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작사 이치현
안녕하세요?
오늘 <가사실종사건> 주인공은 '이치현과 벗님들'입니다.
아래 노래 들으시면서 글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https://youtu.be/PX-J_j8 p8 Dg? si=BZl9 EbTLUew2 yl0 D
내 마음에도 사랑은 있어
난 밤마다 꿈을 꾸네
오늘 밤에도 초원에 누워
별을 보며 생각하네
- 이치현과 벗님들의 <집시여인> 가사 중 -
이치현과 벗님들은 1979년 데뷔했습니다. 그 시작은 1978년 TBC 해변가요제 본선에 진출해 인기상을 수상하면서죠. 그때는 이용균(이치현)과 이현석으로 이루어진 기타 듀오였습니다. 이 때는 '벗님들'이었죠. 1979년 3인조 밴드를 결성해 데뷔 앨범을 발매했으나 큰 반향은 없었습니다.
데뷔시절에는 포크 스타일이었는데 이후 록과 라틴으로 음악 색깔로 입혀갑니다. 1989년 '당신만이'를 타이틀로 2집을 선보였습니다. 이후 김건모를 비롯한 후배 가수들이 리메이크를 많이 한 곡입니다. 1984년 5인조가 된 후 3집을 발매하고 1985년 4집, 1986년 5집에 이어 1988년 오늘 소개할 곡이 히트를 치며 대중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1991년 그룹이 해체된 후에 이치현은 솔로 가수로 데뷔했습니다. 90년대 중반까지 미사리에서 라이브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2011년에 강인원, 권인하, 민해경과 함께 프로젝트 보컬 음악 그룹 > 컬러스'를 결성하기도 했죠. 2016년 14집까지 발매했습니다.
2023년 MBN 밴드 경영 버라이어티 '불꽃밴드'에 출연한 바 있습니다. 올해 5월까지도 축제에 참여하며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거의 반세기 동안 밴드 음악을 해 온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산증인격 되시겠습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한류도 가능했다고 믿으며.....
자. 본업인 가사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시죠. 제목이 '집시 여인'입니다. 집시는 우리말로 하면 떠돌이, 유랑인, 방랑자입니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삶 + 여인이 모티브가 된 듯한데요. 인생 전반에 걸쳐 사랑을 찾아 떠도는 우리들을 은유한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댄 외롭고 쓸쓸한 여인 끝이 없는 방랑을 하는/ 밤에는 별 따라 낮에는 꽃 따라 먼 길을 떠나가네' 부분입니다. 이 노래는 화자가 한 집시여인을 보며 느낀 바를 가사로 표현했습니다. 어디론가 끊임없이 방랑하는 집시여인의 모습을 보며 외롭고 쓸쓸함을 느낍니다.
'때론 고독에 묻혀 있다네 하염없는 눈물 흘리네/ 밤에는 별 보며 낮에는 꽃보며 사랑을 생각하네' 부분입니다. 고독의 모습도 봅니다.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보고요. 유일한 버팀목은 세상 만물을 보며 따뜻한 사랑을 떠올리는 일입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힘든 방랑의 삶을 버텨내는 것이죠.
이 노래의 하이라이트는 '내 마음에도 사랑은 있어 난 밤마다 꿈을 꾸네/ 오늘 밤에도 초원에 누워 별을 보며 생각하네' 부분입니다. 외적으로는 의지할 곳이 없어 유랑하는 신세이지만 집시여인의 마음 안에 사랑이 있기에 그 힘든 여정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죠. 낮에 볼 수 있는 꽃과 별에 볼 수 있는 별은 그 마음과 동의가 아닐까 싶습니다.
'집시 집시 집시 집시여인 끝이 없는 방랑을 하는/ 밤에는 별 따라 낮에는 꽃 따라 외로운 집시여인' 부분입니다. 어찌 생각해 보면 그녀는 방향도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는 것 같지만 밤에는 별을 따라, 낮에는 꽃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 말인 즉 그녀가 찾는 곳은 사랑이라는 단어가 배어있는 어딘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그 장소가 쉽게 찾아지진 않을 겁니다. 사실 그 장소는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안에 있는 사랑을 발견하기 위해 외적인 장소를 그토록 배회했어야 하는지도 모르죠. 그 순간까지 집시여인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겠죠.
음. 오늘은 '집시'에 대해 썰을 좀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코카서스 인종에 속하는 소수 유랑민족을 집시라고 부른다는 썰이 있긴 합니다만 정설은 아니라는군요. 그래서 찾아봤더니 집시라는 표현의 어원은 이집트인을 의미하는 중세 그리스어 '이프티'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두루 아울러 부르는 보통명사화된 느낌이죠. 집시는 전통적인 가부장적 풍습이 짙고 교육 수준이 낮은 편으로 알려져 있는 반면 춤, 노래, 연극 등 예술적인 면에서는 탁월함을 드러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집시를 연상시키는 집단이 있는데, 사물놀이 패입니다. 여러 마을을 떠돌며 곡예 등을 선보이며 밥벌이를 했죠. 또 떠도는 삶으로는 몽골이라는 나라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그들이 사는 집은 게르, 그리고 넓고 푸른 초원을 앞마당으로 쓰죠. 얼마 전에 지구 온난화로 힘든 삶을 이어가고 있는 영상을 보기도 했습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1000만 명이 넘는 집시족이 있다고 하네요. 그들이 사는 거주촌을 해산하는 작업으로 골머리를 쌓다가 인정해 주는 곳도 있고 그렇답니다. 근데 집시가 안 돌아다니고 거주를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하하하. 어찌 보면 내전 등으로 떠도는 난민도 집시와 유사한 측면이 있어 보이네요.
한 때 디지털 유목민. 인터넷과 디지털 기기를 활용해 공간 제약 없이 원격 근무하며 자유롭게 생활하는 사람을 일컫는 이 말이 입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예전보다 부쩍 많아진 외국인의 수도 그렇고 국제결혼도 그렇고요. 예전엔 태어난 곳에서 쭉 살다가 죽곤 했지만 이젠 마음만 먹으면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살 수 있게 되었죠. 공간적 제약 요건이 이전과 비교해서 훨씬 자유로워진 느낌입니다.
이들은 무정부주의로 알려져 있는 아나키즘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정부는 물론이고 국가, 민족주의, 자본주의 등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체제를 반대하죠.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인생에게는 아나키즘이 딱 어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언젠가 집에 외국인 홈스테이를 할 때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 공부하는 여대생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요. 그때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가 주제가 되었습니다. 저는 2001년 개봉한 박신양, 이미연 주연의 <인디언 서머>를 꼽았는데요. 지금 생각해 보니 사형 선고를 앞둔 극 중 이미연 배우가 바로 이 노래의 제목인 집시 여인을 연상시킵니다.
적극적으로 자기 방어였다고 주장하면 정상참작이 되고도 남을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극 중 반까지 무비권을 행사하며 스스로 골로 가는 선택을 하죠. 그녀에게는 물리적인 집이 있지만 남편과의 나쁜 추억이 배어있는 그 집에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죠. 그리고 정신적인 방황을 택함으로써 물리적 집으로의 귀환을 애써 막습니다. 그런 내막으로 인해 그녀는 갈 곳을 잃고 삶의 의지도 잃어 갑니다. 그러나 국선변호사인 박신양 씨를 만나면서 서서히 그 내막을 벗겨내며 새로운 집을 상상해 가죠.
전국에 집이 차고 남칩니다. 그런데도 45%가 넘는 사람들은 아직 집이 없다고 합니다. 거꾸로 55%의 사람들 중 일부는 한 채 이상의 집을 가지고 있을 텐데요. 그들에게는 집이 집이 아니라 투자 대상이나 종목과도 같겠죠. 똘똘한 한 채를 가지신 분들도 그게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분도 꽤 있을 거고요.
옆길로 좀 샜는데 다시 집시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사실 집시는 눈으로 보이는 공간적 떠돔을 지칭하고 있지만 어는 곳 하나 마음을 둘 곳 없는 정신적 측면의 문제도 있죠. 물론 계속 떠돌다 보면 그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찾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집시에 여인이라는 단어를 붙였을지를 생각해 봅니다. 가장 약해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대상을 언급하고자 세운 전략이 아닐까 싶은데요. 인간이며 모든 개개인이 귀하다는 말처럼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꿈꾸는 사랑이 있다는 말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떠돈다고 가난하다고 약하다고 해서 사랑과 동떨어져 살아야 하거나 사랑할 자격이 없다 말할 순 없을 테니까요. 모두에게 사랑할 평등이 존재합니다.
집시에 비하면 우리는 내 집이든 남집이든 다리 뻗고 누을 집도 있고 어느 정도 하루 세끼는 걱정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 같아 그들에 비해 나아 보일지 모릅니다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런 걸 얻겠다고 자유를 내던지 우리의 삶이 그들보다 낫다도 말하기에도 어딘가 걸리는 지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자는 곳만 바뀌어도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일정 부분 이런 집시 정신도 필요한 것은 아닌지 싶네요.
이런 일화가 있죠. 개를 한참 찾아다녔으나 찾지 못하여 풀이 죽어 오는 사람에게 '너는 개를 잃어버린 것이냐 너를 잃어버린 것이냐'라는 화두를 던지던데요. 눈으로 보이는 집시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집시가 우리에게 혹은 우리 삶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돌아볼 일이네요. 오늘의 브런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PS. 우리의 인생이 여행이라면 우리 모두는 집시일지 모릅니다. 기껏해야 제한된 지구라는 공간을 수도 없이 떠돌다 마침표를 찍죠. 그들 각각에는 말 못 할 고득과 외로움 그리고 쓸쓸함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집도 있고 절도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들도 있죠. 집시가 나 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어디서부터 출발해서 어디까지 도착하셨나요? 하하하. 오늘은 이만^*. See you. Coming s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