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국 향기에 취해 / 그리운 청운아파트

삶의 단상

by 가야

꽃을 보면서 슬픔을 느낀다면 여러분은 믿으시겠어요.

저는 이 꽃을 보면 무언지 모르게 애잔한 슬픔을 느끼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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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작고 앙증맞기도 하지만 많은 꽃송이와 현기증이 날 정도의 진한 향기,

그 향기에 답례라도 하듯 쉴 새 없이 날아드는 벌과 나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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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우리나라 야산 어느 곳이나 지천으로 흐드러지게 피어 더욱더 서러운 꽃인 산국!


이 꽃 이름이 산국이란 것을 안 것도 근래의 일입니다.

그저 이름 모를 야생화로 기억하고 있었지요.


그러고 보면 국화의 종류가 참으로 많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의아하게 생각하실 겁니다.

왜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슬픈 생각이 들까 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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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마도 이 꽃과 관련이 있는 한 사람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은 헐리고 공원이 되었지만

오래전 그곳 종로구 청운동 자하문 터널 위에는 "청운아파트"라는 6층짜리 낡은, 서민 아파트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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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청운아파트


세월의 무게에 남루해지고 흉물스럽게 변했지만, 도시에서 볼 수 없는 시골의 정서가 가득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정이 가득한 곳이었지요.


언젠가 그곳을 한번 가본 뒤

내 뇌리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는 그곳으로 이사를 해야겠다는 작정을 한 것은 1995년 봄이었습니다.


당시 그곳은 재건축 문제로 어수선했고, 도심에서 보기 드물게 연탄을 때며, 내부에 화장실이 없는 탄광 사택과도 같은 특이한 아파트였던 지라 친척들이 그곳으로 이사를 반대했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은 들불처럼 내 가슴에 일어 저는 수소문 끝에 그곳으로 이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총 10동의 아파트가 있었는데 제가 이사를 한 곳은 8동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8동은 남산을 정면으로 마주한 청운아파트 10동 중에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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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평 아주 작은 집이었지만,

창을 열면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남산 타워와 일직선에서 서울을 굽어보는 재미란 참으로 각별했습니다.


또한, 인왕산이 인접해 있으니 어느 때나 산에 오르고 싶으면 마음 놓고 오를 수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청와대 인근이라 그곳의 특성상 치안이 철저해 오밤중이라도 무서움을 타지 않는다면 아무 걱정 없이 산에 오를 수가 있었습니다)


3동과 4동 사이의 울창한 숲길을 걸어가면 청운 약수터가 나옵니다.


봄이면 흐드러진 산벚꽃이 송이째 뚝뚝 떨어지고

초여름이면 마치 흰 눈이 날리듯 아카시아 꽃의 군무가 펼쳐지는


여름부터 초겨울까지 수없이 피고 지는 들꽃과 늦가을 노랗게 물든 산국 향기에 취해 그 작고 아름다운 길을 저는 틈이 날 때마다 걷고 또 걸었습니다.


이른 새벽 매일 아침 인왕산 정상에 올라 경복궁을 내려다보며 하루를 시작하곤 했었지요. 그 결과 어린 시절부터 잔병을 몸에 달고 살던 저는 건강을 덤으로 얻을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곳에서 정겨운 이웃을 살던 사람들은 뿔뿔이 그곳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재건축이 무산되고 서울시에서 그곳을 철거하여 시민공원으로 만들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명씩 부동산 업자들이 들락거렸습니다. 철거민들에게 지급되는 일명 딱지 (입주권)을 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딱지를 현금으로 교환한 사람들은 하나둘씩 그곳을 떠나갔고 그에 비례하듯 빈집도 차츰 늘어났습니다. 아쉬웠지만 준법정신이 투철한 저도 구청의 독촉에 그곳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쉽게 헐리지 않았고,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하고 보니 그곳이 너무나도 그립기만 했습니다.


2년이 다시 흘렀고 쉽게 철거될 것 같지 않은 생각에 저는 그곳으로 다시 작업실을 옮기는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당시 600여 세대 중 100여 세대가 서울시의 강제 이주정책에 반대하여 이사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이사를 한 곳은

1동 그곳은 전에 살던 8동과 달리 서울 시내는 볼 수 없었지만, 창을 열면 인왕산 자락과 웅장한 북악산이 선뜻 다가서 흡사 첩첩산중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시시때때로 꿩과 소쩍새가 우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1동 60가구 중 이사를 하고 남은 집은 나를 비롯해 6가구가 남았는데, 그중에는 이사할 형편은 충분했지만, 이주보상금에 불만인 2가구를 빼면 나머지 4가구는 형편이 어려워 이사할 엄두도 낼 수 없는 딱한 처지인 사람들이었습니다.


18살 처녀로 상처한 홀아비와 결혼을 해 전처의 아들을 자신보다 더 귀하게 키워 결혼까지 시켰지만, 남편이 죽자 발을 뚝 끊어버렸던 아들이 할머니 몫으로 남은 아파트 보상금은 물론 입주권까지 팔아버리고 연락을 끊어, 할머니는 그야말로 오도 갈 데가 없는 상태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철거반원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철거를 독려하고 할머니는 복도에 서서 오지 않는 아들을 하냥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가 너무 안타까워


“할머니 아드님 연락 안 왔어요?”


라고 물으면 곱디고운 얼굴 가득 슬픔 가득했던 그늘을 거두며 말하곤 했지요.


“우리 아들이 많이 바쁜가 봐요. 꼭 연락이 올 거예요. 얼마나 착한 아들인데….”


그 아들을 위해 일부러 자신의 아이를 낳지 않았다는 너무나 곱게 늙어 그것이 더욱 안타까운 할머니의 고운 눈가에 어리던 눈물!


그 모습이 너무나 딱해 청운동사무소와 구청 직원에게 할머니의 사정을 이야기하며 어떤 묘책이 없느냐고 물었지만, 그들의 대답은 “아드님이 아주 부자예요. 일산에 50평도 넘는 아파트에 살고 있어요. 저희도 돕고 싶지만, 그 방법이 없어요.”라는 대답뿐이었습니다.


그 옆집에 할아버지 한 분이 사셨습니다. 서울시 고위 공직자였던 할아버지의 화려했던 젊은 날이 무색하게 할아버지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계셨는데, 아이엠에프를 풍비박산된 막내 여동생이 홀로 된 오빠의 병간호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여동생의 말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종손으로 서울시청에 다닐 때 올케를 만나 결혼을 했는데, 올케가 아이가 낳지 못하자 집안 어른들이 헤어질 것을 종용하자 가족과 인연을 끊고 둘이서 살았는데, 몇 년 전 올케가 죽자 할아버지가 암에 걸리자 수소문해서 자신을 찾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마산 어딘가에서 꽤 큰 공장을 운영하며 떵떵거리며 살았는데, 아이엠에프로 부도가 나 빚쟁이를 피해 서울에 올라와 대학생인 아들딸과 뿔뿔이 헤어져 여인은 천호동 어딘가 지하 셋방에 산다고 했습니다.


예전 화려한 생활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있는 아름다운 그 부인은 틈만 나며 내 작업실에 찾아와 자신의 처지를 슬퍼했습니다.


"선생님 커피 한 잔 마셔도 될까요?"


커피 향이 좋아 아침마다 커피메이커에 커피를 내리며 사는 내가 그 여인은 너무나 부러웠었나 봅니다.


하지만,

내 작업실에 올 때마다 그 여인은 절대 빈손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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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두 손 가득 들꽃이 들려있었습니다.


"선생님 분위기와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아 꺾어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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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게 웃으며 내밀던 들꽃 다발!


(꽃은 자연 그대로 있어야 한다는 신념 때문에 내가 꽃을 절대로 꺾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지요) 여인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는 차마 싫다는 내색도 하지 못하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곤 했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내 작업실 창가엔 들꽃이 떠나지 않았고

시도 때도 없이 벌과 나비가 날아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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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여인이 선물한 꽃 중 가장 인상적인 꽃이 바로 이 산국입니다.

벌써 20년이 훌쩍 지난 아스라한 추억이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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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인의 오빠는 오래전 세상을 떠났고 곱디곱던 그 여인의 소식은 알 수 없지만 흐드러진 산국을 볼 때마다 수줍게 나를 향해 내밀던 들꽃 다발과 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던 그 할머니를 아마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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