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가 선물 같은 날들
전 국민에게 사랑받았던 '거침없이 하이킥' 시트콤에 출연했던 배우 정일우가 27세의 젊은 나이에 '뇌동맥류' 진단을 받았다. 정일우 배우는 진단을 받은 후 우울증이 왔으며 한 달 동안 집에서 칩거했고,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버킷리스트를 실현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고 한다.
이 기사를 읽으며 마음이 착잡해졌다. 나는 정일우 배우와 같은 병에 걸렸다.
그런데 나는 병에 걸렸다고 칩거하며 나를 안쓰러워하고 내 마음을 들여다볼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진단을 받은 다음 날 출근을 했고, 우울할 틈도 없이 일을 해야 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가 기사를 읽고 내 현실이 가슴 아팠다.
수영을 시작하고 생긴 두통으로 뇌 MRA를 찍었다.
신경과 전문의는 나에게 "운동성 두통"이라고 진단 내렸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의사가 뱉어내는 다음 말이 이해가 안 됐다.
"그것보다는 다른 문제가 있어요. 검사 결과 뇌동맥류가 있는 것 같아요. 일단, 신경외과로 컨설턴트 할 테니 정밀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겠어요. 최대한 빨리 받으셔야 해요."
"그게.. 위험한 건가요?"
"뇌혈관이 꽈리처럼 부풀어 올라있는 상태예요. 터지면 뇌출혈이 되니 위험하죠."
봄이라 따뜻한 날인데,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내 몸을 휘감았다. 온몸에 느껴지는 한기에 양팔을 감싸 안았다. '다들 안 추운가?, 아.. 여기는 실내인데 왜 바람이 불지? 창문이 열렸나?'
진료실에 마주 앉은 의사와 나는 다른 계절 속에 있었다.
봄바람이 살랑이기 시작하는 3월.
차가운 겨울이 가고 따뜻한 봄이 찾아오는 3월.
내가 태어나 가장 좋아하는 3월의 어느 날 나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2023년 3월 28일(화)
지난주 뇌 MRA 검사결과 뇌동맥류가 발견되었다. 그냥 두면 터져서 뇌출혈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다음 주에 입원해서 뇌혈관 조영술을 받기로 했다.
뭐... 크게 무섭거나 두렵거나, 걱정되지는 않는다.
"꽤 큰일이 생길뻔했다. 미리 발견해서 다행이다" 정도의 마음.
그저 왜 나는 건강하지 못할까에 대한 의구심과 자괴감이 좀 생긴 정도.
왜 다른 사람들은 다 평탄하게 지나가는 것들도 나에게는 꽤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넘어가야 하는 장애물일까...
농담처럼 지인들과 떠들어댔던. 멀쩡한 곳이 내 몸에 있기는 한 걸까?라는 질문이 꽤 무겁게 느껴지는 한 주다.
첫 진단을 받은 날의 일기이다. 놀랐지만 또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또 어딘가가 아프구나. 근데 이번에는 좀 심각한 거긴 하네? 그런데도 뭐 당장 죽는 건 아니라니 그나마 안심이다. 역시 나는 초기에 발견해서 잘 치료받고 큰일 없이 지나갈 거야. 그렇게 그저 병명이 하나 더 생겼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정밀검사를 위해 4/5(목) 입원을 했다.
'뇌혈관조영술'을 받았다. 1박 2일 입원해서 받은 검사는 생각보다 불쾌했다. 사타구니 안쪽으로 카데터를 뇌까지 집어넣어 뇌혈관 사진을 촬영하는 것이다. 남자 간호사가 시술하는 것도 불쾌했고, 차가운 수술실 침대는 더 불쾌했다. 조영제가 들어가며 눈앞에 번쩍번쩍 빛이 난다. 또다시 한겨울의 칼 같은 바람이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제발 그만 찾아오라고 속으로 소리쳐봐도 바람은 나를 더 세게 끌어안을 뿐이었다. 그렇게 바람과 싸우는 사이 조영술이 끝났다. 보호자 없이 왔다고 하니 의사는 스마트폰으로 뇌 사진을 보여주며 크기가 크지 않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며 엄지척까지 선보였다.
그렇게 병실로 돌아와 시술부위에 모래주머니를 얹어놓고 4시간 이상을 누워있었다. 지혈을 하는 것인데, 상체도 일으키면 안 된다. 옆으로 누워서도 안되고, 일어나서도 안되고.. 지옥이 따로 없었다.
검사 후 첫 외래진료일, 의사는 크기가 작고 위험한 위치가 아니니 혈압이 오르지 않게 조심하고, 흡연을 하지 말라고 했다. 별도의 시술은 하지 않아도 되며 추적관찰을 하자고 했다.
혹시 잊어버릴까 봐 적어갔던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제가 지금 다이어트 약을 먹고 있는데 계속 먹어도 되나요?"
"아.. 크게 상관은 없을 것 같아요."
"선생님 그럼 흡연을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술은 먹어도 되나요?"
"........." "술은... 마셔도 됩니다. 그렇지만 많이 마시면 어쨌든 안 좋아요."
"감사합니다!!!!"
가족들과 지인들은 다른 병원에서도 검사받아볼 것을 권했다. 뇌동맥류를 잘 본다는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진료를 다시 봤다. 첫 병원에서 2개라고 했던 뇌동맥류가 3개라고 했고, 크기는 작고 위험한 위치가 아니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궁금한 거 있으세요?"
"아, 네 선생님~ 술은 먹어도 되나요?"
"괜찮아요."
원하는 답을 얻어 기분이 좋았다. 2년 뒤 추적검사를 하기로 하고 1분여 정도의 진료가 끝났다.
진단받은 후, 온라인에서 검색을 하다 카페를 발견했다.
[뇌질환 환자모임] 이라는 이름의 카페다. 많은 회원들이 있었다.
카페에 들어가면 '뇌동맥류'카테고리가 있다. 증상 의심 관련 글, 진단받았다는 글, 코일색전술 시술, 개두술 수술을 받은 후기 글, 가족이 수술 후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걱정의 글, 잘 회복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는 글들이 대다수다. 글들 속에 빠져있다 보면 나보다 심각한 상황에 있는 사람을 보며 '아직 괜찮다'라며 위로받기도 하고, 미래의 내 얘기가 될 것 같은 두려움에 눈물짓기도 한다. 작은 위로라도 되기를 바라며, 댓글을 작성한다.
왜인지도 모른채 온라인 카페에서 계속 헤맨다.
일을 하다가도, 아이 숙제를 봐주다가도, 자려고 누웠다가도 계속 카페에 들어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불안해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게 꿈인 줄 알 것 같아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곧 내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가족들에게는 불안감을 보이지 않으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글자 사이를 헤맨다.
나의 소식을 들은 가족들과 지인들은 걱정에 휩싸였다.
나는 그들을 위로했다.
"난 괜찮아. 위험한 위치도 아니고, 크기도 작데. 걱정하지 마. 별일 아니야~"
"야, 내가 어디 한 두 번 아팠냐? 걱정하지 마~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별일 있겠어~ 나 괜찮아~ "
감기에 걸린 것처럼 별일 아니라고 생긋 웃으며, 농담을 건네며 위로하는 건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나의 마음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어쩌면 난 회피하고 있는 걸 지도 모른다. 그들을 위로하는 척하며 사실은 나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괜찮을 거라고....]
절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야, 혹시 나한테 무슨 일 생기면, 온라인 회원 아이디랑 비번을 적은 수첩이 내 책상에 있거든? 카키색 코카콜라 수첩이야. 그거 찾아서 네가 탈퇴 좀 해줘.]
보험을 관리해 주는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한테 무슨 일 생기면, 우리 남편이 잘 못 챙길 수도 있으니까, 네가 보험금 수령 같은 것 좀 잘 도와줘]
친구들에게서 돌아온 건 걱정 어린 핀잔이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며, 화를 냈다.
걱정이다. 불안감이다. 두려움이다. 그들도, 나도. 우리는 표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나의 생명이 꺼질까 봐 걱정하고, 불안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난 나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나의 죽음을 생각했을 때, 나의 목숨보다 소중한 아들이 떠올랐다.
저 아이가 엄마가 없음을 이해하고, 감당해 낼 수 있을 나이까지는 살고 싶었다.
외로운 삶을 살아온 우리 엄마에게 자식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책을 출간했지만, 나를 온전히 표현하는 글을 써보고 싶었다. (브런치 작가되기 프로젝트에 도전한 이유이다.)
삶에 미련이 없다 생각했지만 많은 것이 미련이고 아쉬움이었다.
진단을 받고, 위험하지 않다는 의사들의 말을 들었지만 여전히 내 머릿속에는 시한폭탄이 들어있다.
여전히 나는 주변을 정리한다.
연락을 하지 않는 휴대폰에 있는 연락처를 지우고, 카톡 친구를 정리한다.
옷과 소지품을 계절마다 정리한다. 그렇게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나의 마지막을 준비한다.
그렇지만 나는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새로운 도전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행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한다.
어떤 때는 실패하기도, 실망하기도 하지만 그러면서 또 나는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나에게 하루하루는 선물이다.
지금 일어난 불행해 보이는 일은 그저 나를 단련시키는 과정일 뿐이다. 나의 사람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실망은 실망대로 인정하고, 다시 앞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갔으면 좋겠다.
그저 나 같은 사람도 있음이 그들에게 작은 위로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이 글을 쓰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다.
공개적으로 나의 질병을 알리는 것이 괜찮은 것인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고백하는 이유는, 이 또한 나이기 때문이다.
'뇌동맥류'라는 진단은 나를 조금 더 성숙하게 만들었고, 나를 더 나아가게 만들었다.
가끔 사람들이 묻는다.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사냐고. 뭘 그렇게 많이 시도하냐고...
그에 대한 답을 이렇게 들려주고 싶다.
'나는 지금이 아니면, 못할 수도 있어서라고... '
저는 행복하게 매일을 살아갑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았던 어제의 저와 이 글을 읽고 난 후 바라보게 될 저는 같은 사람입니다.
함께 슬퍼하고, 기뻐해주는 분들이 계셔서 오래 오래 글쓰며 살아가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