제재를 받냐'라고 했다. 나는 특별히 편의를 봐드린 거고 선생님이 이미 읽으신 책인지 아닌지까지 일일이 확인할 수 없다고 답했다. 그분은 그따위로밖에 일을 못하냐고 노발대발하며 당장 사과하라고 했다. 그제야 더 이상 말이 안 통함을 깨닫고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라고 영혼 없이 말했다. 계속 화를 내다가 이름을 묻고는 지금 근처니까 금방 쫓아오겠다고 했다. 얼굴 보고 반드시 제대로 된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2층에서 책을 꽂고 있었다. 선임이 사색이 되어서 달려와 진짜로 쫓아왔다며 가서 무조건 죄송하다고 하라고 했다. 속으로 한숨을 길게 내쉬며 내려가는 계단이 황천길 같았다.


사실 그 사람이 와서 나에게 엄청 화를 내고 창피를 주거나 사과를 요구할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보자마자 '아까 많이 화나셨죠?'하고 친근하게 굴며 잘 들어주자 기분이 나쁜 이유를 한참 명하시더니  "인상이 좋으시네. 좋은 인상으로 일 잘 해봐요."라고 덕담을 해주고 가셨다.


와서 엄청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삿대질을 하고 그럴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과 걱정을 했지만, 인간적으로 대하면 언제나 소통은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호한 대처보다는 역시 공감이 필요한 거였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 남에게도 필요한 거였다.


분노 버튼이 잘못 눌려진 것이다. 자격지심이 이렇게 무서운 거다. 자기는 자기한테만 예약취소 시 제재가 있다고 말하면서 내가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약취소 시 자동으로 시스템에서 문자가 가는데, 그것도 내가 일부러 보낸 줄 알았다는 것이다. 왜냐면 컴퓨터를 할 줄 몰라서 항상 우리에게 예약 또는 상호대차를 부탁하기 때문이다. 부탁하는 입장에서 무시당할까 봐 항상 조마조마하고 있던 것이다.  손을 덜덜 떠시면서 문자를 보내주시는데... 조금 서글펐다.


내 마음의 상처와 분노버튼, 자격지심은 뭐가 있을까. 내 속엔 어떤 어둠이 있을까. 최선을 다하지 못한 지난날들, 우유부단한 선택, 잘못된 결정으로 인한 피해... 잘한 것일까. 되돌리고 싶다... 대학 진학부터 임용 공부 취업 그리고 결혼까지 뭐 하나 제대로 선택한 게 없다.. 는 생각이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힌다. 그래도 앞으로 가자. 계속 가자. 해도 왠지 저 끝엔 낭떠러지만 있을 것 같아 두렵다. 내 결정을 못 믿겠다.


천길 낭떠러지 밑에 떨어져 박살 난 것들,  회한에 떨어지는 눈물, 깨져 나뒹구는 컵 조각들. 과거는 그런 것이다.  다시 붙일 수도 건질 수도 없다.  벼랑에 나를 던질게 아니라면 떨어진 것들은 저기 두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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