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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우 Sep 04. 2021

머니볼의 꿈

콩을 세는 남자

이게 다 야구 때문인가?


1982년, 그 해는 대한민국에서 프로야구가 처음으로 출범한 해였습니다. 아버지를 따라서 처음으로 야구장이란 곳을 갔습니다. 그 시절 야구장은 지금의 야구장 모습과 사뭇 달랐습니다. 잔디가 매끄럽게 깔려있고, 사람들이 봉막대로 응원하고, 세련된 유니폼 입은 미끈한 몸매의 선수들이 플레이하는 구장이 아니었습니다. 운동장은 잔디 없이 맨흙으로 뒤덮여 있었고, 관중들은 봉막대가 아닌 고성과 욕설로 응원을 했고, 선수들은 패션 파괴자스러운 촌스러운 유니폼을 입고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네 친구들과 제대로 된 야구장비 하나 없이 야구를 하던 어린 저에게 선수들이 입고 있는 유니폼, 글러브, 배트가 모두 멋져 보였고 선수들이 캐치볼을 하거나 연습 배팅하는 몸짓 하나하나는 경이 그 자체였습니다. 

그날 경기는 해태 타이거즈와 두산 베어스의 전신인 OB 베어스의 야간경기였습니다. 당시 OB 베어스는 박철순이라는 투수를 앞세워 1등을 내달리고 있는 강팀이었습니다. 상대팀이었지만 박철순은 야구를 꿈꾸는 어린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그 당시 저에게 영웅이었던 김일권 선수를 더 좋아했습니다.

7회였습니다. OB 베어스 선수가 친 볼이 외야에서 관람하고 있던 저에게 똑바로 날아왔습니다. 사람들이 공을 잡으러 제 주위로 달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야구공을 향해서 손을 뻗었지만 키 작은 초등학생이 그 공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제가 잡을 수 있었던 공은 안타깝게도 다른 아저씨의 손에 들어갔고, OB 베어스가 그 홈런으로 경기를 앞서 나가기 시작했지만, 새까만 밤하늘에 야구장의 하얀 라이트의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을 내면서 저에게 날아오던 공의 아름다운 모습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야구에 대한 저의 첫 기억은 그날 저에게 날아오던 하얀 공의 이미지입니다.

영화 <나를 미치게 하는 남자>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팬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이 펜웨이 파크에 처음 가서 보스턴 레드삭스의 팬이 된 날 자신이 한심한 인간(pathetic creature)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야구 폐인이 된 자신을 자랑스럽게 한탄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저도 그날 야구경기장에 간 날 이후, 야구 없이는 살 수 없는 한심한 인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린이 회원에 가입했고 주말이면 아버지를 졸라 야구장에 갔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아버지 몰래 학교 야구부에 가입해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의 반대로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야구복이 든 가방을 책가방 위에 올려 매고 학교에 가는 길은 즐겁기만 했습니다. 친구들은 야구 유니폼을 입은 저를 부러운 모습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소풍 때 빨간색 상의와 검은색 하의의 해태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서있는 저의 모습은 추억의 사진 속에 남아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가지 못하지만 아이들과 야구장에 가는 것이 저에게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야구에 대한 사랑은 아이들에게 이어져서 아들 녀석이 리틀야구팀에서 연습하고 주말반 리틀야구 대회도 나갔습니다. 첫 안타가 아니고 첫 볼넷을 얻어 1루로 출루하면서 기뻐하던 아들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얼마나 재미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초등학교 때 야구 유니폼을 입고 있던 저를 떠올렸습니다. 이 녀석이 컸을 때 아빠랑 같이 했던 야구가 아름다운 추억이 되겠지라고 생각하면 새벽같이 일어나서 같이 야구장에 가는 일이 힘들지 않았습니다. 야구를 통해서 저는 추억을 되새겼고, 아들은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야구와 재무


야구에 관한 수많은 책 중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은 시인이자 문학동네 편집자 ‘서효인’ 작가님이 쓰신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입니다. 야구와 삶을 연결시킨 이 아름다운 에세이에서 서효인 작가 역시 <나를 미치게 하는 남자>의 남자 주인공 '벤(지미 팰런)'처럼 야구팬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을 자랑스럽게 한탄하면서 이 모든 게 야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책을 읽고 불현듯 제가 ‘재무를 선택한 것이 야구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련 통계를 보지는 못했지만 재무쟁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는 아마 야구일 것입니다. 야구야 말로 숫자를 통해서 즐길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스포츠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재무 업무를 선택하게 된 것과 야구를 좋아하는 것은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야구를 이해하려면 수많은 통계 데이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서효인은 여자 친구에게 야구를 알려주는 방법을 이야기하면서 ‘대기업의 흑막을 폭로하는 회계사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숫자의 비밀을 알려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전광판의 숫자를 지배하는 자가 야구장을 지배합니다. 야구와 통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데이터를 알고 경기를 보면 야구 경기는 더욱 재미있어집니다. 현대 야구도 데이터 야구를 선호해서 메이저 리그에서는 선수 출신이 아닌 데이터 전문가가 감독이 되기도 합니다. 야구 통계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빌 제임스’가 만든 세이버메트릭스(sabermetrics)라는 용어는 이제 낯설지 않습니다. 영화 <나를 미치게 하는 남자>의 여주인공 '린제이(드루 베리모어)'도 숫자 분석가입니다. 야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다가 보스턴 레드삭스 광팬인 남자 주인공 벤을 만나고 보스턴 레드 삭스 팬이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이 영화의 작가는 야구와 숫자의 관계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시나리오를 쓴 것 같습니다. 린제이는 남자 친구 벤이 아니었더라도 저와 마찬가지로 야구를 좋아할 운명이었습니다. 


머니볼과 마이클 루이스


작가를 좋아하는 재무쟁이가 있다면 아마도 최애 작가는 ’마이클 루이스’ 일 것입니다. 그는 따분하고 고루한 재무에 관한 이야기를 재미있고 훌륭한 서사로 다양한 책들을 써냈습니다. ‘재무와 금융을 스토리화’하는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작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라이어스 포커>, <플래시 보이>, <빅 숏>은 주로 투자은행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 책입니다. 그는 투자은행업계를 어둡게 묘사합니다. 그들은 위선적이고 돈만을 추구하며 우리 사회 전체에 커다란 위험을 안겨주고 책임은 지지 않습니다. 동종업계에서 일했던 그는 투자은행의 속내를 잘 알고 있었고 아는 놈이 더 무섭다고 그들만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들춰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재무의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동시에 그립니다. 재무는 인간의 탐욕을 무절제하게 팽창시키는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인간의 비이성을 숫자로 잡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저의 경우도 전자 때문에 재무와 경제학을 공부했다가 후자에 눈을 떴습니다. <언두잉 프로젝트>은 행동 경제학 분야의 책의 대가에 관한 책입니다. 행동 경제학은 인간의 합리성을 가정한 전통 경제학과는 달리 인간은 비이성으로 행동할 때가 더 많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행동 경제학자들은 심리학과 연계하겨 인간은 왜 비이성적으로 그렇게 행동하는가에 대한 연구를 합니다. <언두잉 프로젝트>는 마이클 루이스의 대표작인 <머니볼>과도 궤를 같이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언두잉 프로젝트>는 인간의 비이성을 심리학적으로, <머니볼>은 통계학적으로 들춰내기 때문입니다. 마이클 루이스는 <머니볼>과 함께 <블라인드 사이드> 등 스포츠에 관한 이야기도 써냈습니다. 경제학을 공부했고, 재무업무를 하고, 스포츠를 좋아하는 저의 최애 작가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전형적으로 좌뇌와 우뇌가 고루 발달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제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고 성공하는 사람의 전형입니다. 성공 여부를 떠나서 한 인간으로서 이상적인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의 작품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역시 야구를 숫자와 연결시킨 <머니볼>입니다. '빌리 빈'은 야국 통계를 통해서 만년 꼴찌팀이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월드시리즈에 진출하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2002년 당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팀 선수 연봉의 합계는 양키즈 선수 연봉의 합계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빌리 빈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고, 최근의 성적을 과도하게 신뢰하는 경향이 있으며,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았거나 보았다고 생각하는 사실에도 편견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청바지 모델처럼 미끈한 몸매를 가진 선수를 선호하고 홈런타자나 클러치 히터를 중시하던 당시 스카우터들의 관행에서 벗어나 통계자료를 통해 OPS(출루율과 장타율을 합한 수치), 타석당 투구 수, 절제력 같은 성품이 훨씬 팀 승리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그런 선수들을 싼 값으로 팀에 영입했습니다. 주식투자로 치면 시장이 저평가한 종목을 발굴해서 정당한 가치를 받도록 도와주는 가치투자가 역할을 한 것입니다. ‘빌리 빈’이 만든 선수 평가 모델은 2000년대의 '알파고'였습니다. 


숫자와 통찰보다 더 어려운 변화


‘빌리 빈’이 <머니볼>에서 데이터를 통해 보여준 통찰은 아마도 모든 재무쟁이들이 꿈꾸는 일입니다. 많은 구단주와 전력 분석가와 감독들이 숫자가 야구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듯이, 회사의 재무쟁이들은 모든 활동들이 측정 가능하고, 계산이 가능해서 예측 가능하고, 숫자에 따라서 의사 결정하고, 예상한 대로 결과가 나오는 세상을 꿈꿉니다. 재무 데이터를 통해서 발견한 통찰이 경영활동에 제대로 쓰일 수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최근 각광받고 있는 빅데이터는 그런 꿈을 구체적으로 꾸게 해 줍니다. 컴퓨팅 파워의 증가는 더 많은 데이터를 신속하게 처리하게 해 줌으로써 예측의 정확성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머니볼의 기적은 회사에서 자주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정확한 데이터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쓰지 않는 데이터는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정확한 데이터를 만드는 것 자체도 뼈를 깎는 일입니다. 하지만 제 경험으로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데이터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변수를 고려하여 정교한 모델을 만드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모델의 함의를 설명하는 일과 행동의 변화를 유도하는 일이 훨씬 힘든 일입니다. 가장 큰 저항은 재무쟁이가 만든 모델로 회사를 들여다봤을 때 피해를 입는 혹은 피해를 입을 거라고 겁을 먹는 조직입니다. 회사는 사회의 축소판이고 작은 국회입니다. 온갖 정치와 로비가 난무하는 곳이죠. 평가상 혹은 예산상 불이익을 받을 것이 두려운 조직은 온갖 이유를 대면서 재무쟁이들이 몇 달을 밤새며 만든 모델을 비난합니다. 영화 <머니볼>에서 빌리 빈이 스카우팅 하겠다는 선수들마다 기존 스카우터들이 반대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들은 숫자의 정확성과 해석에 대해서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합니다. ‘너 정확하게 계산하거 맞아?라고 말이죠. 회사에서도 똑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숫자로 변화를 이끌려는 사람은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필요합니다. ‘숫자가 이렇게 말하잖아요’라는 논리는 먹히지 않습니다. 

재무쟁이가 된 지금, 야구는 저를 야구에 미치게 만들었던 밤하늘에 반짝반짝 빛나던 야구공의 낭만적이고 순수한 이미지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데이터를 들여다보면서 좀 더 나은 구단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며, 구단과 감독과 선수들과 얼마나 치열한 논쟁과 설전이 오갈 것인가를 상상하게 됩니다. 도쿄 올림픽에서 수모를 당하고 온 감독과 선수들은 어떻게 변화를 꾀할지 그리고 그 변화에 숫자와 데이터가 어떤 역할을 할지도 궁금합니다. 

‘머니 볼’의 꿈은 훌륭한 수리 모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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