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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우 Oct 05. 2021

숫자, 스토리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콩을 세는 남자

기업의 스토리


고전 문학의 수많은 명작 중에서 기업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작품이 아마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일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회자되는 이 대작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모습이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한 기업은 성장하는 산업에 속해있고, 타사와 구별되는 확실한 경쟁력이 있고, 유능한 인재들이 모여서 밤낮없이 일하고, 막대한 이익을 창출해서 더 막대한 인센티브를 챙겨갑니다. 하지만 불행한 기업은 여러 가지 이유로 불행합니다. 잘 나가던 산업이 꺾이기도 하고, 정부의 규제가 세지기도 하고, 갑자기 거시경제환경이 안 좋아지기도 하고, 대표이사가 횡령을 하기도 하고, 강성한 노조로 인해서 회사가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톨스토이가 관찰한 것처럼 한 가정이 지속적으로 행복하기 어려운 만큼 한 회사가 지속적으로 잘 나가기도 힘듭니다. 회사마다 저마다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서 ‘줄리언 반스’라는 영국 작가가 있습니다. 그는 소설가가 되기 전에 사전 편찬자였습니다. 소설가에게 사전을 만들었다는 경력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소설가가 구사할 수 있는 단어가 많다는 것은 많은 색깔을 갖고 있는 화가나 만들어 낼 수 있는 화음이나 코드 진행이 많은 음악가와 같기 때문입니다. 재무쟁이가 가질 수 있는 축복은 기업의 많은 스토리를 아는 것입니다. 기업에 대해 많은 스토리를 안다는 것은 남들보다 많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회사를 분석할 수 있고 투자를 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무쟁이가 기본적 재무 지식을 공부하고 나서 해야 할 일은 스토리를 최대한 많이 갖는 것입니다. 소설가가 많은 소설을 읽어야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전략은 스토리다


운 좋게도 저는 회사에서 존경하고 따를만한 많은 사수를 만났습니다. 그중에서도 제가 사회 초년병 시절에 만난 두 분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한 분은 외국게 은행에서 일하다가 저의 첫 직장으로 이직한 재무 전문가이고, 또 다른 한 분은 외국계 전략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다가 역시 저의 첫 직장으로 이직한 전략 전문가였습니다. 두 분은 대학교 때부터 절친이었고 누구보다도 회사를 사랑하고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인수합병(M&A)을 고려하고 있는 회사에 대한 토론 중에 두 사수 간의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전략 전문가 사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무제표로 회사에 대해서 무엇을 알 수 있나요?”

재무전문가인 다른 사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사 재무제표로 무엇을 모를 수 있나요?”

수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결국 위에서 말한 두 문장으로 논쟁은 요약됩니다. 아직도 존경하는 이 두 사수의 논쟁은 많은 회사에서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재무쟁이로서 회사에서 일하면서 많은 부서와 충돌이 있었지만 가장 많은 충돌이 일어나는 부서 중의 하나가 경영전략 부서입니다. 회사에 따라서 재무부서와 전략부서가 한 조직에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는 상대적으로 이런 충돌이 덜 합니다. 하지만 많은 회사에서 재무부서와 전략부서를 따로 가져갑니다. 업무의 성격이 다소 다르기도 하고 부서 간 힘의 균형과 견제(Check & Balance)를 위하여 일부러 조직을 이렇게 디자인하기도 합니다. 조직이 어떻게 구성되어 이건 간에 재무부서와 전략부서는 상호 보완적이기도 하고 상호 충돌적이기도 합니다..

숫자를 보지 말고 큰 그림(Big Picture)을 보라고 수많은 전략서는 말합니다. 재무쟁이를 ‘콩을 세는 사람(Bean Counter)’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재무부서가 성경같이 숭상하고 모든 의사결정의 기준으로 삼는 순현재가치(NPV)를 전략부서는 무시합니다. 회사의 이익을 최대한 많이 내려는 재무부서와 달리 전략부서는 더 많은 투자를 지지합니다. 주주와 채권자의 관계를 중시해서 배당과 이자 지급을 중시하는 재무부서와 달리 전략부서는 그 돈으로 재투자를 하자고 합니다. 한 집에 살고 있지만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부부 같습니다. 재무부서는 살림을 걱정하는 엄마처럼, 전략부서는 큰 꿈을 꾸는 아빠처럼 행동합니다. 그 둘 사이에 끼어있는 아이들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경영자들은 기본적으로 꿈을 꾸는 사람들입니다. 소설가들이 소설을 쓰듯 그들은 회사의 비전을 설계하고 비전은 스토리의 형태로 기업의 이해관계자에게 전달됩니다. 따라서 기업전략은 기본적으로 스토리입니다. 전략을 구성하는 요소를 보면 소설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기업의 시장환경은 기본적으로 소설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입니다. 소설 속의 모든 인물들이 시대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의 제약 속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모든 기업들 역시 그 사업이 속해있는 시장환경에 제한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략은 기본적으로 시장 환경 속에서 나와 경쟁자와의 관계에 대한 스토리입니다. MBA에서 주로 배우는 케이스 스터디(Case Study)도 기본적으로 스토리입니다. 어떤 케이스는 소설보다 재미있습니다. 소설에서 주인공에게 친구(Protagonist)와 악당(Antagonist)이 있듯이 기업도 협력자가 있고 경쟁자가 있습니다. 회사가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핵심역량을 키우고 바기닝 파워를 키우려고 노력하듯이 소설 속 우리의 주인공도 살아남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합니다. 기업이 인수합병(M&A)을 하듯이 소설 속 주인공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합니다. 시장 환경에 따라서 기업의 친구와 적이 달라지듯이 소설 주인공은 바람을 피우기도 합니다. 가끔은 기업이 망하듯이 주인공도 죽습니다.


내러티브 앤 넘버스(Narrative and Numbers)


‘다모다란’은 재무업무를 하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분입니다. 해외 사업을 평가하는데 어떤 가중평균 자본비용(WACC)을 사용할지 몰라서 헤매고 있었는데, 그가 자신의 블로그에 전 세계 국가의 국가위험 프리미엄(Country Risk Premium)을 공개한다는 사실을 알고 블로그에 처음 들어갔습니다. 그 후 그의 블로그를 자주 찾게 되었고, 기업가치평가에 관한 책도 읽었습니다. 워낙 가치평가의 대가인지라 모든 책이 훌륭했지만 저에게 가장 인상을 깊게 심어준 책은 <내러티브 앤 넘버스, Narrative and Numbers>라는 책이었습니다. 가치투자를 중시하는 그이기에 숫자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모다란은 숫자의 한계를 지적하고 스토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숫자가 없는 스토리는 동화고, 스토리가 없는 숫자는 금융모델 연습에 불과하다
<내러티브 앤 넘버스>, 다모다란

처음에는 가치투자가라고 알려진 그의 주장에 적잖이 충격을 먹었고 일종의 배신감마저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책을 읽을수록 그의 주장에 동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은 숫자보다 스토리에 더 깊게 빠져들고 스토리로 들었을 때 이해력도 훨씬 높아진다는 그의 말은 숫자를 넘어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긍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도 그렇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결국 제가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접했던 기업의 스토리는 주로 TV 드라마를 통해서였습니다. 현대 정주영 회장의 이야기를 다룬 <야망의 세월>, 율산 그룹의 이야기를 다룬 <훠이훠이> 등이 떠오릅니다. 정말 신기한 것은 그 드라마의 내용이 30년 이상이 지난 지금에도 기억이 난다는 것입니다. 초등학생에게 현대와 율산이라는 기업이 어떤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율산그룹이 망하는 장면이 나올 때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왜 울컥하고 눈물이 찔끔 났는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많은 기업들에 대한 책을 읽었지만 이들 드라마처럼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스토리는 없습니다.

어른이 된 후에 접한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기업 스토리는 뭐니 뭐니 해도 애플과 스티브 잡스의 스토리입니다. 그의 스토리에는 흥행의 모든 요소가 갖춰져 있습니다. 불행한 어린 시절, 방황했던 청소년 시절, 예술가 특유의 괴팍한 성격과 반 고흐를 연상시키는 불타는 열정.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쫓겨나는 실패와 화려한 컴백, 딸과의 불화 그리고 인생의 가장 정점에서 찾아온 갑작스러운 죽음. 어떤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가 영화를 만들어도 이런 극적인 스토리는 없을 것입니다. 저를 포함한 수많은 앱등이 애플빠들은 이 스토리에 반한 오늘도 애플 매장에서 줄을 서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스토리를 좋아합니다. TV 드라마, 소설, 웹툰/웹소설, 영화, 연극 등 좋아하는 이야기의 형태와 장르는 다르지만 스토리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영화 <파이 이야기>의 주인공 파이가 힘든 여정을 거치고 병원에 도달해서 일본 보험사 직원들에게 전달하는 우화적 스토리는 왜 사람들이 스토리를 좋아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실제 일어난 일들을 사실대로 듣는 것보다 이야기의 형태로 듣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죠. 오래전 설화나 신화가 생겨난 이유입니다. 숫자로 분석한 것을 이야기의 형태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난 사람의 파워는 막강합니다.

소설가 김영하는 <알쓸신잡>에서 인류가 이야기를 통한 공감능력이 늘어났기 때문에 갈수록 폭력성이 줄어들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야기는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생각해보면 재무쟁이들이 숫자를 분석하는 목적도 경영진과 회사의 구성원들의 사업에 변화를 주기 위함입니다. 전략은 다름 아닌 스토리를 쓰는 것이고 재무는 이를 숫자로 비평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스토리는 읽지만 비평문은 읽지 않습니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비평도 스토리를 통해서 하자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몇 편의 스토리를 접할까요? 절대 잊히지 않는 스토리가 있고 소비하자마자 바로 잊히는 스토리가 있습니다. 절대 잊히지 않는 스토리는 머리가 아니가 가슴을 때리는 스토리입니다. 재무쟁이는 숫자로 머리를 때리려고 합니다. 쉽게 설득이 되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로고스’보다 ‘파토스’가 사람을 움직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바야흐로 빅데이터의 시대입니다. 인류가 지구 상에 거주하기 시작한 이래 가장 많은 숫자가 디지털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고 그 규모는 더욱더 커질 것입니다. 더 많은 숫자는 더 많은 객관성과 통제력을 줄 수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데이터가 많아짐으로써 우리가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많아진 데이터는 오히려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해서 스토리텔링의 가치가 더 높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잡한 수식보다 스토리에 집중하고 스토리로 이야기할 때 이해력이 높아지기 때문이죠.

일반적으로 재무쟁이들이 약한 분야가 스토리를 만들고 글을 쓰는 것입니다. 피벗, 매크로 등 엑셀의 각종 고급 기능을 활용하여 숫자를 분석하지만, 분석 결과를 보고서로 작성하라고 하면 힘들어합니다. 파워포인트도 힘들어하지만 서술형 보고서를 쓰라고 하면 멘붕이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숫자가 잔뜩 들어가 있지만 보고서를 보는 사람이 정확한 의미와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힘들게 분석한 숫자의 결과를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러티브’가 없는 것입니다. 숫자를 내러티브에 접목시키면 여러 가지 효과가 있지만 제일 좋아하는 것은 듣는 사람과 보고하는 사람이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컴퓨터가 먹통이 될 정도로 큰 용량의 엑셀 파일을 밤새 돌려가면서 분석해서 만든 보고서가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고 영향력은 더욱더 없는 30분의 보고로 끝나는 허무함을 아실는지... 엄청난 발견을 하고도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해서 빛을 보지 못한 사람들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재무쟁이들도 스토리텔링의 기술을 갖춰야 합니다.


숫자보다 더 어려운 사람


‘측정할 수 없는 것은 관리할 수 없다’는 피터 드러커의 유명한 말에도 불구하고, 숫자로 측정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극명한 것은 어떤 분석도 사람에 관한 것은 측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재무쟁이들은 시장분석, 산업분석, 경쟁현황 분석, 핵심역량 분석 등 갖가지 분석을 하고 분석 결과를 숫자로 표현합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분석은 숫자로 표현하기 힘듧니다. 숫자 분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사람에 대한 분석입니다. 그래서 투자를 정말 잘하고 싶은 분은 사람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합니다. 바로 인문학입니다.

IR을 하면서 느꼈던 점이 하나 있습니다. 고수 투자가일수록 회사의 숫자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 대해서 물어본다는 것입니다. CEO는 어떤 사람인지, 위기를 맞이했을 때 어떤 대응을 할 사람인지, 요즘 주된 관심사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페미니스트 분들이 알게 되면 발끈할 이야기지만, 어떤 투자가들은 리셉션에 있는 여비서를 보고 CEO를 판단한다고 합니다. 비서를 뽑을 때에도 외모를 보는지, 실력을 보는지, 그 여비서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 등을 보면 CEO의 성향도 어느 정도 파악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재무업무에서 스토리 텔링은 많은 분야에서 중요하지만 특히 IR업무를 할 때 빛을 발합니다. IR은 기본적으로 CEO와 회사의 스토리를 설득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비즈니스 모델과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은 벤처에 대한 투자를 할 때 CEO에 대한 평가는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비즈니스 모델이 시원치 않아 보이는데 사업을 성공시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망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엉망으로 망가뜨려놓는 CEO도 있습니다. 어느 사업이나 위기의 순간이 있는데 그 순간을 어떻게 넘기는 가도 CEO의 리더십, 인간관계, 성품, 인격 등에 많은 부분 좌우됩니다. 이러한 것들은 기업을 평가할 때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지만 숫자로 표현하기 힘듧니다. 그래서 투자를 정말 잘하고 싶은 분은 사람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스토리는 사람에 대한 이해를 돕습니다. 아무리 허구의 이야기라고 하지만, 어떤 소설을 읽으면 소설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듯이, 어떤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지를 보면 그 회사의 경영진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의 스토리 자체가 애플의 IR이었습니다. 더 이상 무슨 IR이 필요했겠습니까? 우리가 애플 제품에 열광하는 이유 중에 하나도 이런 광신적 완벽주의자가 만들어낸 제품은 믿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일 것입니다.


숫자는 언어다 


숫자도 언어입니다. 최초의 언어 수메르어가 외상거래를 표시하기 위해 숫자로 표현되었다는 사실은 재무 숫자와 언어가 얼마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샐러리맨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웹툰 <미생>에서 하회탈 같이 생긴 재무부장이 여주인공 안영이에게 회계를 공부하라고 권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회계는 빨리 배워 둬. 회계는 경영의 언어니까...”

저는 회계를 ‘언어’라고 표현한 것에 감탄했습니다. 회사 생활을 해 본 적도 없고 회계학에 문외한일 것이 분명한 윤태호 작가가 어떻게 이런 표현을 썼을까요? 약간 다른 포인트이긴 하지만, 이 말에 격하게 동의한 사람이 또 한 사람 있습니다. 바로 저의 최애 작가 정희진 작가입니다.

책은 책으로 읽어야 한다. 번역본도 읽지 말라는 이들이 있는데 비현실적이어서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다. 원서의 어감은 다르기 때문이다. 언어는 그렇게 오만한 것이다. 쉽게 쾌락을 허용하지 않는다. 내가 드라마 <미생>에서 완전 감동받은 대사 “회계가 경영의 언어”이듯이, 회계는 회계대로 영상은 영상대로 활자는 활자대로 각자의 장치가 있다. 회계라는 언어의 전문성이 있고 따로 힘들게 공부해야 하듯이, 활자 역시 만만치가 않다. 활자는 단순 글자가 아니다. 다른 매체에는 없는 심오한 행간, 오식으로 인한 우연한 앎의 가능성, 투지(종이가 찢어지도록 뚫어지게 봄)가 책 내용을 만든다.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정희진

그렇습니다. 회계도 언어이고 힘들게 공부해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외국어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만 원어민이 아닌 이상 다른 언어로 외국어과 말을 하면 커뮤니케이션이 힘듭니다. 비재무 부서 사람들과 회의를 할 때 서로에게 외국어로 말할 때와 같은 언어 장벽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재무 언어를 비재무 언어로 번역해주는 파파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 듭니다. ‘회계가 경영의 언어이니 모두 회계를 배우세요.’ 말하기도 힘듭니다. 저도 굉장히 어렵게 공부했으니까요. 방법은 재무쟁이가 재무 언어를 통번역해서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재무쟁이는 번역가이자 통역가입니다.

숫자가 언어라는 사실을 인지하면 일상생활에서도 숫자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숫자로 커뮤니케이션한다는 것은 숫자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회사 밖의 삶에서도 숫자는 얼마든지 다양한 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오가와 요코’가 쓴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인 수학 박사는 숫자를 커뮤니케이션하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우애수’(한 수의 약수의 합이 상대수가 되는 두 수)를 통해서 주인공의 엄마와 커뮤니케이션합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에서 주인공은 완수(Perfect Number)를 통해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머니볼>에서 세이버메트릭스(Sabermetrics, 야구 통계학) 숫자는 메이저 리그 구단주와 저평가받는 선수들에게 승리로 가는 지름길과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축복의 언어였습니다.

재무쟁이들은 숫자로 커뮤니케이션하는 사람들입니다. 숫자로 경영실적을 알리고 숫자로 조직의 성과를 평가하고 숫자로 개별사업의 수익성을 평가하고 숫자를 제공함으로써 중요한 경영의사결정을 돕습니다. 앞서 말한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 숫자는 박사가 타인과 커뮤니케이션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숫자밖에 모르는 박사가 숫자로 커뮤니케이션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감동적이기도 하고, 회사에서 숫자로 타인과 커뮤니케이션하려고 하는 우리 재무쟁이들을 떠올리게 하기도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다모다란 교수는 특정 회사에 대한 자신의 스토리, 가치평가의 방법론과 결과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고 모두에게 공유하면서 커뮤니케이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모다란 교수의 블로그에 자신이 생각하는 회사의 스토리와 가치에 대한 생각을 펼칩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내용은 의견이 다른 사람이 올리는 글일 것입니다. 우버의 가치평가에 대해서 우버의 내부 직원과 벌인 논쟁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었습니다.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은 기업가치평가의 완결성에 일조합니다. 나를 발전시킬 뿐 아니라 사회적인 자아를 성숙시킵니다. 개인주의자의 대표적인 주자라고 할 수 있는 소설가들도 가장 행복한 순간이 소설을 쓸 때이고, 그다음이 독자들이 내 소설에 대해서 평을 해줄 때라고 합니다. 독자가 자신이 전혀 생각하지 않은 방향으로 내 소설을 해석할 때 느끼는 재미도 쏠쏠하다고 합니다.

재무업무를 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작가와 독자가 되어 줄 수 있습니다. 저는 재무업무 중에서도 투자에 관한 업무를 많이 했고, 수많은 스토리를 만나는 행운을 가졌습니다. 회사 규모면에서 막 시작한 스타트업 기업부터 수십조 매출의 거대기업까지 다양했고 사업 분야도 전통사업에서 최근의 AI, 빅데이터, 블록체인까지 아울렀습니다. 이 각양각색의 회사에 투자할지 말지 결정하는 미팅을 저는 즐깁니다. 수많은 다양한 사람과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투자 아이디어를 이야기할 때에는 제가 작가가 되고 다른 사람의 투자 아이디어를 들을 때는 제가 독자가 됩니다. 제가 읽은 수많은 기업 스토리와 나와 커뮤니케이션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저를 지금까지 회사 밥을 먹게 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재무쟁이가 스토리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시장이 변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시장이 ‘가치평가’가 아니라 ‘스토리’를 사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그런 현상은 더욱더 심해진 것 같습니다. 이익을 낼 수 있는 회사가 이익을 포기하고 더 큰 스토리를 쓰면서 더 많은 투자를 하기 시작했고 주주들은 그것을 용인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토리를 말하고, 듣고, 이해하는 능력이 중요해졌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재무쟁이도 많은 스토리를 읽어야 하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회계가 경영의 언어라고 믿는다면 회계라는 언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내러티브도 같이 갖추면 더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재무쟁이들은 스토리를 읽고, 이해하고, 쓰고, 말하는 능력이 중요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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