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리맨은 이렇게 말했다
회사에 허무주의가 팽배한 시대입니다. AI, 구조조정, N잡러, 사토리, 3포 세대 등등...... 허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가 있지요. 여러분이 모두 잘 아시는 '니체'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허무주의의 아이콘처럼 여겨지는 니체가 21세기 한국에서 회사를 다녔다면 어떤 직원이 되었을까요? 니체는 허무주의를 이해하게 될 날은 자신이 죽고 난 다음 두 세기 동안에 올 거라고 했습니다. 니체가 1900년에 죽었으니까 지금이 니체가 말한 그 시기입니다.
니체는 미친놈 소리를 들으면서 회사에서 쫓겨났을까요? 아니면 ‘망치를 든 철학가’라는 별명답게 ‘기업혁신의 아이콘’이 되었을까요? 아니면 초인이 되겠다고 과감하게 퇴사했을까요? 국내 유통업계 1위 ‘초인 주식회사’에 갓 취직한 신입사원 니체가 회사에 입사해서 어떻게 변신해 가는지 알아보시죠.
철학자 니체는 아래와 같은 끔찍한 말을 했습니다. 읽을 때마다 몸서리가 쳐지는 문장입니다.
최대의 무게-어느 날 낮 혹은 어느 날 밤에 한 악령이 너의 가장 깊은 고독 속으로 살며시 찾아들어 이렇게 말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번 살아아야 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사상과 탄식, 네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네게 다시 찾아올 것이다. 모든 것이 같은 차례와 순서로.
<즐거운 지식>, 341절
회사에서 일하는 샐러리맨으로서 니체가 한 말 중에 가장 와 닿는 말은 ‘영원회귀’였습니다. ‘영원회귀’만큼 샐러리맨의 상태를 잘 보여주는 말이 있을까요? 성악가 조수미가 방송에서 자신의 공연 스케줄이 몇 년 동안 차있어서 몇 년 몇 월 몇 일에 어디에서 무슨 공연을 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저도 몇 년 몇 월 몇 일에 어디에서 무엇을 할지 알 것 같았습니다. 먼저, 오전 8시에 만원 버스에 실려 회사에 출근할 것입니다. 12시에 어디에서 점심을 먹을지 잠시 고민하다가 회사 지하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것이고, 주변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마실 것입니다. 그리고 7시쯤 다시 만원 버스에 실려 퇴근할 것입니다. 저도 압니다. 그것도 조수미보다 더 정확하고 상세하게 압니다.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회사-집의 생활. 월급 생활자로서 해야 하는 반복적인 업무. 니체는 늘 ‘같은 것의 반복’이 바로 삶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나의 현생이 반복적일 뿐 아니라 내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반복적일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현재의 삶이 죽을 때까지 반복되고 다음 생애도 똑같이 반복된다고? 환장할 노릇입니다.
신입사원 니체는 휴학까지 하면서 열심히 취업준비를 해서 회사에 들어왔는데 직장인의 삶이 영원회귀라는 사실을 알고 좌절합니다. 입사 동기들과 선배들의 사는 모습을 봐도 고만고만해 보이고 몇 년 뒤에 자신도 선배들의 삶을 반복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렵게 들어온 회사인 만큼 일단 열심히 일해보자고 다짐하고 죽어라 열심히 일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다짐은 얼마 가지 못하고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에 ‘회사는 영원회귀’라는 말이 갈수록 더 가슴에 박힙니다.
'아... 나는 회사 체질이 아닌가 보다.’
철학자 니체는 신입사원 니체와 달리 이러한 반복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반복이 창조의 전제조건’이라고 말합니다. 삶이 영원히 반복되고 삶에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로 우리가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온전히 삶을 긍정하는 힘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전제 조건은 ‘현재를 사는 것’입니다. (직장인들에게 현재를 살라고 하면 항상 ‘먹고 마시자’로 귀결됩니다. 이것은 아닙니다.)
너의 삶 전체는 마치 모래시계처럼 되풀이하여 다시 거꾸로 세워지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또 끝날 것이다. 네가 생겨나도록 만든 모든 조건이 세계의 순환 속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너의 삶은 그 사이의 위대한 ‘순간의 시간’이 될 것이다.
<유고>
“이 성문 통로를 보라! 난쟁이여!” 나는 말을 이었다. “이 성문 통로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두 개의 길이 여기에서 마주친다. 이 길들을 끝까지 가본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이 긴 길은 성문 안으로 들어간다. 이 길은 영원히 이어진다. 그리고 성문 밖으로 나가는 저 긴 길은 또 다른 영원이다. 두 길은 서로 반대되고 서로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리고 여기 성문 통로에서 마주친다. 저 위에 이 성문 통로의 이름이 <순간>이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두 개의 길 가운데 하나를 따라서 계속 앞으로, 앞으로 가는 사람이 있다면, 난쟁이여, 그대는 이 두 길이 영원히 반대되리라고 믿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영원회귀 속의 순간을 살고 있는 것이고 그 순간의 시간은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순간의 시간이 위대해지는 것은 마치 우리가 수도 없이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면 순간의 시간이 위대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회귀되더라도 다시 이 삶을 살겠다는 생각이 들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현재를 살라는 이야기는 니체뿐 아니라 많은 철학자와 작가들에 의해 수많은 이야기로 변주되어왔습니다. 하지만 이게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현재를 살아야지 하다가도 우리는 금세 아직 가보지 않은 미래의 일로 불안합니다. 우리는 영화 ‘어바웃 타임’ 주인공처럼 벽장 안에 들어가 주먹을 불끈 쥐면 오늘 하루를 반복할 수 있는 재주가 없기 때문에 현재를 사는 데에도 평소에 연습이 필요합니다. 현재를 사는 것이 체화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영원회귀 사상을 몸으로 체현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존재 자체와 실존을 긍정하게 되고, 그 순간 변화하게 됩니다. 삶이 끊임없이 지속되기를 바라지 말고 변화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순간을 즐기는 태도이고 순간을 향유할 수 있는 적극적인 자세입니다. 그토록 비극적으로 바라보았던 세계가 다시 긍정적으로, 새로운 가능성이 풍요로운 세계로 변화할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회귀 사상의 핵심입니다.
신입사원은 니체는 힘들고 지겨운 회사생활이지만 회사에서 순간순간 작은 변화를 만들어가고 재미를 느끼면 회사생활도 할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열심히 일한 덕분에 신입사원 니체는 대리로 승진합니다.
“오늘은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침마다 졸린 눈으로 일어나 버스에서 계속 졸지만 버스에서 내려 힘찬 걸음으로 회사 정문을 들어서는 니체 대리의 모습이 그려지시나요?
긍정적인 마인드로 바뀐 니체 대리는 일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의욕과 달리 자신이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다시 좌절합니다. 니체 대리를 아직 미더워하지 않는 팀장은 본인이 지시한 일만 하라고 합니다. 상사가 지시한 일을 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가버립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묵묵히 지시한 일만 꾸역꾸역 합니다.
낙타
니체 과장은 ‘낙타의 단계’에 있습니다. 철학자 니체는 허무주의를 인식한 사람은 세 가지 변신 단계를 보여준다고 말했습니다. 그 유명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말이죠. 세 가지 변신은 낙타-사자-어린아이입니다. 공경하고 두려운 마음을 지닌 억센 정신, 무거운 짐을 지는 정신, 복종하는 정신, 공경하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고, 무거운 짐을 감내할 수 있으며, 복종하는 것이 낙타입니다.
니체는 낙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참을성 있는 정신은 이런 더없이 무거운 짐들을 모두 짊어진다. 짐을 가득 싣고 사막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는 낙타처럼, 자신의 사막을 향해 걸음을 재촉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샐러리맨들은 낙타의 삶을 살다가 회사 생활을 마감합니다. 낙타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묵묵히 사하라 사막을 건너갑니다. 가끔은 자신의 짐이 아닌데도 자진해서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출발합니다. 상사를 공경하면서 두려워합니다. 승진을 하면 낙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더 위태로워진 자리 때문에 더 철저한 낙타가 됩니다.
낙타가 자신의 운명을 슬퍼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무엇이 가장 무거운 것인가? 내가 그것을 등에 짐으로써 나의 강인함을 확인하고 기뻐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사하라 사막을 완주했을 때 자신의 강인함을 확인하고 기뻐합니다. 우리가 대학에 입학하고 회사에 입사했을 때 느꼈던 감정입니다. 낙타의 정신은 그동안 한국사회의 학교와 기업에서 가르쳐온 자기 착취의 정신입니다. ‘열심히 해라.’, ‘남들을 위해서 희생해라,’, ‘윗사람에게 복종해라,’ 그러면 사막을 건너는 기쁨을 줄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근대를 지배했던 이념입니다. 아직도 교육과 일의 현장에 낙타의 정신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낙타의 단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영원히 낙타의 단계에 머무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이어질 낙타의 질문이 중요합니다.
오늘도 무거운 백팩을 어깨에 메고 출근해서 사막 같은 회사에서 묵묵하고 꾸준하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 니체 대리의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봅니다.
사자
엄청난 야근과 상사의 시달림 속에서 니체 대리는 서서히 질문합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지? 내 일의 의미는 무엇이지?” 낙타는 자신이 지고 있는 짐의 무거움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무거운 짐을 져보고 이런 질문을 해본 자만이 두 번째 단계인 ‘사자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사자는 자유정신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 쓸쓸한 사막에서 두 번째 변화가 일어난다. 거기에서 정신은 사자로 변한다. 정신은 자유를 쟁취하여 자신의 사막을 다스리는 주인이 되려 한다. 거기에서 정신은 자신을 다스린 최후의 주인을 찾아 나선다. 최후의 주인, 최후의 신에게 맞서려 하고, 그 거대한 용과 일전을 벌여 승리를 쟁취하려 한다. 정신이 더 이상 주인으로, 신으로 섬기려 하지 않는 거대한 용은 무엇인가? 거대한 용은 “너는 해야 한다”로 불린다. 그러나 사자의 정신은 “나는 하려 한다”라고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가치의 창조, 그것은 사자도 해낼 수 없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창출, 그것은 사자의 힘으로 할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젊은 세대는 자신의 능력에 비해서 회사가 너무 사소한 일을 시킨다고 불평합니다. 하지만 회사는 더 큰 일을 할 자유를 주지 않습니다. 사자가 되어야 즉 자유정신을 갖고 자유를 쟁취해야 더 가치 있는 일,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자는 젊은 세대가 자유정신을 갖도록 기성 세대가 만들어줘야 하는 환경이기도 합니다.
팀장이 시키는 대로만 일하던 니체 대리는 어느 날 용기를 내어 팀장에게 제안합니다.
“팀장님, 이번 프로젝트는 제 생각대로 일을 진행해보겠습니다.”
니체 대리가 못 미덥지만 그의 적극성이 마음에 들어 팀장은 니체 대리에게 프로젝트 매니저 역할을 맡깁니다. 니체 대리의 업무 결과에 만족한 팀장은 니체 대리에게 더 많은 자율권을 부여합니다. 니체 대리는 자신의 생각을 더 많이, 더 자유롭게 팀원에게 공유하고 발표합니다. 니체 대리는 낙타에서 사자가 된 것입니다. 사자의 단계에 도달한 니체 대리는 과장으로 승진합니다.
어린아이
나를 규정하는 수많은 언어 중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은 ‘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 무엇’이라는 말입니다. 공감 가는 말이지 않나요?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습니다.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단일한 언어로 쉽게 정의하기 힘듭니다. 인생은 나의 일부가 없어지고 뭔가 새로운 것이 생성되는 과정입니다. 니체는 이것을 ‘생성의 무죄’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변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네가 여기에 태어난 것은 무죄다. 네가 지금 생성되어가는 것은 무죄다. 네가 어떤 존재가 될지도 무죄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변화를 두려워합니다. 내가 그동안 공부한 것, 성취한 것을 자꾸 돌아봅니다. ‘이건 내가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합니다. 자연스러운 변화의 과정을 부정합니다. 제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에도 비슷한 고민을 했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어린아이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나의 형제들이여, 말하라, 사자도 할 수 없는 무엇을 어린아이가 할 수 있겠는가? 강탈을 일삼는 사자가 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하는가?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이고 망각이며, 새로운 출발, 유희, 저절로 굴러가는 바퀴, 최초의 움직임, 성스러운 긍정이다. 그렇다, 나의 형제들이여, 창조의 유희를 위해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자기 자신의 의지를 욕구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고 변화하기 위해서는 놀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세계를 유희로서 받아들이고, 낙타처럼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죠. 여수의 김정운 작가가 주장하는 ‘놀아야 성공한다’라는 인식과도 일치합니다.
초등학생인 저의 아들은 날마다 블록놀이를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 녀석이 만든 블록이 비슷한 모양이지만 이 아이의 세계에서는 날마다 다른 것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만의 창조물을 저에게 으스대며 자랑합니다. 제 딸아이는 소설을 씁니다. 한 번은 무슨 소설을 쓰는지 몰래 봤습니다.(이러면 안 되지만 너무 궁금했습니다)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식물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녀는 식물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자기만의 세상의 규칙을 정한 것입니다. 식물에게는 청각기관이 없어서 사람의 말뿐 아니라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다는 과학적 상식은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엄청난 자아도취이고 자기 긍정입니다.
어른이 어린아이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망각을 하지 못해서입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과거 경험에 의해서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창의성이 발휘될 수 없습니다. 아이들처럼 잊어버려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성공한 방식대로만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 나은 성장을 하기 위해서 망각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래야 ‘라떼는 말이야’를 안 하고 꼰대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생성의 무죄는 우리의 삶을 놀이하는 어린아이로 만듭니다. 놀이하는 아이는 삶의 예술가로서의 니체에게 철학적이고 실존적인 이상이었습니다. 니체는 삶을 예술적으로 정당화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모든 사람은 예술가입니다. 우리는 삶의 예술가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현재를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생의 작은 순간에 예술성을 발견하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니체의 또 다른 사상인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와 연결됩니다. 회사 업무도 예술이 될 수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맥 컴퓨터의 부품에 개발자들이 사인을 하게 했다고 합니다. 직원들이 예술행위를 했다는 인식을 심어준 것이죠. 우리도 여러 사람이 작성한 보고서에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사람들이 사인하는 세리모니를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샐러리맨도 생활 속 작은 실천 속에서 예술을 할 수 있고 현재를 살 수 있고 따라서 영원회귀를 긍정할 수 있습니다. 니체는 이렇게 허무주의로부터 출발하여 허무주의에 적합한 삶의 양식을 찾는 과정이 우리를 변신시킬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니체가 이야기하는 이 과정은 동시에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업계 1위의 유통회사 ‘초인 주식회사’는 최근 모바일을 활용하여 유통구조를 혁신한 모바일 커머스 업체들의 거센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생성의 무죄’를 인식하고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니체 과장은 과거의 성공을 잊어야 한다고 팀장에게 강력하게 말합니다. 니체 과장 팀의 의견이 경영진에 반영되어 회사에서는 모바일 유통팀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니체 과장은 차장으로 승진하고 파격적으로 팀장으로 임명됩니다.
니체는 개인의 실존뿐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에 대해서도 놀라운 식견을 남겼습니다.
내 말을 들어라, 더없이 지혜로운 자들이여! 내가 생명 자체의 심장부 속으로 그리고 그 심장의 뿌리에까지 기어들어 진지하게 눈여겨보라!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권력에의 의지도 함께 발견했다. 심지어 누군가를 모시고 있는 자의 의지에서조차 나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발견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권력이라는 표현 때문에 다분히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니체는 욕망, 충동, 생존, 삶에의 의지 등을 포괄하는 의미로 권력에의 의지를 사용했습니다. 회사는 정말 ‘권력에의 의지’를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는 삶의 현장입니다. 임원들 간의 권력투쟁, 부서 간의 사일로(Silo) 문화, 직원들의 인정투쟁, 경쟁사와의 진흙탕 싸움, 끊임없는 노조와의 갈등, 배당금을 두고 벌어지는 주주와의 싸움. 하지만 니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싸움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권력이 발현되는 방식이 나쁘면 나쁜 것이지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의 작동원리를 인정하자는 것이지요. 상사와 부하직원의 갈등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은 원한 자체가 창조적이 되고 가치를 낳게 될 때 시작된다. 이 원한은 실제적인 반응, 행위에 의한 반응을 포기하고, 오로지 상상의 복수를 통해서만 스스로 해가 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원한이다. 고귀한 모든 도덕이 자기 자신의 의기양양하게 긍정하는 것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면, 노예 도덕은 처음부터 ‘밖에 있는 것’, ‘다른 것, ‘자기가 아닌 것’을 부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정이야말로 노예 도덕의 창조적인 행위인 것이다.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노예가 반동은 하지 않으면서 정신적으로 반란을 꾀할 때 생기는 감정을 니체는 ‘원한 감정’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요즘 원한 감정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이 ‘블라인드’앱입니다. 회사와 상사에 대해서 반동은 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반란을 꾀하는 곳이죠. 니체는 이러한 정신적 반란이 ‘도덕의 창조적인 행위’라고 말합니다.
억압당한 자, 유린당한 자, 능욕당한 자가 무력감이라는 복수심에 불타는 간계에서 ‘우리는 악한 인간과 다른 존재가 되도록 하자, 즉 선한 존재가 되게 하자! 그리고 선한 인간이란 능욕하지 않는 자, 그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는 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는 자, 복수를 신에게 맡기는 자, 우리처럼 자신을 숨긴 채 사는 자, 모든 악을 피하고 대체로 인생에서 요구하는 것이 적은 자, 즉 우리처럼 인내하는 자, 겸손한 자, 공정한 자다’라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강제할 방법도 없지만) ‘블라인드’에 글 올리지 말라고 강제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가치를 만들어내는지 찬찬히 들여봐야 할 것입니다. 무력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약한 처지와 무능력으로부터 나오는 가치를 거꾸로 우월한 가치로 포장하고 위장함으로써 살아남고자 하는 계약을 ‘무능의 간계’라고 말합니다. 무능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습니다만, 팀원들은 회사에서 비록 힘이 없지만 계략이 뛰어나서 회사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한다는 것이지요.
팀장이 된 후, 니체 팀장은 회사의 모든 구성원이 추구하는 것이 ‘권력에의 의지’라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철학자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를 잘 이해하고 있는 니체 팀장은 자신이 잘되기 위해서는 부하직원의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권력이 변한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니체 팀장은 그들의 ‘원한 감정’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입니다. 팀원들의 ‘무능의 간계’도 인정합니다. 권력관계는 영원하지 않고 주종관계가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팀원들에게 동등한 관계로 대합니다. 어린아이의 창조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깨달았기 때문에 꼰대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팀원들 간의 관계는 더없이 좋아졌고 팀의 성과는 나날이 향상되었습니다.
철학자 니체의 정신으로 무장한 니체 팀장의 그 후 삶에 대해서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는 특유의 창의성을 바탕으로 임원으로 승진해서 승승장구했을 수도 있고, 회사의 관료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퇴사해서 벤처 창업을 했을 수도 있고, 팀장으로 직장 생활을 마감했을 수도 있습니다. 철학자 니체가 말했듯이 삶은 ‘우연성의 연속’이니까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영원회귀 속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았을 것이고, 변화하는 자신을 긍정했을 것이고, 삶을 예술로 만들려고 노력을 했을 것이고, 헛된 꿈을 꾸지 않고 운명을 사랑했을 것이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극복하고 ‘초인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철학자 니체는 말했습니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고......
여러분은 남이 아닌 자신을 극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