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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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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연 Nov 13. 2024

7. 망했다

김현우가 왜 여길...


연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이걸 따라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문 앞에서 연지와 김현우가 잠시 이야기하더니 연지가 자리로 돌아왔다.


“언니. 쟤 신분증을 안 가져와서 못 들어온대.”

“뭐?”

“웅. 인사라도 하게 잠깐 나와봥.”


정신도 차릴 새도 없이 문 밖을 나서니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얼씨구 김현우 얼굴 본다고 코트도 안 챙기고 밖으로 헐레벌떡 나왔다. 절로 팔짱을 끼고 몸을 웅크리게 되었다. 한 발짝 한 발짝 두 사람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까르르 웃는 연지와 조용히 담배만 피우고 있는 김현우, 그리고 그 사이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내가 있었다.


“춥다. 얼른 들어가.”

김현우가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은 채 그저 담배만 피우며 말했다. 연지는 계속 김현우와 대화하며 뭐가 그렇게 좋은지 깔깔 웃었다. 나는 추위가 내 입에 지퍼라도 잠근 듯, 아니면 술 마시고 취해서 말실수라도 할까 봐 입을 닫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눈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김현우를 보냈다.


“아니... 쟤 스물여섯 살이잖아. 신분증이 왜 필요한데.. 아니 쟤가 아니라 저 오빠.. 여기 술집 마음에 안 들어..”

“푸하핫 언니 취했어?”

연지가 아주 흥미롭다는 듯이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런 연지에게 보란 듯이 메뉴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 이거 마실 거야.”

“이 언니 취했네.”


주문하러 자리에서 일어서며 살짝 비틀거림이 느껴졌다. 하필 신분증 검사를 하기 쉬운 금요일 밤에 연지와 술을 마시러 나와가지고. 목요일이었어도 괜찮았을 텐데.


곧이어 샷 두 잔을 양손에 야무지게 들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언니 그거 다 마시게? 진심?”

“아니 이거 두 잔 시키면 이 가격이래잖아.”

“미치겠다.”

연지가 또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체 김현우가 뭐길래.”

연지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읊조리자, 나는 강냉이가 든 그릇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한텐 이 강냉이일지 몰라도... 나한테는...”


“언니한테는 뭔데.”

연지가 간신히 웃음을 참는 표정으로 흥미진진하게 쳐다본다.


“너.. 너 그 눈동자 뭐야. 아주 반짝반짝. 너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재밌지?”

“어. 너무 재밌어. 언니 이런 모습 처음이야.”


연지가 기다렸다는 듯이 웃는다. 웃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조금 풀리다가도 뭔가 괘씸했다.


“이... 이 두 남매를 그냥.”

“저기요. 제발 그 사람이랑 저를 엮지 말아 주세요.”

연지가 장난스럽게 정색하고 내 어깨를 치며 속삭였다.

“아냐. 너네 남매 맞아. 같은 김 씨고! 나 열받게 하고! 똑같네!”

“이 언니 취했네...”

“그래. 내가 지난번에는 김현우 앞이라 못 취했지만 오늘은 진짜 취할 거야.”


같이 술 마시지 못해 무척 아쉬웠지만 잠깐이라도 얼굴 봐서 좋았다는 생각에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연지한테 결국 다 말했냐.”

“어. 이제 좀 시원하네.”

“이제 연지한테 말해라. 내한테 말하지 말고.”

“몰라. 나 또 곡 썼다.”


지난번 신찬성이 내 곡에 대한 피드백을 해준 이후로, 공대생에 대한 인상이 달라졌다. 노래방도 잘 안 갈 것 같은 사람이 내 노래에 대해 이것저것 말해주고 그게 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니. 얼른 이번 곡도 뭐라고 말해줄지 기대가 되었다.


“괜찮네.”

“왜. 왜. 어때?”

“뭐. 딱 니 곡 같네. 나쁘지 않다.”

“니가 지난번에 나 가성이 좋다고 해서 일부러 여기 앞부분에 가성 좀 많이 넣었다? 그리고 니가 짧다 그래서 이번엔 1절도 좀 A-B만 안 하고 A-B-C파트까지 씀. 근데 이거 제목을 아직 못 정했어. 제목 뭐로 할까.”

“왜 그냥 김현우 사랑해로 하지 그래.”

“어후 쫌. 근데 그래도 지난번 거보다 신나는 느낌이지 않냐?”


신찬성은 발라드보다 신나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이번 곡 역시 슬픈 가사에 애달픔이 섞인 노래였지만 나름 미디엄 템포에 잔잔한 느낌은 아니었다.


“니는 내가 좋아할 만한 곡 좀 써주면 안 되냐.”


내가 내 맘대로 곡 쓰지 니 좋아할 만한 곡을 왜 쓰나. 그렇지만 노래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신찬성뿐이니, 무슨 스타일 노래를 좋아하는지 궁금하긴 했다. 이왕이면 취향에 맞춰줄 수도 있지.


“니가 좋아할 만한 곡이 뭔데.”

“잠만 있어봐라.”


신찬성이 막 노래를 추천해 준다. 통화를 켠 상태로 노트북으로 찾아서 들어봤다. 참 노래가 다 밝고 희망차다.


“야. 니랑 안 어울리게 노래가 다 에너지 뿜뿜이네.”

“그래. 이런 좀 밝고 사람들한테 에너지를 줄 수 있는 노래를 써봐라. 맨날 김현우 가지고만 쓰지 말고.”

“내가 뭐 쓰고 싶어서 쓰냐! 그냥 피아노 앞에 앉으면 가사랑 멜로디가 줄줄줄 나와요 아주 김현우만 생각하면. 나도 신기하다.”

“좀. 김현우 좀 그만해라. 언제까지 김현우 김현우 할 건데.”


정말이지 김현우는 지금 나의 강력한 뮤즈란 말이다. 이렇게 곡이 쉽게 술술 나오는 게 얼마만 인지 모르겠다.


“이 노래도 들어봐라. 이거 예전에 노래방에서 많이 불렀던 건데.”

“대박. 니 노래도 해? 오 들려줘.”


됐다고 하더니 결국 찾아서 카톡으로 파일을 하나 보내줬다. 오 좀 하는데. 그럼 나도 피드백을 해 줘야지.


“니 이 노래랑 되게 잘 어울리네. 선곡 잘했다. 니 목소리에 부드러움이 살아나네.”

“아니다. 뭐.”

“아니 진심. 장난으로 하는 말 아니고. 되게 잘 어울려. 선곡도 실력인데 되게 잘 골랐어. 이 노래 별로 유명한 곡도 아닌데. 지금 처음 들어본 곡인데. 니 목소리가 되게 잘 묻어난다.”

“그래? 내 사실 목소리 좀 콤플렉스였는데.”


듣기 좋은데. 자신이 없었다고? 음악 전공자로서 이건 또 넘어갈 수가 없다. 자신감을 불어넣어 줘야지.


“왜 좋은데. 내가 딱 네 말하는 목소리만 들어도 노래 어떻게 부를지 감이 대충 잡히긴 하는데. 지금 이거 들으니까 더 딱 알겠네. 니 목소리 좋은데. 아니 진짜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또 전공자잖냐. 니 음색 좋아. 충분히 자신감 가져도 돼. 나는 니가 지금 콤플렉스라는 말에 더 놀랐다야. 나는 니 목소리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래? 뭐.. 고맙다.”

“나는 김현우 목소리보다 니 목소리가 더 좋은 거 같은데?”

“그래. 알았다.”


신찬성이 떨떠름한 듯 말했다. 신찬성한테 고맙다는 소리도 다 듣고. 뿌듯했다. 진심이었다.           



이제 김연지와 김현우는 마치 한 세트처럼 느껴졌다. 일주일에 한 번 교양 수업을 같이 듣던 사람들이 어떻게 알바도 같이 해서 거의 매일 만나고 주말에도 논다고 만나는지 참 신기했다.


교양 과목이 파이썬의 이해다. 애초에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수업이 아닐뿐더러, 가도 김현우는 없다. 대신 출석체크 해주는 연지만 있겠지. 있다 한들, 연지 교양 수업 들을 때 쫓아가서 옆에 앉아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김현우는 왜 하필 생활체육과일까. 내 생활에는 체육이 없는데.


인싸는 역시 인싸끼리 노는 건가. 김현우와 김연지 인스타그램엔 늘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거나 노는 사진이 올라왔다. 나가서 놀고 싶어도 놀 사람이 없는 나나 신찬성과는 다른 세계 사람들 같았다. 친구 없는 사람끼리 서로 위로가 되어야지 어쩌겠나. 그렇지만 신찬성은 여자친구가 있다. 신찬성과 통화를 너무 매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저녁 8, 9시쯤 내가 전화를 걸면 신찬성이 이제 자야 한다고 해서 전화를 끊었다. 새나라 어린이마냥 11시면 칼 같이 자러 갔다. 하지만 하루에 통화를 세 시간 하면 그중 두 시간은 김현우 얘기 같았다. 여자친구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음을 잘 안다고 했다.



오래간만에 만난 신찬성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이었다. 검은색 후드에, 검은색 바지, 그리고 신발까지도 검은색이었다. 신찬성이 보인다고 반갑다고 손을 흔들겠는가 저 앞에 있다고 뛰어라도 가겠는가. ‘저기 오네’ 하고 핸드폰을 볼 뿐이었다.


토요일 오후라 쇼핑몰엔 사람들로 가득했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데이트 나온 커플이 많았다. 얘랑 나랑 같이 걸어 다니는 거 보면 사람들이 커플인 줄 알겠지. 이래도 되나. 여자친구한테는 뭐라고 말하고 나왔나 문득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입고 나와.”

신찬성이 겨울 청바지 사야 한다고 해서 온 건데, 나만 벌써 세 번째 피팅룸에 들어갔다. 쇼핑이라곤 평생 엄마랑만 해봤는데 옷을 입고 나오면 신찬성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야 이건 너무 칙칙하잖아.”

“니 지금 입은 거보다 낫다. 니가 입는 건 다 별로라니까.”

신찬성이 얼른 입고 나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막상 입고 나오니 봤을 때와는 다르게 나름 괜찮았다.


“오.. 입으니까 또 다르네.”

“니는 내 말만 그냥 들으라고.”

“이거 지금 바지에 입으니까 잘 어울린다.”

“니 바지가 제일 별로다. 그냥 니 옷장에는 입을 게 없어. 다 쓸데없다.”

신찬성이 절레절레하며 말했다.


"아, 나 살 좀 빼야겠다."

"그래. 닌 좀 빼야 된다."


뭐래. 키 161에 몸무게 54킬로면 열에 아홉은 지금도 말랐다거나 딱 보기 좋다고 할 거다. 적어도 지금도 괜찮다고 할 줄 알았는데. 거울 앞에 서니 그냥 해본 소린데 그런다.


상의고 바지고 패딩이고 코트고 할 것 없이 스무 번은 입어본 듯했다. 내가 내 돈 주고 옷을 사본 적이 몇 번 없을뿐더러, 엄마가 옷을 사 와도 입어보기 귀찮다며 들여도 안 보던 나였다. 신찬성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것도, 신찬성이 이건 이래서 저거랑 입으면 괜찮다고 옷 고르는 팁을 알려주는 것도, 내가 뭔가 집어 들면 절레절레 그냥 무시하고 가는 것도 재미있었다.


“야 근데 니 거 사러 온 건데 남자 쪽 가봐야 되는 거 아냐?”

“됐다.”          


신찬성과 밥 먹고 쇼핑하고 잠깐 카페에서 쉬다가 또 쇼핑하고, 평소처럼 집에만 있는 주말이 아니라 밖에서 신나는 하루를 보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 눈 뜨고 있는 모든 시간 김현우를 보고 싶어 하거나, 김현우 답장을 기다리거나, 김현우 인스타를 들여다보며 하루가 흘렀다. 그런데 신찬성을 만나는 동안에는 김현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불편하고도 불편했던 그 감정으로부터 반나절 동안 벗어날 수 있어 잠시나마 해방감을 느꼈다. 문득 신찬성과 보낸 이 시간이 최근 들어 가장 행복했던 시간처럼 느껴졌다. 신찬성은 무슨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무당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사람 왜 너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이 사람 너 좋아하나?”

“네? 에이 아뇨. 이 사람 여자친구 있어요.”

“왜 이러지 이 사람. 아 그러네. 이 사람이 지금 관계는 너랑 맺고 있는데 자꾸 딴 남자 얘기 하니까 짜증 난 거야.”


설마. 그러고 보니 니 옷 입는 거 마음에 안 드네, 가방도 마음에 안 드네 하고 곡도 김현우 가지고만 쓴다고 핀잔주곤 했다. 툭툭 던지고 짜증스러운 말투를 해도, 경상도 사람이라 무뚝뚝해도 다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 보니 가끔은 기분 나쁠 말도 서슴없이 했다. ‘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라고 느끼게 한 게 아닌가.


“야야야야. 나 어떡하냐.”

“왜 이 아침부터 전화하냐.”

“나 내일부터 롱패딩 입어야 되는데 지금 보니까 이거 찢어져서 못 입겠어. 버려야 되는 건데 그냥 옷장 안에 있었더라고. 니 오늘은 시간 안 되냐.”

“뭐 또 가자고?”


또 쇼핑 가고 싶었다. 난생 처음 느낀 쇼핑의 즐거움이었다. 당장 내일부터 롱패딩 안 입어도 껴입으면 안 얼어 죽는다.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서도 휙휙 옷을 건네는 모습이며 툭툭 뱉는 말이 좋았다. 같이 있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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