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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우 Oct 17. 2021

재무의 쓸모

콩을 세는 남자

재무의 개인적 쓸모


신이 저에게 “다시 태어나게 해 주면 회사를 또 다닐래?”라고 질문하면 “네!”라고 답을 하진 못할 것 같습니다. 인생에는 돈을 버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훨씬 많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아까 질문했던 그 신이 “다시 태어나서 회사를 다시 다녀야 한다면 재무 업무를 다시 할래?”라고 묻는다면 저는 자신 있게 “네!”라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정말 회사를 꼭 다녀야 한다는 전제하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MZ세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제가 일하는 회사의 재무실에 일하는 직원들의 이탈률이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직원들은 회사의 소위 주요 보직, 즉 회사의 주요 결정을 하더라도 일이 많은 조직은 회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힘들더라고 승진이 빠르기 때문에 그러한 보직을 선호했는데 젊은 직원들의 삶의 질과 소확행을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의 변화와 개인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야 움직이는 동기부여를 느끼는 방식의 변화 때문입니다.  

이전 장들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회사에는 재무 업무와 관련된 수많은 갈등이 일어나지만, 회사 입장에서 재무 업무의 중요성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현대 기업의 경영진은 숫자에 근거해서 전략을 만들고 전략이 숫자적 결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특히 회계에서는 컴플라이언스(Compliance)와 규제가 심해지고 있고, IR에서는 스튜어드십(Stewardship)과 같은 투자가를 보호하는 각종 제도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또한 대한민국의 경제의 성장률이 둔화되면서 투자의 효율성은 갈수록 큰 이슈가 되고 있어서 재무업무의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회사 차원에서 재무의 중요성을 다루는 책들은 차고 넘치니 이 글에서는 상세하게 다루지 않고, 제가 생각하는 재무의 ‘개인적 쓸모’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회사를 통해 세상을 보는 도구 

회사는 세상을 비추는 작은 창입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세상은 회사라는 단위로 돌아가고, 재무는 회사의 수많은 업무 중에서 세상의 작은 창인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체적으로 보기에 가장 좋은 업무입니다. 당신이 회계나 예산업무를 담당한다면 회사 내에서 어떤 사업이 잘되고 어떤 사업이 안되고 있는지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산업이 부상하고 있는지 어떤 산업이 쇄락하고 있는지 알면 세상이 보입니다. 벤처투자를 심의하면 어떤 신기술이 나왔고 어떤 분야의 신사업들이 부각되고 있는지 보입니다. 당신이 IR업무를 하고 있다면 시장의 관심이 어디로 쏠리고 있는지 알게 되고 앞으로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시장의 투자자나 애널리스트로부터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기도 합니다. 당신이 자금 업무를 하고 있다면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을 세심하게 들여다볼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관심의 대상은 거시경제가 됩니다. 

물론 이 모든 분야를 아울러서 자신의 인사이트로 키우고, 세상을 자신만의 눈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의 공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능력들을 조화롭게 발달시킨다면 재무쟁이는 누구보다 회사에서 많은 것을 얻어갈 것이며 그 능력은 가치를 측정하기 힘들 것입니다.


합리적인 보수주의자

사람들은 많은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의외로 많은 경영자들이 개인적인 편견 때문에 잘못된 경영판단을 내립니다. 재무쟁이들의 가장 큰 역할 중 하나는 데이터에 기반한 객관적인 정보와 분석을 통해 경영진이 위험한 판단을 하지 않고 회사가 안정적으로 운영되도록 비판이나 제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재무업무를 하는 사람은 보수적이고 리스크를 싫어합니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조언을 하지만, <재무의 역사> 장에서 봤듯이 경영자들에게 계륵의 취급을 받으며 보수적이라는 비판을 받습니다. 

진화론적으로 보수적인 사람은 생존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진화학자들은 불안이 인류의 생존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말합니다. 조심하면 죽지 않습니다.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라는 말이 있습니다. 스톡데일(James Bond Stockdale)은 베트남 전쟁 때 동료들과 포로로 잡혀 있었는데 포로 생활 중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며 대비한 그는 살아남은 반면, 대비 없이 그저 상황을 낙관만 한 동료들은 계속되는 상심을 못 이겨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보수적 삶의 태도가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재무쟁이들은 진화론적으로도 우월한 종족이고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만 없다면 장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재무쟁이의 위장 취업, 재테크

개인적 성향과 운이 재테크 성공 여부에 영향을 미치지만, 재무쟁이들이 성공적 재테크를 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가의 일>이라는 책을 보다가 재미있는 표현을 발견했습니다. 

'모든 취업은 위장취업이다.'

김연수 작가는 전업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생계의 불확실성 때문에 잡지사에 취직해서 글을 썼습니다. 새벽같이 회사에 나와서 소설을 썼는데 그 모습을 본 사장님이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해서 승진도 빨리 시켜줬다고 합니다. 

재무쟁이가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위장 취업은 재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세상을 자신만의 눈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활용해서 재테크를 하는 것입니다. 업무에 지장을 줄 정도로 재테크에 몰입하거나 회사의 내부 정보를 이용하는 것은 곤란하지만, 회사에서 획득한 경험과 인사이트를 활용해서 재테크를 하는 것은 개인뿐 아니라 회사를 위해서도 권장할 만한 일입니다. 김연수 작가가 잡지사 사장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듯이 재테크를 하다가 발견한 아이디어를 회사 업무에 적용하여 회사에서 인정을 받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진정한 재무쟁이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일의 의미는 자신이 부여하는 것

제가 아무리 재무 업무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도 삶의 의미는 자신이 부여하듯이, 재무의 의미도 재무쟁이 자신이 부여하는 것입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재무는 돈을 다루는 건조한 일이지만 인문적 요소가 없이는 일을 잘할 수도 없고 일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가즈오 이나모리'는 <왜 일하는가>라는 책에서 일의 장인정신을 이야기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장인까지는 되지 못하더라고 자신의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일을 통해서 나를 알고, 나와 세계의 관계를 규정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죽음으로 가는 매 순간을 살고 있고 그 많은 순간을 회사라는 공간에서 보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회사에서 목숨을 내주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시간의 의미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라는 ‘빅터 프랭클린’의 말처럼 내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회사 생활이 예술이 되느냐, 노동이 되느냐는 우리가 자신의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재무를 예술로 만들자 

스티브 잡스는 맥북을 개발할 때 맥북의 부품에 개발자들이 사인을 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컴퓨터를 해체하지 않는 한 아무도 볼 일이 없는 부품에 개발자들이 사인을 하게 함으로써 스티브 잡스가 의도한 것은 명백했습니다. 개발자들을 예술가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화가가 자신의 그림에 사인을 하듯이 자신이 만든 부품에 사인을 함으로써 맥북은 예술품이 되었고 개발자들은 예술가가 되었습니다. 

저도 회사 업무가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어 이제 대중 앞에 나서지 않는 양현석이 오디션 경연 프로그램에서 했던 말 중에서 제가 가장 공감했던 말이 ‘예술이란 뻔한 것을 뻔하지 않게 표현하는 것’이라는 멘트였습니다. 재무 업무는 업무의 스케줄이 뻔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월별/분기별로 실적 집계 및 분석을 하고 매 분기 실적 발표 및 로드쇼를 하고 연말에는 회계감사를 받고 3월에는 주주총회를 합니다 매년 비슷한 리듬으로 비슷한 업무가 이어집니다. 뻔한 재무 업무를 다르게 해 보려는 시도 속에서 예술의 감각은 피어납니다. 반복적이고 지루한 일이 예술이 되려면 일단 일이 손에 익어서 능숙해야 하고 다른 각도로 일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하루하루 닥친 일을 해치우는 데에 정신이 팔리면 일의 예술적 면을 발견하기 힘들죠. 

저의 경우 투자의사 결정을 하는 순간 개개인이 판단하는 것을 볼 때, 재무 업무가 예술이 되는 순간을 느낍니다. 사람마다 아름다움을 보는 눈이 다르듯이, 같은 재무쟁이지만 투자 의사 결정을 할 때 좋아하는 사업이나 회사가 다릅니다. 그 취향은 철저하게 그 사람이 무엇을 공부했느냐, 어떤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쌓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술가와 똑같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실패한다고 했던 사업에서 성공의 실마리를 보고 투자 결정을 해서 성공을 한다면 그는 예술행위를 한 것입니다. 사업이나 회사를 보는 자신만의 관점이 생긴 것이니까요. 모든 예술 작품이 성공하는 것이 아니듯이 투자 결과가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재무업무가 예술행위가 되려면 자신만의 관점이 생겨야 합니다. 하나의 사업을 분석하고 자신만의 관점을 세울 수 있다면 다른 사업을 분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짧아지고, 이른바 ‘전이 학습’이 가능해집니다. 예술의 범위가 확대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술가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공유

예술가들이 하는 일이란 결국 자신의 세계관을 정립하고 그것을 표현함으로써 대중과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입니다.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작업실에 혹은 노트북에 쌓아만 놓고 있으면 예술이 될 수 없듯이 자신의 일에서 예술의 가치를 만들어 낸 사람은 그것을 타인과 공유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예술작품이 됩니다. 재무업무를 예술로 만들었으면 그것을 표현하고 커뮤니케이션해야 합니다. 제가 <숫자, 스토리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에서 말하고자 했던 내용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에는 에반겔리스트(Evangelist)라는 타이틀이 있다고 합니다. ‘특정 기술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플랫폼, 제품, 서비스의 가치를 전달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합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한 사내 공유 문화가 마이크로소프트의 턴어라운드를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재무 분야에도 재무 에반겔리스트(Financial Evangelist)라는 직무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재무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자신이 분석한 재무적 숫자로 스토리를 만들어 회사의 가치를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많은 재무쟁이들이 재무 에반겔리스트(Financial Evangelist)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꿈을 꿨으면 좋겠습니다. 일반인들에게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지는 재무업무의 저변을 넓힐 뿐 아니라 재무쟁이를 진정한 예술가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글을 마치며…


‘재무 업무가 돈벌이 이외에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을 시작하게 한 물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물음에 대한 제 나름의 답변을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김우중의 책을 가슴에 품고 집으로 뛰어가던 어린 시절의 설렘은 없어진 지 오래고, 매 순간 일이 미치도록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지루하지 않게 차근차근 무언가를 알아가고 쌓아왔다는 느낌은 있습니다. 

재무는 경제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어주었고, 재테크에도 약간의 도움을 주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저에게 맞는 재무업무를 찾아가면서 저를 조금 더 알게 되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도구와 척도가 되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떤 경제적 원리로 돌아가는가, 인간의 욕망은 어떻게 숫자에 반영되는가, 그러한 인간의 욕망은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가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었습니다. 급격한 변화 속에서 인간의 욕망이 자아낸 위기와 그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대응을 보았습니다. 회사의 숫자에 나타나는 수많은 투쟁과 창의와 혁신과 욕망과 노력의 결과물들을 보면서 인간, 특히 경제적 활동을 하는 인간들의 속성에 대해서 이해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일한 대부분의 회사가 IT회사였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직접 볼 수 있었고, 그 결과들이 숫자로 표현되는 것을 보고 때로는 경이로움을 느꼈고 때로는 인간의 욕심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일하는 중에 창의적인 사람들 만나는 일은 언제가 즐거웠습니다. 창의적인 소설가를 만나는 일처럼 어떤 분야에서든 똑똑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해보려는 사람들,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돌려서 남들이 갖지 못한 통찰을 제시해 주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큰 선물과 같았습니다.

회사에서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직장인들이 회사 업무를 통해서 자아를 실현하지 못하고 뭔가 자신의 인생이 도움 될 수 있는 것을 알아가지 못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에 말씀드렸지만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는 자기 자신이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재무업무를 하고 있거나 꿈꾸고 있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임과 동시에 제 자신에게도 하는 이야기입니다. 제 일을 즐기고 일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고민의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고민의 과정에서 스티브 잡스가 아무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기술과 인문학을 접목시켰듯이 재무와 인문학을 접목시켜 재무의 의미를 찾아보려 노력했습니다. 물론 이 과정은 현재 진행형이고 제가 재무 업무를 그만두는 날까지 그러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남은 회사 생활 동안 재무업무를 하겠지만 이 책에서 말한 대로 그것은 정량적인 것보다는 정성적인 요소들이 더 가미된 형태가 될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이해와 커뮤니케이션과 스토리가 더 강조된 형태의 재무이기를 희망합니다. 결국 재무도 사람들의 활동의 결과물이고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잘 돼야 재무쟁이가 원하는 일들이 회사에서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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