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의 수술과 30여 주간의 목발생활
수술실 풍경은 다 비슷하다. 차가운 베드가 가운데 있고, 양쪽에는 수납장들이 늘어서있다. 수술대에 누우면 수납장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마치 베드에 누운 환자를 지키려는 수호대 같다. 마취제가 몸에 들어가면 난 나 혼자만의 도전을 시작한다. 마취제를 이겨보려는! 약물이 몸에 들어가는 순간 무기력하게 정신을 잃는 게 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던 어느 날부터 마취를 할 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나 도전한다. 눈을 부릅뜨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노력한다. 몇 초를 더 버텼는지, 버티기는 한 건지, 여전히 마취약에 바로 마취가 된 건지는 모르겠다. 이런 도전을 하고 있으면 들리는 말이 있다.
"환자분, 눈 감으세요." 그 말을 들으면 마법처럼 눈이 스르르 감긴다. 그렇게 수술은 시작된다.
2015년부터 총 5번의 수술을 받았다. 양쪽 발만.
자세한 수술명은 밝히기 어렵지만, 중족골 수술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중족골에 이상이 있었고, 허리 통증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받게 된 수술은 양쪽 발 1번씩, 수술하면서 박은 철심? (이름이 생각이 안 난다.) 같은걸 몇 달 뒤에 다시 제거하는 수술까지 총 4번이 계획되었다. 한 번은 염증이 생겨 덤으로 더하게 되어 총 5번의 수술을 받았다. 한번 수술하면 발 옆을 절개하여야 하고, 뼈 수술이다 보니 깁스를 했다. 한 번 수술했을 때 깁스를 거의 6주~8주를 했다. 그렇게 다섯 번. 6주씩 깁스를 했다고 해도 30주. 총기간은 2년 반 정도 걸렸는데, 그중 30주 정도를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 다녔다.
처음 목발을 손에 쥐었을 때 앞이 캄캄했다. 체지방율 30%가 넘는 몸을 자랑하는 나의 팔에 근력이 있을 리가 있나... 목발질을 몇 번만 해도 팔이 아프고, 손바닥에 물집이 잡혔다. 겨드랑이는 또 얼마나 아픈지... 바로 장비 검색에 들어갔다. 목발 겨드랑이, 손잡이 쿠션을 구입했고, 이 장비들은 폭신해서 목발 사용에 큰 도움을 줬다. 그때 살던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 2층이었다. 계단을 내려오다 넘어지기도 하고, 올라갈 때는 5분 이상 걸리기도 했다. 목발 때문에 더 힘든 날이었다. 그럼에도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목발 보행에 익숙해지자 목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게 됐다. 일반인들 보행 속도에 맞춰 걸을 수도 있었고, 계단은 4~5층까지도 거뜬히 올라갔다. 목발로 달리기를 해 보이겠다며 빠르게 목발질을 하다가 그대로 앞으로 넘어져 온몸에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런데도, 목발부심을 버리지 못했다.
3번째 수술 때부터는 입원수속도, 입원생활도, 퇴원수속도 나 혼자 했다. 병원가방을 목에 걸고 목발을 짚으며 퇴원수속을 할 때는 묘한 성취감을 느꼈지만, 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서러움이 밀려왔다. 남편에게 나 혼자 할 수 있으니 데리러만 오라고 한 건 나였고, 스스로 해내서 기뻤지만 진짜 안 와서 서러웠다. 인간의 양가감정이란.. 데리러 오는 것도 늦어서 길가에 목발을 짚고 목에 가방을 멘 채 서있었을 때는 분노가 차올랐다. 그럼에도 내가 뱉은 말이라 남편한테 뭐라고는 못하고 퉁퉁거리기만 했다. 이래서 사람은 잘난 체 하면 안 되는 거라는 걸 깨달은 날이기도 하다.
깁스를 해보신 분은 알겠지만, 씻지 못하는 깁스 속의 피부는 가려움을 느끼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통깁스를 두들겨대며 긁어보기도 하고, 젓가락을 넣어 긁었다가 상처가 생기기도 하다 발견한 아이템은 실리콘 젓가락이다! 상처도 나지 않고, 요리용은 길어서 어디든 긁을 수 있다. 세상에는 참 좋은 아이템이 많다. 뭐든 장비빨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시점이기도 하다. (난 뭘 하든 장비를 먼저 구비한다.)
그 당시 병가휴직이 허락되지 않아, 목발을 짚은 채 출근을 했다. 자차로 30분 거리를 출퇴근하고 있었는데, 오른발을 수술했을 때가 문제였다. 운전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택시를 타고 다닐 수도 없고, 목발을 짚고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면서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침 남편이 아침, 저녁에 시간적 여유가 있어 운전기사를 자처했다. 오른발 깁스한 기간이 12주 이상이었는데, 그 기간을 출, 퇴근시켜준 남편이 있어 너무 감사했다. 아빠를 같이 따라다니며 엄마의 출,퇴근길에 함께 했던 아들은 어느 날 엄마를 도와준다며 목발을 들어주겠다고 나섰다.
"아들아... 목발이 없으면 엄마가 걸을 수 없단다."
"아니야~~ 엄마 도와주고 싶어."
그럼에도 목발을 들어주고 싶다는 아들에게 목발을 맡기고 깽깽이로 걸어가며 아들의 기특한 마음만 기억하기로 했다. '절대 일부러 저러는 건 아닐거야'라는 마음은 뒤로 꼭꼭 숨기며...
출근 후 점심시간에 식당에 가면 직원들이 식판에 밥을 받아서 갖다 주고, 치워줬다. 남에게 폐 끼치는 걸 너무 싫어하는 나에게 그 호의는 감동이면서 부담이었다. 점심식사를 싸갖고 다니기 시작했다. 물만 부으면 되는 누룽지나, 컵 시리얼 등을 갖고 다니며 식사를 해결했다. 화장실 한 번 가는 것도 매우 번거로웠다. 안쪽에 위치한 내 자리에서 화장실을 가려면 직원들 뒤로 나가야 하는데 목발로 의자를 치기도 하고 바퀴에 걸리기도 했다. 언젠가는 1박 2일 직원연수에 빠지는 것을 허락받지 못해, 목발을 짚고 관광버스에 오르락 내리락했다. 직원들은 액티비티 프로그램에 참여중일 때 목에 카메라를 멘 채 자갈밭을 목발로 왔다갔다하며 사진을 찍었다. 자갈밭을 목발보행 하며 내 인생이 자갈밭 같다는 생각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목발을 짚고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다른 곳마저 고장 나는 것 같았고, 행사가 많은 직업이다 보니 일에도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마지막 2번의 수술은 퇴사 후에 이루어졌다.
퇴사 후 수술을 하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겠다고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었던 그때는 엄마의 도움으로 지냈다. 버스로 왕복 2시간 거리를 매일 왔다 갔다 하시며 공부한다는 딸을 위해 밥 차려주고, 커피 마시라고 커피포트에 물 받아주고, 집안일까지 해주셨다. 그런 엄마가 없었다면 아마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런 엄마의 헌신에도 공무원 시험은 떨어졌다. 필기도 아니고, 면접에서 떨어져서 매우 억울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필기시험 성적순으로 면접결과도 정해진다는 거였다. (떨어진 게 부끄러운 사람의 변명이니, 의미를 두고 보지는 마시기를... )
약 30주간의 목발 보행 생활은 나에게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게 해 줬고, 독립심을 더 강하게 만들었으며 그럼에도 나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줬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당연히 도우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 내 아이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약 30주간의 목발보행을 통해 얻은 생각이다. 다만, 그 사람이 필요로 할 때, 내가 돕고 싶은 방법이 아닌 그 사람이 바라는 방식으로 도와야 한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