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환장하는 소리고만. 어차피 동아리도 나간 마당에 당분간 다시 얼굴 볼 일도 없었지만, 행여 조별과제로 인해 그 카페를 가서 마주치게 될 걸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야 니 설마. 니 설마 김현우한테 다 말한 건 아니겠지. 니 진짜 그러면 한강 물에 던져버린다.”
“됐고. 뭐 내가 꼭 말할 필요 있나.”
“티 나? 안 되는데... 아니 그럼 비가 그렇게 오는데 응, 그래 잘 가라. 하고 보내?”
나는 그저 비 오는 밤에 데려다주고 싶었을 뿐인데. 깊어지는 생각과 고민을 털어놓고자 신찬성에게 말한 것이었지만, 더욱 마음이 심란해졌다.
다음 날 아침, 아니나 다를까 연지에게서 먼저 전화가 왔다. 무사히 잘 도착했냐는 카톡에도 답장이 없던 연지였기에 얼른 전화를 받았다.
“언니...”
“너 어제 잘 들어갔어?”
“나.. 눈 뜨니까 침대였어.. 택시 탄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언니 택시비 미리 냈더라. 나는 그것도 모르고 막 계산하려고 했지 뭐야.”
“김연지.. 정신은 좀 차렸어?”
“아니. 나 정말 식당에서 나와서 어떻게 걸었는지 기억 안 나.”
“너... 너 진짜.. ”
나는 김현우 앞이라 술 한 모금 한 모금 넘기는 게 조심스러웠건만. 신나게 마신 연지가 부러우면서도 그렇게 필름이 끊겨서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근데 너는 현우 오빠랑 어떻게 그렇게 친해진 거야? 완전 편해 보이던데.”
“그게.. 우리는 출석체크를 두 번째 교시 때 하거든. 그 오빠가 언제 한 번 강의실 와서 두리번두리번 하더니 찾는 사람이 없나 봐. 그러더니 나보고 이따가 출석체크 종이에 사인할 때 자기 이름에도 해달라는 거야.”
“뭐야. 출튀네.”
“엉. 그러더니 이젠 그냥 카톡으로 시키더라?”
“양아치 맞네. 아니 근데 연지야... 너 어제 현우 오빠한테 양아치라고 한 7번쯤 말하더라.. 미친 새X라고도 한 5번 한 거 같은데.”
그때마다 내가 얼마나 심장이 떨어졌는 줄 아니. 나는 ‘오빠’라는 말도 정성 들여 빚어서 말하는데.
“푸하핫. 내가 그랬어? 아니 근데 양아치 맞아. 얼마 전에는 갑자기 나한테 '과제 좀' 이러더라고. 아니 자기가 수업을 안 들어왔으니까 모르지.”
그렇구나. 학교를 잘 안 오는구나. 앞으로 연습실 갈 때 괜히 긴장하고 캠퍼스 걷지 말아야겠다.
전날 숙취는 없었지만, 마음만은 전날 여파가 가득한 채 학교로 향했다. 햇볕 쨍쨍한 하늘과 다르게 ‘김현우 멀리하기’ 작전이 나날이 실패로 향하는 것 같아 머릿속엔 먹구름이 가득했다.
평소엔 체대 건물 한 번, 농구장 한 번, 스쳐 지나갈 때마다 괜히 발걸음이 느려졌다. 하지만 학교에 자주 오지 않는 것도 확인한 만큼, 전날 술을 마셨는데 벌써 학교에 왔을 리가 없다며 지나쳤다.
“엇”
김현우다. 코너를 돌자마자 갑자기 김현우가 나타났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친구 두 명과 빠르게 지나가느라 인사도 하지 못했다. 아니, 사실 할 수 있었다. 내가 그만 얼어버렸다. 사람이 얼면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하던 행동을 지속한다. 그저 빠르게 걷기만 했다. 적어도 웃으면서 아는 체를 할 수 있는 1초는 있었을 텐데. 바보다.
바로 신찬성과 카톡창을 켰다.
나 방금 김현우 봄 ㅠㅠ 어떡해 나 지금 완전 엉망인데 ㅜㅜ
니 원래 엉망임 ㅋ
풉. 웃겼으니 봐준다. 수업도 없는지 칼답이다.
아니 나 어제 술 마시고 오늘 지금 아침 11시 밖에 안 됐는데 왜 학교에 벌써 나온 거냐구 ㅠㅠ 진짜 믿을 수 없다 보통 때는 제발 마주쳐라~ 마주쳐라~ 고사를 지내도 안 마주치더니 ㅠㅠ
수업 있었나 보지 뭐.
내가 정말 오늘은 학교 가면 마주칠 수 있을까 맨날 타로 뽑고 학교 오잖아. 오늘은 딱 안 뽑고 나왔는데 마주치네!!!
인사는 했나.
아니 아니. 인사할 시간도 없었어. 그냥 친구들하고 쓰윽하고 지나갔어. 근데 친구들이랑 막 웃으면서 지나가는데 와...
니한테는 그저 빛
진짜 웃는 게. 아니 웃는 게 너무 이쁘다니까. 니가 웃을 때를 봐야 돼. 친구들하고 걸어가면서 환하게 웃는데 진짜. 하 진짜 나 녹아내릴 거 같음. 아 미치겠어.
야 그런 얘긴 좀 연지한테 해라.
왜. 그럴 수도 있지.
아니 쫌. 그런 말을 내가 왜 들어야 됨. 뭐 어쩌라고.
그냥 그렇다는 거지
아니 어쩌라고 나보고
그냥 좀 진정하라고 말하면 될 것이지. 한순간에 갑자기 마음이 얼어붙었다. 내가 신찬성에게 뭘 바랐던 것인가. 여자 애처럼 같이 호들갑이라도 떨어주길 바랐던가. 신찬성 말이 맞았다. 이런 얘기는 연지한테 해야 한다. 알면서도 제일 먼저 신찬성이 생각 나는 걸. 이 얘길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던가.
연지에게 속 시원히 말할까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연지는 일단 납득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얼마 전, 학교 캠퍼스 벤치에 앉아있다가 우연히 중국인 유학생 두 명이 대화하는 것을 들었다. 연지와 현우가 알바하는 카페에 가자는 얘기를 하기에 나도 모르게 듣게 되었다. 새로 온 알바생이 잘생겼다는 얘기였다. 한국 남자들은 원래 그렇게 잘생겼냐, 아니다 그 정도로 잘생긴 사람은 별로 못 봤다는 얘기를 하기에 나도 모르게 씩 웃었다.
어제 김현우가 자리에 없을 때 이 얘기를 했더니 연지는 “우웩. 받아들일 수 없어.”라며 진심으로 거부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이 언니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 또다시 “우웩” 할 모습이 그려졌다.
착잡한 마음 가득이고 다시금 피아노 연습실 문을 열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건반 앞에 앉자마자 안도감이 들었다. 김현우 앞도, 김연지 앞도 아닌,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다. 내 마음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공간. 온전히 담을 수 있는 노래.
언제쯤 널 마주하고 웃을 수 있을까.
니가 없는 난 여기서 그저 슬프기만 해.
오늘도 10분 만에 마음에 쏙 드는 1절이 완성되었다. 김현우에게 직접 하지 못하는 말이 너무나 많았기에, 지금의 나에게 멜로디와 가사를 만들어내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차마 말 한마디 못하고 지나친 것이 아쉬워서, 다음번 마주쳤을 땐 인사라도 할 수 있길 바라는 염원이 담긴 곡이었다.
“연지야 지금부터 내가 아주 충격적인 얘기를 할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연지의 토끼 같은 두 눈동자가 나를 쳐다봤다. 이런 충격적인 이야기일 줄 꿈에도 모르겠지. 조금이라도 취하면 도움이 될까 싶어 맥주를 들이켜고 들이켰다. 그리고는 한 호흡에 속사포로 그동안 있었던 일을 뱉었다.
“그 김현우? 내가 아는 그 김현우? 어? 아니 잠깐만. 언니 잠깐만. 이건 아니야.”
“그래... 너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야. 그럴 수 있어...”
“아니 나한테 김현우는.. 여기 강냉이 같은 존재란 말야.”
연지가 테이블 위에 안주로 올려진 강냉이 그릇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강냉이가 눈앞에 있으니까 먹는 것이듯 그저 같은 수업을 듣길래 알바를 같이 하길래 대화하고 어울리는 사람이란 뜻이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연지는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는 눈치였다.
“아니 왜? 언니. 이건 아니야. 인정할 수 없어.”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 근데 이런 걸 어쩌겠니.”
“아니야. 받아들일 수 없어.”
"아니.. 잘생겼.."
"뭐??!"
연지가 손에 들고 있던 강냉이를 떨어트리며 말했다. 어후 놀래라. 그리곤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언니 정신 차려. 어디 안과 가봐야 되는 거 아냐?"
"아니.. 맞.. 맞잖아..?"
"대체 어디가.. “
연지는 아까보다 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연지의 눈빛이 마치 '언니가 지금 단단히 이상해진 게 분명해.'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내 뒤쪽에서 똑똑 창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연지가 아는 체를 한다. 설마.
김현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