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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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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연 Nov 13. 2024

5. 알고 있으면

고등학생 시절 상상했던 대학생이 된 나는, 기타를 맨 채 친구들과 함께 강의실까지 걸어가고, 벚꽃이 쫙 핀 날 남자친구와 손 잡고 걷기도 하고, 동아리 축제 부스에선 따가운 햇살에 연신 부채질을 하며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런데 4학년 2학기, 현실 속 나는 친구라곤 여자는 김연지, 남자는 신찬성 둘 뿐이었다. 게다가 신찬성은 여자친구가 있어 자주 만나지도 않았으니 거의 온라인 친구나 다름없었다. 동아리 회장과 그저 친하게 지냈으면 학교 생활이 꿈꾸던 대로 즐거웠을 텐데 하필 첫눈에 반하여 그 마음을 끊고자 동아리도 나갔다. 마지막 학기만큼은 친구도 애인도 사귀고, 졸업 공연까지 완벽하게 해내려 했건만, 졸업 공연에 올릴만한 곡 한 곡을 완성했다는 것을 제외하곤 모든 것이 기대를 저버리는 듯했다.     


매번 연습 영상을 올리는 내 인스타와 다르게, 김현우의 인스타는 매일매일이 파티 같았다. 최근 일주일 사이만 해도 홍대, 대학로, 이태원, 강남 등 서울 핫플레이스는 죄다 발도장을 찍고 다니는 듯했다. 학교에서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던 이유가 학교에 잘 오지 않아서는 아닌가 싶었다. 


방금 올라온 김현우의 게시글은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카페에서 찍은 셀카 사진이었다. 바리스타 복장을 하고 있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알바하나?


김연지...?


그다음 사진을 넘겨보니 김연지와 김현우가 카페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이 나왔다. 아니, 새로 알바 시작했다는 데가 이 카페였어? 그것도 김현우랑 같이? 


게시글에 카페 이름은 언급되어있지 않았지만, 몇 년 전 동아리 사람들과 몇 번 가본 적이 있어 위치를 알고 있었다. 학교 바로 앞에 위치해서 학교 사람들이면 누구나 아는, 과제하기로도 유명한 카페였다.


언니 모해 ㅎㅎ

나 알바하는데 심심해. 


소름. 마침 연지에게서 카톡이 왔다. 심심하면 내가 갈까. 메시지를 보자마자 떠오른 생각이었다. 김현우도 같이 있으려나. 월요일 오후 2시면 사람이 없을 시간이기도 했다. 그 카페는 1시가 지나면 테이블에 사람이 한두 명 있을 정도로 한산했다. 갈까. 아니다. 신찬성에게 어제 다짐한 것이 있었다. 이건 끊어야 될 고리였다. 뭐 연지가 알바한다고 할 때마다 카페 가서 죽치고 앉아있을래?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가방을 챙겼다. 수업은 없지만 연습실 갈 시간이었다.



학교 앞 정문에 도착하니 횡단보도 건너로 연지, 그리고 아마도 김현우가 일하고 있을 카페가 보였다.


여기에 넘어가지 말자. 지금 가서 연지랑 현우 일하고 있으면 월요일마다 카페 오게 된다. 오늘은 내일 레슨 때문에 정말 연습해야 하잖아. 


다짐과는 달리 발걸음은 어느새 카페 문 앞까지 도착했다. ‘미시오’를 보고 미는데 이렇게 떨릴 일인가. 카페 문을 열고, 카운터로 가서, 메뉴판을 보기까지 나의 눈동자 움직임과 발걸음 하나하나가 신경 쓰였다. 마치 ‘메뉴판을 확인하시오.’‘카드를 꺼내시오.’와 같은 명령어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이 된 기분이었다.


“어머, 언니 왔네!”


사람인 척 자연스러워 보이려고 노력하는 로봇이 된 나의 주문은 다행히 연지가 받았다. 김현우는 안쪽에서 무얼 하는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실루엣만 보아도 김현우였다. 연지가 내미는 영수증을 받으랴, 어디 앉을지 자리를 확인하랴, 김현우 확인하고 입가에 번진 미소를 숨기랴 바빴다.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덧 나는 게시글 사진 속 두 주인공 앞에 앉아있었다. 현우와 연지 두 사람 알바가 끝나자, 근처 식당으로 같이 이동했다.


“근데 너는 사랑이랑 어떻게 아는 사이야? 과도 완전 다르고.” 

“그게 언니가 블로그에 타로 관련해서 글을 올린 거야. 거기에 내가 댓글 달아가지고 친해졌어.”

“오 신기하네..”

“니는 그럼 언니랑 어떻게 알게 됐는데?” 


니...? 연지는 나보다 두 살 어렸고, 김현우보다는 세 살이나 어렸다. 나는 말 놓는데도 시간이 걸렸는데.


“양아치냐. 니 것만 갖고 오냐.”

현우가 본인이 쓸 티슈와 가위를 들고 오자 연지가 말했다. 내가 신찬성에게 말하는 것보다도 더 편해 보였다.


“둘이 남매 같고 보기 좋네.”


내가 말하자 순간 현우와 연지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연지는 소주잔을 꽉 움켜쥐고 부들거리는 제스처를 취하며 내게 말했다.


“언니..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릴 해.”

“어후. 그건 진짜 아니다.”


김현우도 손사래를 치며 연지를 쳐다봤다.


“언니.. 이 새X는 진짜.”

연지가 한 술 더 떠서 말하자 이번엔 내가 움찔했다.


“아니 연지야.. 그래도 오빤데.. ”

“이 새X?”


하마터면 맥주를 뿜을 뻔했다. 당황하지 말아야지. 나에게 말 한마디 걸기 어렵게 소중한 사람이 누군가에겐 다를 수 있으니까.


연지가 옆에서 뭐라고 하든 김현우는 무심한 듯 말없이 고기를 뒤집고 있었다. 어미새가 주는 밥을 기다리는 아기새처럼 내내 보고만 있기 민망했다. 내가 집게를 달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김현우는 괜찮다며 가위로 고기를 자르기 시작했다.


“언니. 그냥 얘가 굽게 냅 둬.”


저걸 그냥 확.


“어후. 김연지. 정신 좀 차려봐.”

소주 두 병을 마셔도 멀쩡하다던 김연지는 소주 한 병에 완전히 취한 듯 비틀거렸다. 연지의 왼쪽엔 내가, 오른쪽엔 김현우가 서서 행여 넘어지지 않도록 붙잡았다.


“흐잉.. 엄마 아빠 같애..”

연지가 비틀거리며 귀엽게 쫑알였다.

“너 같은 딸 둔 적 없다..”

김현우가 귀찮다는 듯 낮게 읊조렸다. 어느덧 연지를 택시 태워 보내고, 김현우와 둘만 남았다. 그러다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다.


“엇. 오빠. 이거 우산 쓰고 가.”

“너 거 아냐? 어후 됐어. 너 쓰고 가.”

“아냐. 나 집 가까워. 그냥 가도 돼.”

“나도 여기 바로 앞이야. 괜찮아. 진짜 됐어.”

“내가 씌워줄게 그럼. 얼른 가자.”

“아니 진짜 괜찮은데.”


한참 실랑이 끝에 김현우에게 우산을 씌워주곤 걸었다.

“너 진짜 가. 나 여기 바로 앞이야. 들어가서 문자 남겨.”


김현우와 헤어지자 곧바로 신찬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나 무서워. 나 지금 현우오빠랑 헤어지고 집 가는 길인데.”

“니 어딘데.”

“여기? 몰라. 현우오빠 집 근처일걸? 진짜 가로등만 몇 개 있고 사람 한 명도 없고. 나 무서워.”

“얼른 조심히 들어가라.”

김현우를 데려다준답시고 겁도 없이 밤에 한적한 모르는 길로 들어왔다. 이때 바로 생각난 사람은 신찬성이었다.


통화는 집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서도 계속되었다.


“왜. 너의 김현우한테 연지가 막 대하니까 싫어?”

“아니... 그만 웃어라...”


비밀을 말했으면 이 정도 비웃음은 각오해야지. 전화 너머로 막 웃음소리가 들렸고 나도 같이 웃게 되었다.


“연지는 현우가 편한가 보네. 니는 안 편하고.”

“아 당연하지 나는...”

“니는 현우를 좋아하고, 연지는 안 좋아하고. 근데 현우는 너한테 관심 없고. 푸하하하.”

“그만 놀려라...”


그래도 신찬성과 같이 웃고 떠드니 속이 시원해졌다.     

“니 차라리 지금 현우가 여자친구 있는 게 낫다. 니 현우랑 성격부터 해서 하나도 안 맞아. 어차피 오래 못 가.”      

맞는 말이다. 김현우와 나는 너무나 다른 사람이다. 그는 인싸, 나는 아싸. 그는 여사친이 수두룩 빽빽이지만 나는 신찬성 한 명이다.      

“나 근데 연지 이제 안 만나려고.”

“걘 또 왜.”


하긴, 신찬성에게 다정함을 기대하면 안 되지.


“내가 기껏 동아리도 나갔는데. 그게 무슨 마음이었는데. 이렇게 연지랑 셋이서 만나고 나니까 이건 진짜 아닌 거 같아. 내가 계속 보고 싶어 지잖아.”

“이건 또 뭔 소리고.”

“아니... 내 말은.. 연지 얼굴 보면 김현우가 생각나고 그리고..”

“야 그게 손절한다는 거지. 니가 그렇게 손절하면 그럼 연지는 무슨 잘못인데.”

신찬성이 내 말을 끊으며 쏘아붙였다. 유일하게 이 이야길 털어놓을 수 있었던 사람이었으니, 신찬성의 한 마디 한 마디에도 감정이 요동쳤다.


“차라리 그냥 연지한테 말을 해라.”

“야.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연지가 알면 김현우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고. 니 진짜 나 학교 못 다니는 거 보고 싶나.”


“이미 현우가 알고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해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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