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다

by 이가연

어제부터 정신과 약을 뒤적였다. 의사와 상의도 없이 그래도 되냐.. 한다면 그 걱정은 이해가 된다만, 설명을 다 듣고 받아온 것이기 때문에 필요할 때 먹으면 된다. '필요시'라고 써있다.

이런 일은 일 년에 몇 번 발생하지 않는다. 지금 매우 특수 상황이다. 평소에 서랍 깊숙이 낑겨져 뭐뭐 있는지도 기억에 가물가물했다.

오늘 밤은 어제와 다른 약을 먹었다. 어제 자려고 누우니, 너무 소리 내어 울어서 잘 수가 없었다. 눈 감으면 휴대폰이 없어서 자극이 없기 때문에 머릿 속이 난리가 나는 것이다. 하물며 ADHD는 머릿 속이.. 매우 산만하다. 미쳐 날뛴다. 흔히 ADHD 남자 아동들은 행동으로 산만하고, 여자는 머릿 속, 이 놈의 대가리가 산만하다고 한다. (여자는 티가 잘 안 나서 진단이 늦다. 겉으로 티가 안 난다고 정상인 게 아닌데.)

그래서 오늘은 약으로 기절시키기로 했다. 이제 40분이 지나면 나는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서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내려놓을 것이고, 불 끄고 1분 안에 잠에 들 것이다. 그럼 어제처럼 자려고 누웠는데 너무 울어서 못 자는 일은 안 생길 것이다.

그렇게 하면 된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정신과 약을 평생 먹어야하는 사람보다, 일시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 일시적으로 필요할 때 그때그때 약의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다.

약 생각도 못하고 버티는 사람이 한국에 너무 많을 거 같아서 항상 안타까움이 든다. 이... 의료 보험을 가진 나라에서... 미국도 아니고...

얼마나 아픈지 1부터 10까지 중에 말하라 할 때, 한국 분들 제발 본인이 느끼는 아픔보다 더 높은 숫자 말하라는 미국 한국인 의료진의 글도 본 적이 있다.

'남자 때문에 정신과 약 먹는 게 말이 돼?'
그건 정신과 문턱을 넘은지 11년 된 나도 드는 생각이다. 하지만 누구 때문에 고통을 느끼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당장 고통을 멈추는 것만 중요하다.

내가 약을 찾아 먹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서 기쁘다. 나는 양극성장애로 오진을 받고 약 부작용으로 15kg 넘게 쪘다가, 정신과에 다신 안 간다고 버틴 적이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을 버티다 지금 병원을 만나게 되었고, 이젠 살 찌는 부작용이 있는 약을 받을 일 없다.(ADHD가 양극성장애로 오진되는 경우는 흔하다.)

나랑 잘 맞는 병원을 만나 이렇게 필요할 때 도움 받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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