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꽃이야기
《예원지》 속 조선의 꽃을 오늘의 언어로 불러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는
꽃을 기록했다.
그의 붓끝은 정원의 향기를 모아
한 권의 꽃책으로 엮었다.
이름하여 《예원지(藝畹志)》.
그 책엔 65가지 꽃과 식물이 실려 있다.
그들은 단지 ‘이름’이 아니라,
조선 사람들의 계절을 구성하고
성품을 말해주는
고요하고 단단한 언어였다.
봄을 깨우는 매화를 시작으로
복숭아, 살구, 자두, 앵두, 배꽃, 사과가
잎을 틔우고, 가지를 흔들고, 열매를 약속한다.
조금 뒤이어
모란, 해당화, 목단, 작약이
부귀와 품격의 기운으로 정원을 채운다.
조선의 정원은 꽃의 화려함보다
그 꽃이 지닌 의미와 철학에 주목했다.
백목련, 자목련, 배롱나무, 목서, 금목서…
향기와 색이 얌전할수록 오히려 윗자리를 내주었다.
치자나무의 향은 맑았고
남천은 붉은 열매로 겨울까지 정원을 지켰다.
느티나무, 홍매, 산수유는
마치 나무속에 사계절을 담은 듯했다.
꽃나무 아래엔
더 작고, 조용히 피는 꽃들이 있었다.
난초, 수선화, 백합, 창포, 나리꽃
그들은 고개를 숙이며 피었고
누군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옥잠화, 패랭이꽃, 용담, 봉선화, 나팔꽃, 접시꽃
계절은 그 이름만으로도
입 안에서 향기를 피워 올렸다.
여름이 무르익자
맨드라미, 천일홍, 금잔화, 달맞이꽃, 양귀비가
정원의 색을 바꾸었고,
범부채, 앵초, 원추리, 제비꽃은
길모퉁이 한쪽에서 계절을 정갈히 채워 넣었다.
맥문동, 한련, 숙근팬지, 괭이밥, 수국, 연꽃
그리고 연못 위에는
수면처럼 고요한 연꽃 한 송이가
사색을 태우며 피어나 있었다.
꽃이 없어도 향기는 있었다.
조선의 정원은 잎을 감상하는 식물도
그윽하게 이름을 불렀다.
함박꽃나무, 하명고, 석창포, 소국, 참나리
잎의 결, 줄기의 길이, 향의 무게까지도
그들은 기억하고 기록했다.
봄맞이꽃, 은방울꽃, 파초, 박하, 범의귀
눈으로 보기도 전에
향으로 먼저 도착하는 식물들.
애기범부채, 숙주나물, 수호초, 기생초, 택사, 취나물, 동의초
이름 속에 향과 철학이 담긴 식물들이
작은 꽃그늘 아래에서 조용히 피고 졌다.
《예원지》에 담긴 65가지 꽃과 식물의 이름을 따라 걷다 보면
한 권의 정원이 열린다.
그곳엔 계절이 있고, 사람의 성품이 있고,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조선의 눈이 있다.
지금 서울식물원 한편에서
그 꽃들이 다시 피어났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 마음속에서도
아마… 조용히 피어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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