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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연결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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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우 Mar 26. 2022

[소설] 연결 5

제안

꿈속에서 만났던 남자를 현실에서 만난다는 것은 기괴한 일이었다. 그것도 피를 콸콸 흘리면서 쓰러져 죽어가던 남자였다. 꿈속 모습과 달리 그의 얼굴에는 세상의 두려움이 들어설 공간이 없어 보였고, 움직임 하나하나에 빈틈이 없었다.

“그날 프레젠테이션은 인상적이었습니다.”

만나자마자 ‘안녕하세요.’나 ‘또 만나서 반갑습니다.’ 같은 일상적인 인사도 없이 그가 던진 말이었다. 성과 없이 끝나버렸지만 한 달 넘게 밤새며 열심히 준비했던 프레젠테이션이 이 남자가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일 리 없다.

“감사합니다.”

비일상적인 인사에 내가 던진 일상적 답변이었다.

그가 나에게 만나자는 문자를 보낸 것은 며칠 전이었다. 아직 협상 중인 거래 상대방을 회사에 알리지도 않고 혼자 만나는 것은 꺼림칙했지만 일과 별개로 왜 이 남자가 자꾸 내 꿈속에 나오는지 알고 싶었다.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면 알게 되겠지 라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그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 사이버 수사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을 만큼 유명한 해커였고, 대학교 때 철이 들어 더 이상 범죄행위를 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블로그에서 자신의 개발 노하우를 공유하면서 파워블로거가 되었다고 했다. 멀쩡하게 박사과정에서 공부 잘하고 있는 친구 박찬영을 꼬셔 유비쿼터스를 창업했는데 찬영과 직원들에게 죄를 짓고 있는 기분이라고 했다. 월급을 못줘서 출근을 안 하는 직원들의 집에 찾아가서 현금 대신 주식을 주겠다고 통사정하며 겨우 회사에 출근시킨 적도 있고, 대출 연장이 안된다는 은행의 말단 대리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빌어서 겨우 대출 연장 허락을 받아냈으며, 수십 번의 IR끝에 처음 벤처캐피털로부터 투자를 받았을 때 너무 기뻐서 술을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시다가 길에 넘어져 팔이 부러진 적도 있다고 했다.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그의 모습은 패싸움에서 막 승리하고 돌아온 일진 같기도 했고 이제 막 꿈을 꾸기 시작한 소년 같기도 했다.

“다른 선택지도 많았을 텐데 왜 고생스럽게 창업을 선택했나요?”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고 다른 사람들이 소통하게 도와주는 것이 유비쿼터스와 저의 목표입니다.”

한참 침대에서 늘어져 자고 있어야 할 황금 같은 주말 오전이었지만 그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하는 소설의 도입부 같았고 나는 서서히 그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우리의 대화를 방해한 것은 그의 아이폰이었다. 대화가 잠시라도 끊기는 순간에 그는 여지없이 테이블에 놓여있던 아이폰을 들었다. 그의 폰에는 확인하지 않은 톡, 문자, 메일과 받지 않은 통화들의 숫자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빨리 답변하라고 아우성치는 스마트폰 너머의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대화 중간중간에 그 숫자들을 지워나갔지만, 짧은 순간에 감당하기에 너무 많은 숫자였다. 숫자를 지워가는 그의 모습은 다급하고 불안해 보였다. 그의 이야기는 흥미로웠지만 그를 보면 볼수록 이 남자가 왜 내 꿈에 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나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공식적인 회의에서 딱 한번 만났을 뿐인데 왜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그가 말했다.

“오늘 뵙자고 한 것은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소년같이 맑던 눈빛은 잿빛으로 변해있었다. 갑작스러운 분위기 전환에 약간 당황했지만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그의 본론을 기다렸다.

”이번 거래와 관련된 대형그룹의 내부 진행 사항을 저에게 알려주십시오.”

나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잿빛으로 변한 그의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 역시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내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대형그룹에 위장취업했다지만 이 남자는 나를 대놓고 이용하려 하고 있었다. 이 남자는 어떻게 나를 믿고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내가 그렇고 그런 사람으로 보였나? 그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는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이런 사람이 왜 내 꿈에 나왔는지 궁금해했던 내 자신이 한심했다. 아니 이 남자가 내 꿈속에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수치스러웠다. 나는 뜨거워진 뺨을 손등으로 식히면서 아무런 대답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는 자리에 앉은 채 내 뒷모습을 올려보고 있을 것이다. 남자도 수치심을 느끼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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