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오빠는 항상 날 믿어줬지만, 여기서 간과된 한 가지가 있다. 내가 ADHD라는 점이다. 나는 상대방의 말이 예의상 하는 말인지, 빈 말인지, 거짓인지 정말 구분하지 못한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제발 사람들이 자폐처럼 생각하고 대해줬으면 좋겠다. 영국 오빠가 만일 그 사람과 내가 나눴던 카톡을 봤거나, 전화 녹음 파일이라도 들었더라면, 처음부터 완전히 다르게 말해줬을 수도 있다. 상대방은 너를 정말 스쳐 지나가는 사람으로 봤다고.
나는 그렇게 못 한다. 나는 조금이라도 불편한 사람이랑 한마디도 못 섞는다. (그래서 친한 친구 한 두명만 둘 수 있단 걸 알았다. 아주 조금이라도 불편한 걸 거리 유지하면서 친구, 지인 정도로 두는 걸 못 한다.) 그래서 상대방이 한마디라도 하면, 당연히 대화하고 싶으니까 한 말이라고 받아들인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나 같지 않다는 걸 아는데, 여전히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 자폐 아닌가. 나 성격장애 아닌가. 나 망상장애 아닌가. 했던 모든 것들은 결국 ADHD로 설명된다는 걸 안다.
나는 감정을 백배로 느끼는 사람이기 때문에, 상대방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었을 수 있다. 기억도 잘 안 날 수 있다. 차라리.. 정말 차라리 내가 ADHD가 있고, 쉽게 말해서 자폐와 비슷한 증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니, 그런 거라고 이해해서 너무 혐오스럽게 생각은 안 해줬으면 좋겠다. 작년 초에는 의사 선생님께 내가 너무 ADHD 가지고 변명을 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지 않냐 했더니, 정색하시며 그게 왜 변명이냐 이건 설명이다라고 하셨다. 그 설명이라도 하고 싶다. 너를 불편하게 했다면 미안해. 하지만 난 몰랐다. 그냥 계속 여자친구 있어서 어쩔 수 없구나 했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 니가 연애하고 싶어서 난리가 나더라도 나는 절대 아닐 수도 있단 걸 모르고.
의지는 정말 1000% 발동해서 살아왔어. 너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립다고, 그 냄새라도 맡으려고 영국이랑 창원 오가느라 전 재산을 탕진한 건 아니니까. 2년 내내 폐인처럼 살아온 건 아니니까. 어쩌다 너에게 연락을 취했던 건 정말 한계의 한계의 한계 때였어.
사실 냉정하게 보면, 그 사람은 내가 ADHD 특성 때문에 좋아하게 된 게 아닌 유일한 사람이다. 원래대로라면 전혀 안 어울리는 사람을 한두 달 좋아하고, 내가 왜 좋아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ADHD는 자극 추구가 남다르다. 남들에게 약한 자극에도, 나는 아주 강한 자극을 느낀다. 설렘, 기쁨 같은 감정도 백배로 느낀다. 짝사랑이든, 연애든, 전부 전혀 나랑 안 어울리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러니 한두 달 밖에 못 갔다. 그건 아무리 심리상담을 오래 받아도 고쳐질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절대 남자로 안 본다고 학을 뗐고... 진짜 자신 있었다. 그런데 스며 들었다. 난 자극 (예를 들어 잘생긴 사람)에 확확 불 타올라만 봤을 뿐, 스며 들어본 적이 없었다.
ADHD 특성은 어디 사라지지 않는다. 100가지 일에 쉽게 질리더라도, 1가지 일을 죽을 때까지 몰입하는 하이퍼포커스 성향을 지녔다. 그래서 이번 생엔 얘한테 목숨 건듯 살고 있다. 너무 안타깝다. 그 하이퍼포커스 성향은... 커리어일 때만 좋다. 제발 정신 좀 차려라. 그 성향 덕분에 남들은 영어 하나 겨우 할까말까 때 외국어 5개를 하고, 남들은 싱글 한두곡 내고 반응 없다고 음악 포기할 때 10년째 음악을 하고 있고, 그건 정말 훌륭하다. 잘못된 사람에게 하이퍼포커스 해서 지 팔자 지가 꼬고 있던 건 아니었나. 난 초등학교 때부터 내가 외국어와 음악을 잘한다는 걸 알았고, 그랬으니 몰입할 수 있었다. 재능 없는 분야에 쏟았으면 그것도 망하는 지름길이었을 것이다. 이 사람도 애초에 그 어떤 가망도 없던 사람은 아니었나. 죽었다 깨어나도 여자로 안 보이는 여자도 존재하니까.
그런데 거듭 말하지만, 그건 의지의 영역이 아니다. 내 뇌가 그렇다. 비 ADHD인은 정말 모른다. 두 다리가 멀쩡한 사람은, 두 다리 깁스한 사람에게 운동 조언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내가 의지가 없었다면, 진작 별별 중독에 다 걸렸을 것이다. 술, 담배, 커피 중에 하나도 안 하는 ADHD인은 없다는 말도 봤다. 술은 영국 가야 마셨고, 담배와 커피도 입에 안 대봤다. (커피도 커피우유만 마신다.)
ADHD여서 장점이 참 많지만, 제대로 된 인간관계, 돈벌이, 일상이 안 되는 장애적인 면을 볼 때면 참 많이 슬프다.
종종 사람들은 '좋아하면 누구나 그렇지'라고 하지만, 아니다. 노래 19곡 쓰지 않는다. 이 정도까지 확신하지 않는다. 하기사 나는 유명한 가수가 될 거라는 확신도 있는데. 그건 몇몇 일반인들에게 말이 되나...
어제 저녁부터 또 뭘 씹지는 못하고, 두유만 잡수시고 있는데, 글을 쓰며 정신을 붙들고 있다. 장애적인 면 때문에 힘들면, 장점을 어떻게든 활성화시켜야 한다. 글이 끊임없이 낙서처럼 나오는 것도 ADHD 특성이다. 그런데 이러한 글을 통해 'ADHD들은 이런 어려움이 있구나'하고 한 사람이라도 알게 된다면 좋은 일 아닌가. 힘든 순간에도 생산적인 것이 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