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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우 Oct 01. 2021

재무의 역사

콩을 세는 남자

어느 직업이나 역사적 관점에서 자신의 직업을 돌아보는 것은 업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재무라는 직업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또한 사람들의 재무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보고, 재무 업무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를 생각해볼까 합니다. 


회계의 탄생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 느껴보는 자유를 주체하지 못하고 방탕한 음주가무와 당구로 인생의 화양연화를 즐기다가 3학년이 되자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졸업 후 인생도 있다는 것을 그제야 희미하게나마 깨닫게 된 것이죠. 친구들도 하나둘씩 미래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법고시나 행정고시 외무고시를 준비하는 고시파도 있었고, 학자의 길을 걷기 위해 대학원을 준비하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고시 패스를 할 자신은 없고 계속 공부할 자신은 더 없었던 저는 상경계열의 학생들이 많이 준비하는 CPA를 준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몇몇 친구들과 스터디 모임을 만들고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CFA를 비롯해서 재무 관련 자격증이 많지만, 그 시절엔 CPA가 거의 유일하다시피 했습니다. 

회계원리 시간에 처음 접한 회계에 대한 저의 첫 이미지는 복잡하고 저급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복잡하다는 의미는 복식부기의 원리가 처음에는 까다롭게 다가왔다는 뜻이고, 저급하다는 의미는 경제학 시간에 뭔가 거시적이고 고차원적 이야기를 하다가 차변 대변 이야기를 하니 경리 일을 배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는 뜻입니다. 온갖 상술을 발휘해서 회계학을 가르치는 학원에 갔을 때는 그런 느낌이 배가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걸 도대체 누가 만들었지?’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복식부기의 발명이 회계의 탄생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복식부기는 1300년 무렵 토스카나와 이탈리아 북부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합니다. 고대의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로마도 단순한 형태의 회계는 있었지만 우리가 날마다 보는 재무제표의 근간이 되는 복식부기는 중세 이탈리아인들이 만들었습니다. 신촌에 있었던 회계학원에서 제가 재미없는 회계 공부를 죽도록 하게 만든 주범은 이탈리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인들에게 복식부기가 중요했던 이유는 이익 계산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것이 행정부를 심판하고 책임을 묻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대차 균형’이라는 중심 개념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또한 중세 이탈리아에서 ‘대차 균형’은 하느님의 심판과 죄의 증거라는 신성한 측면을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회계는 탄생부터 정치와 종교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회계가 정치, 특히 민주주의와 관련이 있었던 것은 고대부터 일입니다. 고대 아테네 인들은 회계를 정치적 책임성과 연결해서 보았습니다. 처음부터 복잡한 부기와 공적 감사 시스템이 아테네 민주주의 정부의 중심에 놓여 있었던 것이죠. 아리스토텔레스는 공공 재정의 관리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을 오이코노미아(oikonomia)라고 불렀고, 이것은 경제학(economics)이라는 용어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경제, 회계, 민주주의는 세 쌍둥이었습니다. 


회계하는 자 흥하고, 회계하지 않는 자 망할지어다


제가 너무 재미없게 공부한 회계지만 회계의 역사를 보면 현재의 회계가 탄생하기까지 수많은 소쩍새가 오랜 세월 동안 울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회계의 역사는 건전한 재정을 위해 정확한 재무제표를 만들려고 하는 자와 그것을 저지하는 자 혹은 회계 시스템을 악용하여 자신의 입맛에 맞는 재무제표를 만들려고 하는 자의 투쟁의 역사였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회계도 정치, 종교, 문화, 철학과 무관할 수 없었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스페인의 몰락

세계사 시대에 우리는 스페인이 중세에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고 배웠습니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스페인 제국의 파산에는 회계에 대한 선입견과 멸시가 한 원인이었다고 말합니다. 스페인에는 회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루카 파치올리’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파치올리는 회계가 시민적 인문주의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비즈니스와 고전 학문과 도시의 문화적 후원을 결합하여 피렌체 같은 도시를 상업과 학문, 예술과 건축의 풍부한 전시장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이었고, 이러한 위대한 존재의 사슬이 신의 언어인 수학에 의해 결합된다고 믿었습니다. 

파치올리로 인해 다른 나라에 비해서 회계 시스템이 발전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지만 스페인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기사도 정신과 신플라톤주의의 세례를 받은 왕과 군주들은 재정 관리를 위해 성실한 회계사를 찾으려고 애쓰기도 했지만, 회계 자체는 저속한 상업적 기술로 멸시를 받았습니다. 제가 신촌의 회계학원에서 느꼈던 이미지를 스페인의 왕과 군주들도 가졌던 모양입니다. 

나중에 오반도가 펠리페 2세가 정부 재정의 대차대조표 작성 등 재무 개혁을 시도했지만 스페인 무적함대 원정(1588)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펠리페 4세 즉위 후 30년 전쟁의 수렁에 빠진 스페인은 소설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가 말한 ‘쓸모없고 게으른 국가’가 되어버렸습니다.


네덜란드의 황금시대

네덜란드는 복식부기를 활용하여 황금시대를 만든 대표적 국가였습니다. 지금은 벨기에에 속하는 안트베르펜(안트베르펀)은 유럽 회계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네덜란드 황금기가 가르쳐준 교훈은 책임성을 원하는 이들은 회계를 배우고 회계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이야기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책임성 있는 정부와 재무를 발명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대표적 인물이 ‘더 빗’ 형제입니다. 더 빗 형제는 그들이 가진 수학적 재능을 발휘해서 네덜란드의 재정 재건을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외교의 실패로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대군에게 퇴위당하고 잔인하게 살해당했습니다. ‘더 빗’ 형제의 핏빛 종말은 수학적 명료성과 책임성을 정치에 가져오기 위한 기나긴 투쟁의 전조였습니다. 

17세기 무렵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문학적 회계학적 소양이 가장 높은 곳이었습니다. 17세기 중반 암스테르담 은행을 설립했고 세계 주식 거래의 본고장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한국 주식시장에서 찬반 논란이 뜨거운 공매도 제도도 있었다고 합니다. 자본주의 역사상 최초로 주식시장에 상장된 회사는 네덜란드 연합 동인도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였습니다. VOC는 민간출자회사지만 네덜란드 정부의 국제 사업부였으며, 거의 100년 동안 작은 나라 네덜란드를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VOC 주주들이 회계감사를 요구하자 공개결산은 하지 않겠지만 국가가 회사를 비공개로 감사했다고 합니다. 지금 기준에는 못 미치지만 회계의 정신은 살아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일찍이 상업이 발달한 암스테르담은 인간의 자유를 상징하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제가 암스테르담에 여행 갔을 때 가장 놀라운 사실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한 가지는 코카인을 일반 카페에서 구입해서 흡입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고, 두 번째는 매춘이 합법화되어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심지어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큰 매춘가가 네덜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바로 옆에 있습니다. 현지 관광 가이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두 직업이 나란히 있다고 뼈가 있는 멘트를 했습니다. 암스테르담이라는 도시가 갖고 있는 자유성은 ‘이언 맥큐언’이 쓴 <암스테르담>이라는 소설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역사는 재무와 국가와 조직의 흥망성쇠가 길을 같이 했음을 보여줍니다. 마르크스를 인용하자면 하부구조가 튼튼해야 상부구조도 발전합니다. 하지만 긴 시간을 놓고 보면 재무의 역사는 패배의 역사였습니다. 


재무의 패배


종교에게 패배

중세 상인들의 딜레마는 신을 우선으로 할 것인가, 이익을 우선으로 할 것인가였습니다. 기독교에 회계 문화를 도입한 성 마태오는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복식부기가 등장하기 전까지 회계는 도덕적 계산을 기록하는 문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 삶의 본질이었던 것이죠. 기독교인들은 사후에 연옥에서 한정된 시간을 보내는 대가로, 그리스도가 흘린 피와 함께 선행과 속죄가 죄를 청산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통해 회계의 개념을 접했습니다. 도덕적 차변과 대변, 대차 균형은 모두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최초의 복식 기장을 했던 중세 이탈리아인들마저도 회계장부를 기록했지만, 결국 어떤 인간도 최종 결산을 할 수 없다는 점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회사에서 일할 때 농담으로 ‘회계(會計)하는 사람은 회개(悔改) 해야 한다.’고 말을 하는데 실제로 중세 사람들은 회개를 하기 위해서 회계를 했습니다. 종교적으로 영감을 받아 절제와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회계는 개인적 근면서의 도구이자 신이 준 번영이라는 선물과 정치적 자유를 충실하게 보호하는 도구였습니다. 회계하는 사람들이 근면, 절제하는 스타일이 많다는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회계의 개념조차 신을 위해서 쓰였다는 것은 지금 관점에서 보면 참신하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모두 대차 균형의 세계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갈수록 부채 계정이 늘어나서 대차 균형이 무너져가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요즘, 중세인들의 대차 균형 개념은 우리들의 경제관념뿐 아니라 삶의 태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합니다. 


철학에게 패배

재무가 철학에 패배했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이탈리아 메디치가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코시모 데 메디치’는 플라톤 철학을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돈과 고대 철학의 자극적인 결합이었던 셈입니다. 

코시모는 어린 나이에 회계에 통달했고 메디치가의 주 사업이었던 은행업에 복식부기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한 발은 중세에 다른 한 발은 르네상스 시대에 속한 남자였던 것입니다. 회계를 이용하여 엄청난 부를 쌓았던 코시모는 아들이 자신처럼 세속적인 중세 비즈니스의 세계에 뛰어드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코시모가 공부한 신플라톤주의는 예술적 문화적 정치적 성취를 토대로 하는 인간의 영광을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코시모가 르네상스에 돈을 대는데 도움을 준 도구였던 회계는 이제 저속하고 심지어 비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딜레마를 중세 최대의 거상도 느꼈던 모양입니다.

신기한 것은 현대의 경영자들도 비슷한 심리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회계와 재무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자신은 더 고귀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와 사회와 문명과 문화와 기술과 예술의 혁신에 기여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장사를 잘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아 합니다. 세상을 바꾼다고 이야기하지 돈을 번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코시모의 손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는 현대의 관광객들에게 피렌체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입니다. 그의 할아버지가 바라던 대로 그는 철저하게 문화, 예술, 정치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시인, 신플라톤주의자였던 그는 '보티첼리'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와 '기를란다요'의 후원자이자 친구였습니다. 하지만 회계 실력은 형편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의 심복이자 메디치 은행의 회계사 ‘사세티’ 역시 문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회계는 등한시했습니다. 이것은 메디지 은행의 몰락을 재촉했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사례는 재무가 철학에 패배한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중요한 것은 재무의 패배가 사업의 실패 그리고 가문의 실패로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재무는 천하지만 중요한 일입니다. 


계륵 같은 존재, 재무쟁이


사실 역사적으로 재무가 귀중한 대접을 받았던 시기는 길지 않습니다. 재무쟁이들은 언제나 조직에서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투명해지기를 원하지 않는 지도자나 재무를 천하게 여기는 종교 혹은 철학에 의해서 재무는 항상 무시를 받아왔습니다. 필요는 하지만 신경 쓰이는 계륵 같은 존재들이었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현상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로마의 지성으로 불리는 키케로가 카이사르의 정적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부실한 회계를 비난하며 그를 공격했습니다. ‘카이사르에게 훔친 수없이 많은 돈을 탕진하고 심지어 회계장부와 서명까지 날조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키케로를 붙잡아 그의 머리와 그 글을 쓴 손을 잘라 광장에 전시했다고 합니다.

권력자들은 장부 공개를 요구하는 자들에게 호의적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현대의 경영자들도 회계 숫자가 아름답게 보이기를 원합니다. 문제가 되지 않는 수준에서 회계담당자가 숫자를 마사지하기를 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우조선해양 사태와 같이 그 정도가 과해서 법적 처벌을 받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감사(Audit)를 뜻하는 단어는 통치자와 군주가 회계 기록을 눈으로 보기보다 귀로 듣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Audit은 라틴어 Auditio에서 유래했는데 회계사의 말을 통해서 왕이나 군주는 회계 기록을 확인했고, 왕이 회계장부를 보지 않고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은 의자에 편안하게 좌우로 누워있고, 회계사는 장부를 들고 와서 숫자를 읊조리고, 왕은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있는 모습이 상상이 됩니다. 재무 부서에서 재무 실적을 보고해도 비슷한 현상이 발생합니다. 경영진은 매출과 영업이익이 얼마고, 얼마나 증감했고 투자가들이 어떻게 생각할 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재무제표에 드러나는 수많은 시그널과 인사이트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경영자들이 재무쟁이들을 싫어하고 껄끄러워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지만, 어떤 경영자들은 재무부서를 사업부서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기는 싫고, 안 되는 사업을 포기시키거나 망가진 사업을 합리화해야 하는 필요성이 있을 때 재무쟁이들의 숫자라는 무기를 빌리는 것입니다. 계륵 같은 재무쟁이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회계의 인문적 활용


중세인들이 구원을 위해 도덕적 대변과 차변을 작성하여 종교적 삶을 영위했듯이, 역사적으로 회계를 예상하지 못한 다른 목적으로 사용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월든>이라는 책을 쓴 ‘소로’는 종교와 상관없이 금욕적이고 영적인 삶을 위해 회계를 이용했습니다. 그는 자연 속에서 금욕적이고 영적인 삶을 위해서 회계를 했습니다. 숲에서 생활하는데 얼마의 돈이 드는가를 계산하기 위해서 회계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는 2년 동안 월든이라는 숲 속에서 살면서 금욕적이고 영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을 계산했습니다. 회계는 물질적인 삶을 위해서뿐 아니라 영적인 삶을 위해서도 사용되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서 철학자들은 회계를 사유의 도구로 보았습니다. '베이컨'과 '홉스' 모두 회계를 상업적 관리의 도구일 뿐 아니라 정치적 사유의 도구로 보았습니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논리적 이성의 탄생 자체를 회계 또는 계산의 공으로 돌렸습니다. 홉스는 덧셈과 뺄셈 없이는 정치를 할 때 과연 무엇이 도덕적으로 올바른지 찾기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때까지 누구도 회계와 윤리학과 철학을 그토록 단호하게 연관 지은 적이 없었습니다. 

'벤담'은 쾌락의 가치를 매기는 복식 기장법인 ‘쾌락 계산법’으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벤담은 쾌락과 고통을 기록하라고 촉구했습니다. "한쪽에는 모든 쾌락의 가치를 요약하고, 다른 한쪽에 모든 고통의 가치를 요약한다." 이를 결산한 결과는 사람의 좋은 성향과 나쁜 성향을 보여주어 삶을 개선하고 구원이 아닌 세속적 행복을 찾을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회계를 통하여 그의 세계관을 형성했으면 그에게 회계는 국가와 정부 건설의 핵심도구였습니다. 막스 베버는 벤저민 프랭클린을 프로테스탄트 자본주의 정신의 대표적인 인물로 상찬했습니다. 복식부기는 베버의 노동 윤리론의 중심에 있으며 그는 그것을 ‘합리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베버는 프랭클린의 금언 ‘시간은 금이다’와 신용은 돈이다’를 인용하면서 회계와 검약에 관한 프랭클린의 좌우명을 아주 좋은 본보기로 제시했습니다. 

찰스 다윈은 유전 학자답게 아버지와 자신의 유전적 특성을 비교 분석하기 위해서 대차대조표를 활용했습니다. 차변에 자신의 특성을, 대변에 아버지의 특성을 기록하여 진화의 관점에서 자신의 능력을 아버지와 비교했습니다. 

독서를 위해서 대차대조표를 활용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로 김대중 전 대통령입니다. 독서를 한 다음에 차변에 저자의 주장을 적고, 대변에 저자의 주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적어 넣는 방법으로 독서를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저자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비교함으로써 주체적 독서를 한 것입니다. 

회계는 정치적 언어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회계는 기본적으로 감사이고 공개입니다. 왕실의 방만한 재정을 공개함으로써 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고 리먼브라더스 사태를 맞기도 했고 IMF를 맞기도 했습니다. 개방을 꺼리는 모든 사람들은 회계의 적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재무쟁이들이 맞이해야 하는 숙명입니다. 영수증을 들이대면서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하는 사람을 좋아할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요즘 재난지원금을 둘러싼 논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정치적 목적으로 더 많은 재난지원금을 요구하는 국회와 국가의 재정을 걱정하는 재정기획부의 마찰을 보면서 재무쟁이의 딜레마를 다시 한번 느낍니다. 


회계(Accounting)와 책임(Accountability)


최근 미국 주식시장에 비해서 한국 주식시장은 수익률이 좋지 않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한국 시장을 버리고 미국 주식시장으로 이동하는 서학 개미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의 주식시장이 왜 강할까요? 달러 패권국이라는 장점도 있지만 미국의 투명한 회계과 공시 시스템을 이유로 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국 시장에 상장을 시도했거나 상장된 회사에서 일해보신 분들은 미국의 SEC에서 얼마나 많은 자료를 요구하고 철저하게 감시 감독하는지 아실 겁니다.

미국 시장에 상장된 회사들은 실적 가이던스도 객관적이고 주기적으로 제시합니다. 투명한 회계와 공시제도는 투자가 친화적 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최근 IT기술의 발달은 한국의 서학 개미 자금을 포함해서 세계의 모든 자금들이 미국으로 몰려가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흡수한 자금은 미국 기업들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투명한 회계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문화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회계를 단순히 재정 거래의 일부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도덕적 문화적 체계의 일부로 바라볼 때 재무적 책임성이 제대로 힘을 발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야 2A(Accouting & Accountability)가 함께 발전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인류는 2A가 각자 별도로 따로 놀았던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일단 살고 보자는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이 모든 나라에서 사용되었고, 탐욕의 시대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2A가 자칫 따로 놀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요즘, 우리의 2A는 안전한지 면밀하게 살펴봐야 할 시기입니다.  


* 이 글은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저자 제이컵 솔, 출판사 메멘토)를 읽고 저희 해석을 추가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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