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우 Apr 18. 2021

재무쟁이

콩을 세는 남자

재무쟁이


평생 재무업무를 하면서 살았습니다. 학부 때 경제학을 공부했고 회사 생활을 시작한 이후 줄곧 재무 관련 일을 해왔으니 경제학과 재무는 저의 밥줄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20년 이상 재무 업무를 하면서 숫자 밥을 먹고살았는데 부끄럽게도 재무라는 것이 무엇인지, 밥벌이 수단 이외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더 넓게는 회사와 세상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 한 번도 깊게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저의 현재 직업인 재무쟁이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소년의 꿈


시작은 참 단순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짝이었던 친구가 수업시간에 몰래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만화책이나 무협지를 제외하고 ‘진짜’ 책을 수업시간에 몰래 읽는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저는 제 짝이 읽고 있던 책에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옆 눈으로 몰래 보니 어떤 기업인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쉬는 시간에 친구 녀석이 화장실에 간 사이에 교과서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책의 제목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책의 제목은 사춘기 소년의 꿈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친구가 책을 다 읽고 나서 제가 읽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가슴이 뛰었습니다. 선생님은 교탁 앞에서 열심히 수업을 하고 계셨지만 한 단어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좁은 한국에서 지역 간 편을 가르며 싸우지 말고 세계의 젊은이들과 경쟁하고 세계를 경영하라는 김우중의 말은 훗날 그의 경영성과가 어떠했는가에 상관없이 저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습니다.

학교가 끝나고 친구 녀석은 책을 가방에 집어넣고 집에 가버렸고 책의 흥분을 감출 수 없었던 저는 바로 시내에서 가장 큰 서점으로 달려가 그 책을 보물단지처럼 사들고 집에 와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날 꿈은 정해졌고 재무와의 질긴 인연은 시작되었습니다. 

‘김우중 같은 사업가가 되기 위해서는 무슨 공부를 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답은 너무 심플하게 나와있었습니다. 사회 시간에 배운 수요 공급 곡선이 경제학에 대한 지식의 전부였지만, 김우중처럼 되고 싶다는 이유로 그날 이후 저의 꿈은 경제학도가 되었습니다. 김우중이 경제학을 공부했기 때문입니다. 사춘기 소년의 꿈이라는 것이 이렇게 단순합니다. 

그날이 하루키로 치면 야쿠르트 야구장에서 타자가 2루타를 치는 것을 보고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한 순간이었겠지요. 아직도 그날이 선명하게 기억나고 그때 샀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사춘기 소년의 꿈의 증거로 제 서가에 꽂혀있습니다. 누구나 인생의 큰 방향을 정하는 ‘하루’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그 책과 부푼 가슴을 안고 서점에서 집으로 뛰어갔던 그날이 그 ‘하루’였습니다. 


숫자로 보는 세상


그날 이후 학교에서 배운 경제학과 재무를 통해서 알게 된 지식과 회사에서 일하면서 겪은 경험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세계관이 형성이 된 것이지요. 경제 뉴스로 세상을 이해하려 했고 회사에서도 숫자에 기반한 경영을 꿈꾸었습니다. 이 책은 숫자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살아온 시간에 대한 개인적 회고와 반성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일에 인문학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고민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일과 인생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으니까요.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재무와 숫자의 한계도 인식하고 있지만, 재무 무용론을 펼치는 사람을 보면 제 인생을 부정당하는 것 같아서 저항합니다. 

재무와 금융에 대한 시선은 엇갈립니다. 인간사에서 제일 중요한 돈문제를 다루는 중요한 일로 보는 시선과 동시에 탐욕과 욕심을 대표하는 분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회사에서도 재무 부서를 회사의 살림을 책임지는 중요한 부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쓸데없이 간섭하고 조그마한 일에 신경을 쓰는 콩을 세는 사람(Bean Counter)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시선을 통해서 재무의 본질에 대한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저의 숫자와 재무 중심적 세계관은 당시 시대적 환경과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적 환경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구조주의 철학자들의 말대로 그것은 온전한 저만의 선택은 아니었던 것이죠. 환경의 영향을 받은 세계관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리고 세상이 변함에 따라 한 사람의 꿈과 세계관이 어떻게 변하고 변해야 하는지도 이 책의 주된 관심사입니다.


독자


경제학이나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거나 전공하고자 하는 학생 혹은 회사에서 재무 업무를 하고 있거나 재무 업무를 꿈꾸는 분이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재무 업무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제가 금융권에 있기도 했지만 대부분 회사에서 재무 업무를 했기 때문에 회사에서 재무 업무를 한다는 것에 궁금하신 분들이 더 재미있게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딱히 경제나 재무와 상관이 없는 분이더라도 어떻게 사람의 꿈과 현실이 달라지고, 달라진 현실에 적응하면서 살아가고, 내가 하는 일에 인문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는 직장인들이 읽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에 경제학이나 경영학 교과서에 나와있는 내용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재무에 관한 책이 아니라 재무를 공부했고 재무 업무를 하고 있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재테크에 대한 내용도 없습니다. 경제학을 공부하고 재무업무를 하면서 얻은 것은 무엇이고 생각과 달리 얻지 못한 것은 무엇인지 돌아보고, 재미있기도 했지만 지루하기도 했던 재무를 개인적 인문적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재무의 미래


마지막으로 재무업무의 미래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요즘같이 디지털 경제가 대세가 되어 있는 세상에서 재무를 바라보는 눈은 제가 뛰는 가슴을 안고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읽었을 때와 사뭇 다른 것 같습니다. '수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재무는 공부하고 직업으로 삼을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 질문은 현재의 저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고 회사의 경영자들, 혹은 재무를 공부하려는 이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제부터 숫자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이해하고 재무라는 일을 통해 돈을 벌려고 했던 저의 승리와 패배, 긍지와 회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