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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우 Aug 14. 2021

재무쟁이는 평론가다

콩을 세는 남자

평론가


평론가들은 책이나 영화에 대한 가치평가를 해서 소비자들에게 콘텐츠를 구입할지 말지 조언을 합니다. 조언은 서평이나 별점의 형태로 표현됩니다. 평론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주관적 성격을 배제할 수 없어서 항상 모두를 만족시키는 평론은 없지만, 그들의 작품 해석을 통해서 제가 보지 못한 부분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들의 해석과 자신의 해석을 비교하면서 콘텐츠를 훨씬 다양하게 즐길 수 있게 됩니다. 야구 해설위원의 설명을 들으면서 야구를 보면 훨씬 재미있듯이 평론가들의 해설과 함께 작품을 보면 풍요롭게 작품을 즐길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책이나 영화를 소개하는 수많은 유튜버들과 큐레이션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들로 인해 전문 평론가의 기능이 많이 희석되었지만, 저는 평론가들의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합니다. 엄청난 양의 콘텐츠를 소화한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내공이 저에게 긍정적 에너지를 전달해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평론가들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작가들이 비평가의 존재를 비난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어떤 소설가는 자신을 비난한 평론가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자신의 소설에 평론가와 이름이 같은 악역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을 좋아하기는 힘들겠지만, 복수의 방법 치고는 치졸한 것 같습니다.

작가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좋은 콘텐츠와 나쁜 콘텐츠를 구별해주는 평론가는 필요합니다. 우리는 소중한 시간을 투자해서 콘텐츠를 소비합니다. 투자한 시간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소비한 콘텐츠가 우리의 삶과 사고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 평론가의 존재는 소중합니다.


재무쟁이와 평론가


재무 이야기를 하는데 왜 뜬금없이 평론가 이야기를 하냐고요? 재무 업무를 바라보는 수많은 접근 방법이 있지만, 회사에서 재무쟁이가 하는 역할은 평론가의 역할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사업부서는 작가고, 재무부서는 평론가입니다. 사업부서가 쓴 스토리에 대해서 재무쟁이들은 대박 날 스토리가 될지 망할 스토리가 될지 판단을 하고 사업진행 여부에 대한 의견을 개진합니다.

재무쟁이는 숫자로 분석하고 비평하는 사람입니다. 재무쟁이는 회사의 모든 정보를 숫자라는 형태로 갖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깊이 있는 분석을 할 수 있는 무기를 들고 있습니다. 회사에 진짜 도움이 되는 분석과 평론을 제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영화 평론가이지 다독가로 알려진 이동진이 숫자에 굉장히 능하고 숫자를 기반으로 평론을 하는 것을 보고 숫자와 평론이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동진 평론가는 책에서 특정 단어가 몇 번 나오는지, 작가가 단락의 수를 몇 개로 했는데 이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영화에서 시퀀스가 몇 개이고 중요한 상징물이 몇 번 나오는 지를 세어서 작가도 생각하지 못한 날카로운 분석과 비평을 합니다. 본인은 회사가 싫어서 젊은 나이에 프리랜서로 전향했다고 하지만 회사에 남아있었다면 재무 부서에서 근무했을 가능성이 높은 분입니다. 비단 재무 업무가 아니더라도 숫자는 모든 분석과 비평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재무 비평이 콘텐츠 비평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콘텐츠 평론가는 이미 만들어진 작품에 대한 평가를 하지만 재무 부서의 평가는 사업의 존폐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바로 돈 때문입니다. 문학 평론가 신형철은 칭찬하는 소설만 평론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재무쟁이는 그럴 수 없습니다. 회사에서 부여하는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읽을 가치가 없는 작품에 대해서 비판하고 읽지 말라고 하는 역할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대한 비대칭성이 있습니다. 실행되지 않은 사업은 성공했을지 실패했을지 증명할 방법이 없지만 실행된 사업은 결과로 드러납니다. 사업이 실패하면 누가 예산 줬냐는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재무쟁이들은 일반적으로 보수적인 비평을 많이 하고, 회사에서 극우파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돈과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우파가 되는 원리와 유사합니다. 그들은 모험과 변화를 싫어합니다. 재무쟁이들이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하고 많은 작품을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나의 무지와 복지부동으로 인해 매력적인 작품을 놓칠 수도 있다는 긴장감을 갖고 일을 해야 합니다


비평이 많은 회사는 위험하다?


작가나 영화감독이 평론가를 싫어하듯이 회사 내에서도 재무쟁이들에게 적대감을 갖는 분들이 많습니다. 비평과 분석이 많은 회사는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제가 경험한 창의적 회사에는 비평과 분석이 난무합니다. 누구나 다른 사람이 만든 제품과 서비스를 깔 수 있고 누구나 자신이 만든 제품과 서비스를 깔 수 있다는 문화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러한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 수평적 조직과 상호 신뢰는 필수적입니다. 상대방이 저런 코멘트를 하는 것은 개인적 공격이 아니라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기 위한 분석과 비평이라는 믿음입니다. 비평과 조롱을 구별할 줄 아는 성숙한 지적 세계 안에서만 가능한 문화입니다.

이순철 야구 해설위원은 방송에서 선수들을 까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를 비난하는 선수는 없고 오히려 경기전에 오늘 어떻게 플레이하면 좋겠냐면서 조언을 구하는 선수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회사의 돈을 투자하는 중요한 의사 결정에 다양한 의견을 내고, 사업부서 분들이 사업을 할 때 조언을 구할 정도가 된다면 가장 훌륭한 재무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재무분야에서 대표적인 평론가라고 하면 증권사 애널리스트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주식을 좀 하시는 분들은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여러분이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의 글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애널리스트들은 증권사에 소속된 직원이다 보니 증권 회사의 주식 수수료 매출을 극대화하기 위해 리포트를 써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매도 의견을 내는 리포트보다 매수의견을 내는 리포트가 훨씬 많습니다. 어떤 애널리스트가 자신이 커버하고 있는 회사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면 매도 의견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합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애널리스트들의 리포트를 가지고 건전한 토론을 하기가 힘듭니다. 예외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타 증권사 애널리스트들과의 경쟁 관계 때문에 특정 회사를 옹호하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증권사의 이해관계를 떠나 객관적이고 정확한 데이터에 기반한 재무쟁이들의 토론 플랫폼 탄생을 기대해 봅니다.


재무 평론의 희열과 좌절 


재무쟁이 개인에 따라서 자신이 좋아하는 사업과 그렇지 않은 사업이 있습니다. 문학평론가나 영화평론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가 있듯이 말입니다. 이동진 영화 평론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가 분명 있지만 정말 잘 만든 영화는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가 아니더라도 애정이 가고 평점을 후하게 준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동진 정도의 영화에 대한 심미안과 내공이 있기에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호불호가 명확해서 자신이 그어놓은 선 밖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재무쟁이도 과거에 성공한 사업과 자신이 잘 알고 좋아하는 사업은 좋은 평가를 하지만, 과거에 한 번 실패했거나 자신이 좋아하지 않거나 관심이 없는 사업에 대해서는 박한 평가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바이오는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지만 운에 좌우되는 사업이라는 편견 때문에 몇 년 전 투자한 바이오 회사의 돈을 일찍 회수했다가 회사가 코스닥 시장에 상장된 후 하늘을 찌를 듯 날아가는 주가 그래프를 보고 망연자실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시장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남들도 그러할 거라고 생각한 저의 편견 때문에 회사의 좋은 수익 기회를 날려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저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길 바랍니다.

재무쟁이로 사업을 평론하면서 가장 기쁜 순간은 창의적 아이디어로 무장한 신선한 사업을 만났을 때입니다. 주로 벤처 회사를 투자 심의할 때 그런 희열을 느낍니다. 거칠지만 신선한 사운드를 들려주는 인디밴드 음악을 감상할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요즘은 벤처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솟아서 투자가들이 한 번 만나기도 힘든 상황이지만, 그런 회사들은 언제나 제 두뇌에 건강한 자극을 줍니다. 아이폰이라는 사업 아이디어를 처음 접했을 때 애플의 CFO는 어떤 감정이었을까 상상해봅니다. 이것은 인생 영화나 인생 소설을 보았을 때 평론가가 느끼는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을 선언했습니다. 이전까지 독서와 문학비평은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저자가 던져 놓은 문장을 따라는 가는 것이었는데, 롤랑 바르트는 저자와 독자는 일방적인 생산자와 소비자가 아니라 텍스트 속에서 서로를 찾고 만나고 텍스트를 즐겨야 할 관계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평론가 재무쟁이와 작가 사업부서도 사업 속에서 서로를 찾고 만나고 사업을 즐겨야 할 시기가 도래했습니다. 재무쟁이는 사업부서와 사업으로 사이좋게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평론가로서 재무쟁이가 취해야 할 자세입니다.


재무 평론의 미래


저에게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가 있습니다. 공학 전공이었지만 대학교 때 영화에 빠져 미국에서 영화 비평을 공부하고 지금은 교수를 하고 있는 친구입니다. 베프가 쓴 논문을 한번 읽어보자고 시도했다가 온갖 철학 용어가 난무한 페이퍼를 반도 못 읽고 포기했던 쓰라린 경험이 있습니다. 전문 비평가들의 평론은 철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앞서 말한 롤랑 바르트는 철학적 평론에 중요한 변곡점을 만들어낸 철학자였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재무쟁이 평론가의 철학은 '주주제일주의'였습니다. 재무쟁이들은 주주제일주의를 성경처럼 받아들였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공부한 재무 이론도 결국 어떻게 하면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주주제일주의라는 철학에 기반해서 가치경영을 하는 기업들, 예를 들면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 같은 주주친화적 재무정책을 실행하는 기업들의 주가가 좋고 그런 기업들의 경영자들이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자신의 철학을 갖는 것은 필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철학은 갖고 있되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철학과 이념에 집착하는 것은 한국인의 강점이자 약점입니다. 유교를 명나라보다 강하게 실천했던 조선, 공산주의를 소련보다 강하게 실천했던 북한, 자본주의를 미국보다 강하게 실천하고 있는 대한민국. 철학과 주의와 이념이 강한 나라에서는 창의도 혁신도 화합도 기대하기 힘듭니다.

다양한 논의가 있지만 대부분의 재무 평론가들의 철학은 아직도 주주제일주의입니다. 재무쟁이의 비평 철학도 다양해져야 합니다. 시대가 바뀌었는데 80년대에 유행했던 철학에 비추어서 비평할 수는 없습니다. 당장 맞이해야 할 가장 큰 과제는 ESG경영입니다. 코로나와 기후변화로 탄소세 도입, 전기차 의무 등 각종 환경 규제와 공정한 지배구조에 대한 논의가 활발합니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가 어떻게 주주들의 이익에 부합할 수 있는가를 공부해야 하는 시기가 도래했습니다. 공부해야 할 것이 많아졌다는 것은 당장의 부담이지만 건강한 자극입니다. 재무쟁이가 고민해야 하는 두 번째 문제는 디지털 경제의 가속화입니다. 플랫폼 기업들의 사업 방식은 과거 제조업에 적용했던 사업 평가 방식을 무용지물로 만듭니다. 다양한 대안들이 나오고 있지만 모두가 인정하는 방법론은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분권화, 평등화, 다양화되고 있습니다. 재무가 과거 재벌기업의 기조실처럼 권력의 상징이 되어도 안되고, 주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변호인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재무 업무의 다양한 의미를 발굴하고 업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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