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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우 Aug 28. 2021

재무제표가 알려주는 세상

콩을 세는 남자

재무제표의 이면


대학교 3학년 때 있었던 일입니다. 회계학 수업 과제를 하기 위해서 그룹 스터디를 하는데 한 선배가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너의 인생은 재무제표의 어느 항목에 넣고 싶니?"

회계 지진아였던 저는 어려운 중급회계 문제집을 끌어안고 끙끙대고 있었습니다. 스터디하다 말고 이런 엉뚱한 질문을 하는 선배를 의아한 눈초리로 잠시 째려보다 무시했고 다른 친구들도 잠시 그 선배에 눈길을 주다가 다시 책에 머리를 박고 끙끙대기 시작했습니다. 

그 짧은 사건이 왜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저의 뇌리에 다시 스쳐 지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배는 회계학을 공부하면서도 인생을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장난 삼아 던졌을지도 모르는 그 선배의 질문은 지금 생각해보니 나름 심오했었고, 회계학을 인문적으로 바라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어떤 재무제표를 가장 중시하나요? 모든 기업은 경영철학과 경영전략을 갖고 있고, 그것들은 재무제표에 표현이 됩니다. 개인의 재무제표에도 한 사람의 많은 삶이 드러납니다. 자산배분, 소비행태, 투자전략 등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재무제표를 중요시하는가도 그 사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야기해줍니다. 재무상태표를 중시하는 사람이 있고, 손익계산서를 중시하는 사람이 있고, 현금흐름표를 중시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지만, 제 생각에 재무상태표는 ‘견실’을, 손익계산서는 ‘형식’을, 현금흐름표는 ‘실질’을 표상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기업의 손익계산서를 보면 괜찮아 보이는데 다른 재무제표를 보면 영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의 어떤 면을 보면 매력적이고 어떤 면을 보면 허술해 보입니다. 겉모습은 멋있어 보이는데 실질이 없는 사람도 있고, 겉모습은 별것 없는데 의외로 내실이 탄탄하게 다져져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무제표는 기업뿐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이야기해줍니다. 


재무상태표


얼마 전에 회사를 떠나신 사장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삼성에서 재무통으로 불리시면서 재무 업무를 오랫동안 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을 모시면서 일을 하는 동안 많은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말씀은 ‘회계 고수는 손익계산서가 아니라 재무상태표를 본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보는 손익계산서는 과거와 현재의 단기간의 성과를 보여주지만 재무상태표를 보면 회사의 기초 체력뿐 아니라 전략을 볼 수 있고 따라서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초 체력은 자산의 건전성을 말합니다.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이 얼마나 많은가, 자산 계정에 있지만 쓰지 않는 자산은 얼마나 많은가, 부채비율은 얼마나 되는가, 부채 중에서 당장 갚아야 하는 단기 부채는 얼마나 되는가 등 자산의 건전성을 아는 것은 그 회사의 체지방을 분석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산의 구성을 보면 그 회사의 전략을 알 수 있습니다. 현금만 잔뜩 쌓아놓고 이렇다 할 유형자산이 없는 회사는 사업할 의지가 별로 없거나 사업 계획을 제대로 못 잡은 회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형자산은 없고 투자자산만 많은 회사는 사업이 아니라 주식이나 부동산에 투자할 생각을 갖고 있는 회사입니다. 디지털 경제 시대에 중요성이 강조되는 무형자산이 많은 회사는 사업을 장기적으로 보고 연구개발을 많이 하는 회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세하게 보지 않는 재무상태표는 이렇게 중요한 재무제표입니다. 재무상태표가 강한 기업은 야구로 치면 수비를 잘하는 팀입니다. 이런 회사는 큰 경기에 강하고 장기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손익계산서


손익계산서는 기업의 매출과 비용 그리고 이익을 보여주는 재무제표입니다. 재무제표를 본다는 것은 손익계산서를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을 만큼 손익계산서는 회사 경영진과 여러분들이 가장 많이 보는 재무제표입니다. 재무 부서에서 매월 성과분석을 할 때 단연 관심이 집중되는 부분은 매출과 이익입니다. 재무상태표나 현금흐름표 항목을 물어보는 경영진은 많지 않습니다. '손익관리'라는 단어는 숙명처럼 재무쟁이를 따라다니는 말입니다. 개인투자가들이 어떤 기업에 투자 결정을 할 때 제일 많이 보는 지표 역시 매출과 이익이고, 시가총액을 순이익으로 나눈 주가이익 비율(PER)이라는 지표는 주식투자를 안 하시는 분들도 아실 만큼 범용적인 지표입니다. 

손익계산서의 단점은 ‘흑자도산’이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회계적 이익과 기업의 실질이 다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회계적으로 보이는 이익과 실제로 기업이 벌어들이는 현금이 다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최근 IFRS 15 등의 적용으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전문적인 영역이라 회계 지식이 많지 않은 일반인들은 알아차리기 쉽지 않습니다. PER라는 투자지표 역시 간편성 때문에 많이 애용되는 투자지표이기는 하지만, 부채비율이 1,000%인 기업과 0%인 기업을 같은 잣대로 평가함으로써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지표입니다. 


현금흐름표 


현금흐름표는 가치투자자들이 중시하는 재무제표입니다.  흔히들 현금을 인체의 혈액과 비교합니다. 피가 잘 돌아야 사람이 건강하듯이 현금이 잘 돌아야 건강한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현금은 기업의 혈액 건강을 측정하는 중요한 지표이기도 하지만 가장 본질적인 기업활동의 결과물입니다. 모든 기업은 손익계산서상 매출과 이익이 아니라 통장에 꽂히는 현금을 벌기 위해서 기업활동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현금흐름표 항목 중에서 영업활동으로 인한 현금 증감과 투자활동으로 인한 현금 증감 항목은 기업가치를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항목입니다. 기업활동의 본질을 가장 간명하게 표현하면 ‘어떻게 현금을 벌고, 어떻게 현금을 쓰는가?’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흑자도산’이라는 말은 흔히 손익계산서상 이익의 허구성을 표현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이고, 워런 버핏의 ‘현금이 왕이다(Cash is King)’라는 현금흐름표의 중요성을 가장 일깨우는 말입니다.


재무제표의 인문적 활용


최근 '토스’나 ‘뱅크 샐러드’처럼 자신의 자산 내역이나 지출 내역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앱들이 인기를 많이 얻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편리함을 얻는 대신 자신의 정보를 기꺼이 내놓습니다. 나의 자산 포트폴리오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내가 어디에 지출을 많이 하는지를 보면 나도 몰랐던 나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빅브러더 법이네 아니네 말이 많지만 나의 자산과 지출 내역을 보는 것은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아는데 상당한 도움을 줍니다. 심지어 앱에서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알아서 분류까지 해줍니다.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소득과 소비와 투자는 삶의 불가피한 요소이고 그 흔적은 우리의 재무제표에 남습니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간에 자신이 중시하는 재무제표를 중심으로 소비와 투자 의사결정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재무제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나요? 100% 주관적인 재무쟁이의 관점에서 제 나름의 재무제표 별 인간형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재무상태표형 인간은 견실한 삶을 추구합니다. 삶의 크기보다 삶의 질을 중시합니다. 자존감이 강하고 자신의 인생관이 확실한 사람입니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습니다. 요즘같이 빚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시대에도 빚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타인에게 신세 지거나 의지함으로써 자신을 키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더 탄탄하게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손익계산서형 인간은 외적으로 보이는 형식과 단기 성과를 중시합니다. 부채를 늘려서라도 올해는 작년보다 성장해야 하고, 내년에는 올해보다 성장해야 한다는 성장주의를 표상이자 근대의 이념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기업과 개인의 모습니다. 소개팅을 할 때 상대방에 대한 첫 질문이 “걔 연봉 얼마야?”라고 물을 것 같은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연봉과 내 연봉을 비교하고 우월감 혹은 열등감을 느낄 것 같은 사람입니다. 

현금흐름표형 인간은 삶의 실질과 본질을 추구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그것에 집중합니다. 기업이 추구해야 할 본질은 현금이지만 개인이 인생에서 추구해야 할 본질은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인생의 본질에 집중하며 살고자 월든 숲으로 들어갔던 헨리 소로우가 떠오릅니다. 그는 실제로 월든 숲에서 본질에 집중하는 삶에 필요한 수입과 지출을 계산하기 위해서 회계를 했습니다. 

너무 일반화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제 경험으로 일반인들이 투자할 때 가장 많이 보는 재무제표 순서는 손익계산서> 현금흐름표> 재무상태표 순이지만, 인생의 재무제표에서 제일 많이 보고 신경을 써야 하는 재무제표는 투자할 때와 역순입니다. 당장 오늘 얼마 벌어서 얼마 남겼는지를 계산하는 손익계산서적 삶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본질을 규정하고 집중하는 현금흐름표적 삶과 자아의 건전성을 지키면서 장기적으로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 결정하는 재무상태표적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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