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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우 Oct 11. 2021

재무와 기술

콩을 세는 남자

핀테크 시대 유감


바야흐로 ‘핀테크’ 시대가 되었습니다. 분야를 가르지 않고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디지털화는 금융이라고 봐주지 않습니다. 자신만의 영역이라면서 스스로 만든 울타리에서 기고만장했던 재무 전문가들이 경영하던 은행, 카드사, 증권사, 보험사들이 속수무책으로 기술기반 회사들에게 당하고 있습니다.

요즘 규제와 거시 경제 악화로 주가가 다소 하락하긴 했지만, 카카오 뱅크가 대부분 금융지주사 시가총액보다 더 높은 금액으로 거래되었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재무 전문가들 역시 디지털로 인한 디커플링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고, 시장은 재무 전문가들보다 기술 전문가들을 더 믿기 시작했습니다. 비단 재무에 국한되어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최근 IT기술은 전문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전문가들이 틀렸다고 말을 합니다. 기술을 활용하면 전문가들이 말하는 것보다 더 편하고 좋은 세상이 온다고 협박을 합니다. 

은행에 가서 번호표를 받고 기다리던 시간의 지루함을 생각해보면 지금의 디지털화가 얼마나 큰 편의를 제공해주고 있는가 새삼 놀라게 됩니다. 디지털의 편리성을 경험한 고객들은 실질적 가치를 제공하지 않는 금융을 냉정하게 평가합니다. 재무쟁이들은 핀테크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해야 할까요?


은행 라떼 이야기


제가 대학교 다니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저는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가난한 자취생이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용돈을 얼마간 보내주셨지만 대학생활의 자유로움에 흠뻑 빠져있던 터라 항상 돈이 부족했습니다. 하루는 친구들과 밤새 당구를 치고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다음날 일어나 보니 저에게 돈이 한 푼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통장에 잔고는 말 그대로 ‘제로’였고 당장 밥을 사 먹을 돈이 없었습니다. 빈속으로 숙취에 시달리자니 죽을 맛이었습니다. 차마 부모님께 돈을 보내달라는 말을 할 염치가 없어서 이제 막 결혼한 새댁이었던 누이에게 생명 구조신호를 보냈습니다. 전화를 받은 누이는 고맙게도 정오쯤에 돈을 보내주겠다고 했습니다. 마침 토요일이었고 그때는 은행이 토요일에도 오전에는 영업을 했었습니다. 저는 정오에 맞추어서 은행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만해도 카드가 보편화되어있지 않았었고 출금신청서를 적어서 인감도장을 찍고 은행 직원에게 제출을 하고 현금을 받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정오가 되자 저는 순서를 기다려서 출금신청서에 만원이라고 기재하고 인감도장을 찍은 후 은행 여직원에게 제출했습니다. 

“통장에 잔고가 없는데요.”

은행 여직원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 웃음은 분명 '비웃음'이었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하고 머리를 긁적이면서 은행을 나왔습니다.

정오에 보낸다고 했던 누이의 말을 떠올리면서 '조금 늦나 보다.' 하고 스스로에게 위안을 한 뒤, 10분쯤 뒤에 다시 은행에 갔습니다. 다시 순서를 기다리고 출금신청서에 만원을 적고 인감도장을 찍고 다시 제출했습니다. 은행 직원은 예의 웃음을 다시 지으면서 통장잔고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두 번이나 무안을 당한 저는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이성의 반응에 민감한 20대 청년에게 여자 앞에서 무안당하는 일은 죽는 것보다 싫은 일이었습니다. 참지 못하고 공중전화 박스로 가서 누이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누이는 급한 일이 생겨서 못 보냈다면서 곧 보내주겠다고 했습니다.

은행 마감시간인 1시가 다가올수록 저는 초조해졌습니다. 누이가 1시 안에 돈을 보내지 못하면 꼼짝없이 숙취에 괴로워하면서 점심을 굶을 판이었습니다. 12시 40분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내서 순서를 기다리고 출금신청서를 작성하고 인감도장을 찍어서 다시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같았습니다. 서서히 누이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한번 전화를 하자 누이는 은행에 방금 도착했다고 말했습니다. 10분 후 12시 50분에 드디어 누이가 보낸 2만 원을 출금하는 것에 성공했고 뜨끈한 국물에 점심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누이와 그때 이야기를 하면서 포복절도합니다. 요즘 친구들에게는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그때를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의 금융은 정말 많이 발전했습니다.

2000년대 중반에 미국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입금을 하려고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n) 은행에 갔습니다. 입금 버튼을 누르면 돈을 투입하는 덮개가 열리는 한국의 현금인출기(ATM)의 입금 기능을 생각하고 있었던 저는 봉투에 돈을 넣어서 현금인출기에 넣으라는 직원의 안내를 받고 어리둥절했습니다. ‘봉투에 돈을 넣으면 어떻게 현금인출기가 인식하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옆 현금인출기를 보고 의문이 풀렸습니다. 고객이 돈을 봉투에 넣어서 현금인출기에 넣으면 직원이 뒤에서 봉투를 꺼내서 입금처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한국 은행의 선진성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재무쟁이의 자괴감


저의 20대와 30대 중반의 경험을 보면 우리나라 금융이 어마어마한 기술적 발전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술 발전뿐 아니라 금융 기법면에서도 이제 선진국 부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도한 금융의 발달로 겪었던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금융은 건전하게 잘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모바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핀테크의 발달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비금융 기술 전문회사에게 기회를 내주고 있는 것입니다. 기술기반 회사들이 페이 서비스, 인터넷 은행, 모바일 증권, 간편 보험 같은 우리가 이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나름 잘 발달해왔다고 생각했던 금융이 왜 지금까지 사용자 편의를 생각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곤 합니다. 금융권들도 나름 디지털 시대에 대응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눈이 높아진 사용자들의 기대치를 맞추기에는 역부족인 것 같습니다.

핀테크 기업의 창업자들이 재무쟁이들만큼 재무 지식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재무쟁이들이 회계학과 재무이론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때, 그들은 아마도 코딩을 공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시장에서 핀테크 기업을 평가하는 금액을 고려하면 금융권에서 일하는 어느 누구도 차변 대변도 모를 가능성이 높은 그들에 비해서 많은 돈을 벌지 못할 것입니다. 다른 기술 기반 벤처들이 잘 나가는 것은 재무쟁이들의 속을 덜 긁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금융분야에서 기술로 치고 들어와서 돈을 버는 엔지니어들을 보는 기분은 썩 좋지 않습니다. 내 분야에서 나보다 지식이 덜한 이가 내 분야에서 더 많은 돈을 벌고 있다는 자괴감일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공부를 했고 무엇을 위해 일했는가? 대부분의 재무 전문가는 사실 돈을 보고 직업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내 분야에서 나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버는 다른 직종의 사람을 바라보는 느낌은 괴이합니다. ‘기술을 배우라’는 어른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재무를 공부한 죄라고 해야 할까요? 과거에 모든 분야에서 ‘외국어+자기 전공’이 대세였다면 앞으로 외국어는 인공지능이 해결해 줄 것이고 ‘코딩 언어+자기 전공’이 대세가 되는 시대가 오는 것일까요? 

AI 트레이딩 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해서 증권사에 입성하는 것처럼 기술회사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이 금융권으로 들어가는 사례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애널리스트와 펀드 매니저들을 바보로 만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회사에서 세무업무를 하시는 저희 회사 상무님이 파이선(Python)을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세무조정업무를 AI로 할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회사에서도 재무쟁이에게 코딩 업무는 필수가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기술의 편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데이터 법을 개정함으로써 금융정보가 쉽게 기술업체에게 흘러들어 가도록 허용해주었습니다. ‘나의 모든 것이 공개되는 세상에 금융정보라고 다를 수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가장 사적이고 중요한 정보에 대한 재량권이 저에게 없다는 사실은 뭔가 허전합니다. 핀테크는 재무쟁이들에게 직업의 자괴감과 함께 프라이버시의 자괴감까지 함께 주고 있습니다. 늘어나는 자괴감을 다스리기 위해 마음속으로 다시 되뇝니다.

‘변하지 않는 진실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이다.’


재무의 위기


제가 대학에 들어갈 때만 해도 재무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경영학과에서 가르치는 여러 과목 중에서 재무와 회계의 인기가 가장 많았습니다. 지금도 학교에서의 인기는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회사에서 제가 느끼는 체감온도는 제가 회사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와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첫째는 회사 경영의 변화입니다. 예전 경영 방식은 대한민국 사회 정치와 마찬가지로 탑다운(Top-Down) 경영방식이었습니다. 삼성이 대표적입니다. 삼성 구조본의 핵심은 재무였습니다. 이제 시대가 변화하여 모두가 바텀업(Bottom-up) 경영을 선호합니다. 실리콘 밸리 기업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국내에서는 네이버 카카오 같은 빅 테크 회사들의 경영방식이 기존 기업의 경영방식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런 현상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고 바람직합니다. 회사의 근본적 경쟁력은 결국에는 현장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기술이 경영을 지배하는 풍토입니다. 엔지니어가 경영을 담당하는 추세가 지속됨에 따라서 재무를 전공한 사람 소위 재무통이 CEO가 되는 비율이 갈수록 적어지는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월스트리트로 가는 인재는 줄고 실리콘 밸리로 가는 인재가 늘어가는 추세라고 합니다. 재무통을 꿈꾸면서 살아왔던 제게 이런 현상은 낯설고 아쉽습니다. 앞으로 재무의 역할은 기술의 발전을 위해 돈을 공급하는 역할에 그치고 말까요?


새로운 재무의 역할


디지털과 플랫폼이 대세인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재무쟁이의 관점에서 보면, 경제적 가치로 환원이 될지 불확실한 서비스와 사업에 투자의사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디지털과 플랫폼 시대에서 서비스와 사업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은 대부분 재무쟁이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날카롭게 인식하고 남들은 생각하지 못하는 변화를 꿈꾸는 몽상가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 재무쟁이들은 그런 몽상가들과 협업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숫자는 물론이고 숫자 이외의 것을 볼 줄 아는 능력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죠. 

얼마 전 엘론 머스크가 미국의 MBA시스템이 미국 경제를 망치고 있다는 취지의 주장을 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MBA 학장들이 반발했음은 물론입니다. 재무를 공부한 저로서도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기는 했지만, 경영자들의 시선이 변화해야 한다는 취지로 이해하면 수긍이 가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아직도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재무이론은 2차 산업혁명 이후 제조업이 세상의 중심일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제 재무이론은 새로 창조되어야 합니다. 

먼저 재원배분의 원칙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투자수익률에 따라서 재원을 배분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가치에 대해서 정성적 평가(Valuation)를 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워런 버핏은 얼마 전 애플을 이해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고 무형자산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애플은 현재 버크셔 헤서웨이의 포트폴리오 중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주식입니다. 이제 재무쟁이는 숫자만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와 기술을 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기업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더 이상 모순적 인간으로 살아가지 않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과 플랫폼의 가치에 눈을 떠야 합니다. 모든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과 플랫폼에는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 가치는 정량적이지도 않고 재무적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과 플랫폼의 구축과 유지에는 무지막지한 돈이 소요됩니다. 그런 유형의 플랫폼에 투자할지 말지는 의사 결정해야 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고 있고 앞으로 더 그럴 것입니다. 앞으로 재무쟁이의 역할은 엑셀로 ‘사업의 가치’를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술과 몽상의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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