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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우 May 02. 2021

회사에서 숫자 놀음합니다

콩을 세는 남자


재무쟁이


먼저, 재무 업무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제가 어떤 업무를 해왔는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첫 직장에서 첫 업무는 IR(Investor Relations)이었습니다. 국내외 투자가들에게 회사를 소개하고 투자 세일즈를 하는 일입니다. 날마다 회사의 주가에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회사는 연 매출 80억 규모의 작은 벤처기업이었고, 코스닥에 상장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IR 조직이 없었습니다. 제가 입사하고 나서 비로소 IR 조직이 생긴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규모는 작았지만 코스닥에서 주목받는 기업이었기 때문에 IR 업무는 재미있었습니다. IMF 직후라서 대기업들의 주가는 하염없이 떨어지고, 벤처기업들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던 시기였습니다. 회사의 시가총액이 삼성전자를 앞지르고 국내 1위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저를 만나기 위해서 수많은 증권사 애널리스트와 투자가들이 몰려왔습니다. 잘 나가는 회사의 IR 업무를 한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었지만 그만큼 부담감도 많았습니다. 홍콩 하얏트 호텔에서 처음으로 100여 명의 외국인 투자가들을 대상으로 부들부들 떨며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했던 날은 지금도 가끔 제 꿈에 등장합니다.

인원이 항상 부족한 벤처 기업의 직원들은 기본적으로 멀티태스킹(Multitasking)을 해야 합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IR 업무를 하면서도 자금조달이나 인수합병(M&A) 업무를 간간이 해야 했습니다. 자회사인 국내 최초 온라인 여행사의 외자유치를 했고, 최초의 온라인 보험사 합작법인(JV)을 설립하고, 미국 온라인 기업을 인수하는 업무도 했습니다. 지금의 피가 되고 살이 된 소중한 경험들이었습니다.

 직장에서  번째 업무는 경영기획과 예산업무였습니다. 회사의 전략과 예산을 짜는 업무는 보람도 있고 사내에서 소위  있는 업무지만 그만큼 일은 고달팠습니다. 회사 동료와 싸워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친한 사이가 됐지만  사업 부서 직원과 이메일 백여 통을 주고받으면서 예산 문제로 싸웠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두 번째 직장은 미국 회사였습니다. 인수 후 관리(PMI)를 위해 미국 자회사에 파견된 된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외국에서 일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설레는 마음으로 미국 땅을 처음 밟았지만 처음 시작하는 미국 생활에 적응할 시간도 없이 이번에는 미국 현지 직원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제가 미국에서 근무할 때는 BTS가 없었습니다.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삼성이 일본 회사인 줄 알고 있었던 미국 현지인들은 인수자가 충분한 자금 지원을 해주지 않고 갑질만 한다고 불평이었습니다. 순수 국내 토종으로 미국에서 공부도 해본 적이 없는 제가 경영전략, 예산, 인사 등 민감한 문제를 주제로 미국 직원들과 영어로 회의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미국에 한국 온라인 서비스를 성공시키겠다는 야심으로 낮에는 미국인과 밤에는 본사 한국인과 불철주야 일하던 저는 억울하게도 한국 인수자가 보낸 스파이라는 누명까지 쓰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아침마다 밥과 김치와 국을 먹어야 하는 토종 식성 때문에 혹시 사무실에서 한국인의 향기를 뿜어낼까 봐 아침 식사 후 양치질을 하고 향수를 뿌리고 출근을 했습니다. 그때 쓰던 향수가 아르마니 블랙이었는데 지금도 어딘 가에서 아르마니 블랙 향수 냄새를 맡으면 국적 불명의 이방인과 억울한 스파이로 일했던 미국 생활이 떠오릅니다. 그래도 회사를 떠날 때 30대 중반이었던 저를 20대로 알고 있던 미국 직원들이 ‘지금 생각해 보니 너는 괜찮은 아이(kid)였던 것 같아.’라고 말해주면서 억울한 스파이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세 번째 회사는 벤처 투자회사였습니다. 벤처 투자와 함께 벤처회사의 인수합병 업무도 병행하였습니다. 참신한 아이디어를 접하고 패기 넘치는 창업자들을 만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즐거운 일입니다. 음악으로 치면 인디 음악을 하루 종일 듣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반면, 돈에 대한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무서운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벤처가 혁신과 창의의 수단만이 아니고 일확천금을 누리는 누군가에게는 그저 돈벌이의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첫 번째 직장에서 느꼈던 벤처에 대한 낭만적 환상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돈에 눈이 어두워진 사람들이 해서는 안 되는 투자를 하는 것도 많이 목격했고, 투자와 인수합병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책임이 부여되는 행위인지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런 인간들을 상대하려면 저도 그들의 세계에 한쪽 발을 담가야 했습니다. 몸에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가시지 않았습니다. 가장 즐거운 일을 하면서도 저의 인생에서 가장 탐욕스럽고, 가장 본능적이고, 가장 일차적인 시간을 보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가장 후회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금융권에서 다시 IT업계로 돌아와 현재까지 일하고 있는 네 번째 회사에서 저는 예산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대기업이라 엄격한 시스템 하에서 조 단위의 예산을 운용해야 합니다. 연례행사로 치르는 사업 계획 수립, 월마다 열리는 재무성과 분석, 개별 프로젝트 사업성 분석 및 예산 집행 등이 지금 하는 일입니다.

모두에게 딱딱하고 민감한 예산을 다루다 보니, 인간관계도 어느 때보다 중요하고 정치적 센스도 필요합니다. 세 번째 회사에서 만났던 험악한 분들에 비할 바 아니지만, 인간관계가 여전히 제일 어렵고 힘들지만 중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회사를 옮겼지만 여전히 일하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회사가 다양한 신사업을 시도하고 있어서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사업들을 공부할 기회가 있습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새로운 사업들이 계속 나오고, 기업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합니다. 많은 성공 사업과 더 많은 실패 사업을 보았습니다. 의사가 많은 환자들을 진료해야 실력이 늘듯이, 재무쟁이들은 많은 사업을 봐야 실력이 는다는 것이 저의 지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회사는 비록 제가 돈은 덜 벌더라도 많은 환자들을 진료할 수 있게 해주는 종합병원 같은 직장입니다.


재무 업무의 종류


지금까지 제가 한 일을 중심으로 재무 업무를 간단하게 말씀드렸지만, 실제로 재무 업무의 종류는 생각보다 훨씬 많고 다양합니다. 재무를 공부하고 재무 업무를 하기로 결심했더라도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재무업무는 인더스트리(일반 회사)에서 일하는 것과 금융권에서 일하는 것으로 대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더스트리에서 일하는 것보다 금융권에서 일하는 것이 보수는 좋지만 일을 많이 합니다. 요즘에 벤처들의 인기가 좋아서 금융권에 있다가 벤처 회사로 가는 사람이 많아지기는 했지만 좋은 보수 때문에 금융권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다른 직종도 마찬가지지만 인기 많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믿음으로 금융권을 선택했다가 자신과 맞지 않아서 고민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금융권에서 재무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에서 일할 계획을 갖고 계신 분은 재무 업무도 위로 올라갈수록 결국에는 영업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아야 합니다.

제가 인수합병 관련 콘텐츠 중 제일 좋아하는 영화, <패밀리 맨>에서 '니콜라스 케이지'는 잘 나가는 인수합병 전문가로 나옵니다. 어느 크리스마스이브 날, 강도를 만난 편의점 주인을 도와주다가 운명의 장난으로 하루아침에 타이어 세일즈맨이 됩니다. 한심해진 자신을 위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인수합병도 세일즈지!”

맞습니다. 인수합병도 세일즈입니다. 금융권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모두 파는 상품과 서비스의 종류만 다를 뿐 모두 세일즈를 합니다. 회사를 사고파는 거래를 중개하는 것도, 회계법인의 회계 서비스도, 증권사 애널리스트의 리포트도, 첨단 금융기법을 활용한 파생금융상품도, 벤처캐피털의 투자금 유치도 모두 세일즈입니다. 모든 세일즈는 영혼을 팔아야 하는 일입니다. 멋있는 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수많은 술자리와 골프 접대 자리에 웃는 얼굴로 들어갈 자세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영혼을 팔 준비가 부족해서 인더스트리로 돌아왔습니다.

인더스트리 재무 업무의 종류도 굉장히 다양합니다. 대충만 나누어도 회계, 세무, IR, 자금, 예산으로 구분됩니다.

어느 회사나 회계팀은 대표적으로 야근이 많은 것 같습니다. 결산일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다. 회계 원칙과 회계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가 중요하고 주로 한국이나 미국의 회계사 자격증을 갖고 계신 분들이 업무를 하지만, 자격증 없이 오랜 기간 경험을 통해서 업무를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원리 원칙을 좋아하고 뭔가 맞아떨어지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어울리는 직종입니다. 회계 감사인과 커뮤니케이션 능력도 중요한 일입니다. MZ 세대의 등장과 함께 인력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최근 회계법인들이 인력난을 해결하기 위해 수차례 연봉 인상을 했으나 여전히 인력 유출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분야의 재무 업무를 하던 가장 근본은 회계입니다. 회계는 ‘경영의 언어’이자 ‘재무의 언어’입니다. 회계 원칙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어서 공부하기도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모든 재무쟁이가 회계사가 될 필요는 없지만 기본적인 회계적 소양은 갖추어야 합니다.

세무 업무는 절세가 가장 큰 목표입니다. 회사의 세무 리스크를 점검해 주고 헷지 하는 역할을 합니다. 보통 5년 주기로 세무조사에 대응해야 하고, 가끔 세무 관련해서 국세청과 소송을 벌이기도 합니다. 기본적으로 세무당국과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업무입니다. 개인적으로 재무 업무 중에서 개인의 실생활에 가장 도움을 많이 주는 분야가 세무라고 생각합니다. 세무 지식을 쌓으면 연말 소득 공제 등 개인 소득세 절감을 통해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해당 사항이 없지만 개인 자산이 많으신 분일수록 세무지식으로 얻을 수 있는 혜택은 클 것입니다.

자금 업무는 회사가 사용할 현금을 조달하고 운영하고 집행하는 일입니다. 어떻게 싼 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할 것인가가 자금 부서의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금리, 주가, 환율 등 금융시장 동향과 거시경제 환경을 예의 주시해야 합니다. 주식을 통해서 자금을 조달하는 기업의 경우 IR과 밀접하게 일을 하면서 애널리스트 펀드매니저 등과 커뮤니케이션하고, 채권 발행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기업의 경우 신용평가기관과 커뮤니케이션을 합니다. 한국경제의 특성상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의 움직임 등 글로벌 거시 움직임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시 경제 분석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재미있게 일할 수 있는 분야입니다.

IR 업무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중요합니다. 회사의 사업 실적과 계획을 애널리스트와 펀드매니저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기적인 공시와 실적 발표뿐 아니라 비정기적인 미팅을 통해서도 시장과 커뮤니케이션을 합니다. 외국시장에 상장되어 있거나 외국인 투자가 비율이 높은 회사의 경우, 외국어 능력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해외 출장을 자주 갈 수 있다는 것과 주식 시장 정보를 많이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사람과 만나고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을 좋아하는 분들에게 적합한 직종입니다.

예산 업무는 회사의 살림을 챙기는 일을 합니다. 연도별 사업전략에 따른 예산을 수립하고 계획대로 집행되고 성과가 나오고 있는지 체크합니다. 예산이라는 것이 항상 초과 수요가 있게 마련이어서 사업 부서와 추가 예산이 소요되는 사업에 대해서 커뮤니케이션하고 조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전사 경영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 적합한 직종입니다. 회사에 따라서 재무 부서에서 예산 업무와 함께 인수합병이나 경영전략 수립 업무를 병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회사 내에서 수행하는 재무 업무는 굉장히 다양합니다. 각각의 업무가 같은 듯 다른 듯 미세하게 차이가 있어서 재무를 직업으로 선택할 때 자신의 성격과 업무의 특성을 잘 고려해서 결정해야 합니다. 저의 개인적 지론은 진정한 재무쟁이가 되려면, 최대한 많은 분야를 두루 경험하는 것이 좋다는 입장입니다. 각 분야에서 쌓을 수 있는 전문성이 조금씩 다르지만 업무 간 시너지를 통해서 종합적인 재무적 사고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금융권과 인더스트리의 재무업무에 대해서 간략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금융권보다 인더스트리에서 재무업무를 한 시간이 더 많기 때문에 이 책에서 후자를 중심으로 이야기할 것이라는 점을 참고해서 읽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콩을 세는 남자


회사에서 상사가 저를 평가하는 하향 평가뿐 아니라 부하직원이나 동료가 저를 평가하는 상향 평가라는 것을 합니다. 상향 평가는 익명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하향 평가보다 더 적나라한 내용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상태에서 저에 대한 수많은 좋은 평가와 나쁜 평가를 만나게 됩니다. 상향 평가 가운데 수많은 부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저를 재무 전문가 혹은 재무통으로 인정해 주는 평가가 있으면 저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회계분식, 서브프라임 모기지, 비자금 등 재무 하면 떠올려지는 부정적 이미지가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이 책의 제목처럼 콩을 세는 사람(Bean Counter)이라며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역사적으로도 재무쟁이는 위정자에게 계륵 같은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이야기했듯이 삶은 자신이 부여한 의미 이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재무쟁이로서의 제 삶은 제가 재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서 저에 의해서 규정되고 평가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재무쟁이었고 그렇고 앞으로 회사 생활을 하는 동안 재무쟁이일 것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인간입니다. 팍팍하고 건조하고 메마른 업무를 하는 동안에도 저는 재무를 통한 제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찾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런 노력을 통해 저는 더 나은 재무쟁이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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