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하는 사랑

by 이가연

내가 잘못 판단했단 걸 2년 만에 깨달았다.

너무 오래 걸렸다.


그 사람은 내 바닥 근처도 본 적이 없다. 하물며 정신과에 대해 이야기해본 기억이 없다. 애초에 그런 주제로 잘 가지도 않은 거 같다. 고3 때 정신과에 가게 되었고, 약 부작용 때문에 15kg 쪄서 단약 했고 등등 얘기를 한 기억이 없다. (물론 기억이 안 나는 걸 수도 있다. 벌써 2년 몇 개월 전이니까)


나는 보통 사람과 자기 오픈 수준이 다르다. 이것도 다년간 심리 상담을 통해 아주 많이 나아진 것이다. 원래는 처음 보는 사람이 '마음에 들면' 못하는 말이 없었다. 브런치에 쓰는 모든 내용은, 보통 사람 같으면 얼굴 보고 못 하는 말들을 글로라도 쓸텐데, 나는 그렇지 않다. 마음에 든 사람이면 모든 걸 말하고 있는 게 ADHD다. 그게 내 표현이다. 하지만 나는 '마음에 든 사람'에게만 그러는 건데, 상대방은 부담스러워해버린다면? 심지어 그걸 전혀 눈치 채지도 못 한다면? 쉽게 예를 들겠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나오는 우영우처럼 고래 얘기 (한 가지 얘기)만 계속 하진 않는다. ADHD는 화제 전환 속도가 빠르다. 그런데 그게 적절한 상황인지, 상대방과 내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상대방이 정말 듣고 싶어하는지 전혀 가늠하지 못 하는 거 같다. 그냥 툭툭 튀어 나온다.


그럼 나는 '내가 이 정도 얘기까지 했는데' 라며 더 애착을 가지고, 상대방은 더 도망 간다. 그게 내 인간 관계 패턴이었다. 영국 오빠 한 명만 친구하겠다고 굳게 문을 걸어 잠그기 전까지.


난 그 사람에게 분노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내 분노는 영국 오빠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제어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다들 기름을 붓기만 했다. 그래서 한국인에 대한 편견이 똘똘 뭉쳐져왔다. 영국에서 5살 때부터 교육 받고 자란 오빠만 안 그러는 걸 봤으니까. 한국인들은 정신 건강에 눈을 뜨기 시작한지 너무 얼마 되지 않았고, 눈 뜬 사람도 많지 않다. 영국은 버스 기사, 카페 점원들도 웃으면서 일하고 맨날 lovely, darling 하는데, 한국은 그런 여유를 쥐뿔도 찾아볼 수 없다.


걔는 하물며 나에게, 자기가 감정 쓰레기통 아니라고 했다. 당연히 나는 매우 놀랐다. 이 생각은 예전에도 몇 번 했지만, 걔는 내가 ADHD인 걸 알았어도 달라질 게 없었다. 나에게 카톡창이 무슨 니 일기장이냐고 했다. 그런 말을 하던 사람은 절대, ADHD 여부를 미리 알았고 몰랐고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영국 오빠는 몰랐는데도 잘만 지냈기 때문이다. 카톡을 300개, 500개를 남겨도 편안했다. ADHD 진단으로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것이지, 원래 있던 어려움이 ADHD 진단으로 인해 이해가 되던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걔에게 마음을 못 멈췄던 이유는 명백하다. 가족이다. 가족은 내가 ADHD 진단을 받으니까, 그제서야 좀 이해를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지구 상에 한 명의 탓을 할 수 있다면, 그건 아빠 (1000% ADHD) 탓이 크다. 당연히 내 탓인 거 아는데, 한 명만 탓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에, 그 두 사람만 가진 공통점들이 있다. 대표적인 게 컨트롤링이다. 나를 자기 입맛대로 통제했는데, 그게 또 헛소리가 아닐 때가 많았다. 헛소리면 내가 화를 내고 없애버리는데, 어지간히 똑똑한 두 사람이었다. 사실 그건 가스라이팅 초기였을 수 있다.)


나는 내가 ADHD인 걸 몰라도, 나 있는 그대로를 독특하고 매력 있게 봐주는 사람을 원한다. 나는 강점도 세고, 약점도 세다. 그런 나를 알면 알수록 재미있게 생각해주는 사람을 원한다.


그건 친구 기준이다. 그래서 친구가 한 명이다.


사랑은 나라는 인간도 존재하는데, 나 같은 또래 남자도 반. 드. 시 지구 어딘가 존재한다. 영어도 편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호기심, 학구열, 사랑, 봉사, 열정 등 내적 특성이 똑같아야 한다.


그러려면 ADHD다. 나를 이해하려면, 그리고 나도 상대를 이해하려면, 뇌가 돌아가는 구조가 똑같아야 한다. 구조 자체라 다르면 이해에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똑같은 아픔도 100배로 느끼면, 비 ADHD인은 엄살 부린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겠나. 인간은 자기가 겪어보지 않으면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자해를 해본 사람들을 온전히 역지사지 할 수가 없다. 안 해봤으니까... 그냥 "정신과 약 안 좋은 거 아냐? 의지 약한 사람들 아냐?" 라고 하는 사람들보다는 좀 나은 수준이다...


그래서 내가 만드는 가족은, 그 상대방은 ADHD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될지 모르겠다"라고 하는 경우를 종종 봤다. 그래서 겪어본 아픔과 고통 수준이 비슷해야된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언변이 아주 좋거나. 그런데 언변이 좋은 사람들은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나랑 안 맞다. 만날 사람이 나밖에 없어야 된다. 이 모든 게 충족되려면 답은 똑같은 ADHD 밖에 없다. 나처럼 '사람 이제 싫어. 다 싫어' 하는데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고 딱! 둘이서만 붙어 다니는 그런 관계.


난 그 사람이 ADHD일 거라 짐작했다. 상담사도 ADHD는 ADHD끼리 끌린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 여부가 내게 중요하지 않다.


그는 가족과 같은 애착을 형성하고 그렇게 버린 게 얼마나 타지에서 나를 죽여놓았을지를 가늠할 능력이 있었다. 한국에 돌아갔다가 다시 영국에 와서 본인을 찾는단게 어떤 수준의 아픔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동안의 글, 노래, 영상 모두 모른다고 쳐도, 저 두 가지는 그도 알았다.


내 바닥의 근처도 본 적 없는 주제에 버렸던 애다. 내가 얼마나 남들이 쉽게 납득할 수 없는 ADHD 약점도 큰데. 그를 알던 당시에 난 영국에서 나름 잘 살던 시기였다.


상상해봤다. 걘 내가 지금 어제도 오늘도 양치하는 것도 까먹고, 샤워는 절대 못할 거 같고, 약 먹기 전까진 생리팬티도 불편하다고 그냥 흘리고 있었던 내가 이해가 될까?

내가 원하는 사랑을 할 수 없던 애였다.

나는 상대방이 그래도 이해 한다. 가족보다 더.


그는 나를 손절할 생각이 명확했는데, 난 파리에서 기념품도 사왔었다. 그건 내가 ADHD니까 그를 가르쳐서 될 부분이 아니다.

하물며 나에게 자기가 그렇게 티를 냈는데 니가 못 알아 들은 거라고 했다. 그건 내가 ADHD라는 걸 알고 그가 어찌 해서 될 부분이 아니다.


2년도 넘은 이야기다. 이게 2년을 넘게 끌도록 방치하는 것도 해선 안될 짓이었다. 메일을 보내든, 기프티콘을 보내든, 싫다고 말했어야 했다. 답을 안 하는 걸로 알아듣길 바랐다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내가 ADHD라는 걸 알고 그가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사귀게라도 됐다면, "ADHD는 말을 해줘야 안다고! 눈치로 알 수 있는 능력이 결여 되어있다고! 자폐랑 유사 증상이 있다고!"하고 내가 소리 지를 일이 안 생겼을까?


ADHD이기 때문에, 차갑게 식은 것 같은 이 느낌도 계속 왔다갔다할 거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 제대로 한 번이라도 냉정해지긴 한 것 같다.




난 ADHD가 있어서 당시에 너가 손절하려는 걸 눈치 채지 못 했고, 너가 손절하면서 했던 말들도 너가 여자친구가 있어서 그랬다고 2년 내내 믿었어. 새해 인사 답장을 해주니 나는 너가 마음이 열렸다고 믿었고, 그 이후로도 정말 하나하나 힘을 들여 고심하며 카톡을 보냈었어. 50일이 지나도록 차단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어. 내 마음이 너무 무거우니까, 니가 생각이 많아져서 오래 걸리나보다 했어. 차단을 알게 되고도, 너가 내 브런치를 못 봤구나, 아직도 여자친구가 있어서 그런가 보다 했어. 널 너무 믿었거든. 속은 여리고, 공감 능력이 너무 높아서 회피를 방어 기제로 쓰는 놈이라고. 그러니 제발 명확하게 말해주면 좋겠다. 자폐인 대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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