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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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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연 Nov 13. 2024

9. (완) 사랑한다고 말했더니

쿵. 심장이 땅바닥에 달라붙은 듯한 느낌이다. 반면 두 손은 쉴 새가 없다. 이 카드, 저 카드 갖고 있던 모든 타로 카드를 꺼냈다. 무작정 생각 없이 카드만 뽑았다. 제발. 눈물이 줄줄 흐르는 이 상태론 해석이 될 리 없다.    

진심이 아니었길 너는 바라고 있겠지만 

나에겐 남은 말들이 너무나 많은걸      


신찬성의 카톡 프로필 사진이 텅하고 사라지며 차단당한 지 3시간쯤 지난 새벽 3시. 과연 지금 곡이 나올까 반신반의한 채로 녹음기를 켜자, 울먹이는 입가에서는 멜로디와 가사가 줄줄 쏟아졌다. 두 마디 정도 속삭였다 멈추기를 반복하며 순식간에 1절이 탄생했다. 그제야 할 일을 마친 듯 자리에 누웠지만 몇 초도 되지 않아 베개가 흥건히 적셔졌다. 오늘 누워 잠들긴 글렀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해가 뜨자마자 학교로 향했다. 연습실까지 한 걸음 한 걸음 기어가듯 느리게 발을 떼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일요일이라 캠퍼스에 사람이 아무도 없어 다행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비틀거리며 걷는 모양새가 만일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괜찮냐며 말을 걸 것만 같았다. 그래도 가야만 했다. 새벽 3시에 쓴 그 곡을 피아노 앞에 앉아 제대로 완성시킬 책임을 느꼈다. 인간 이사랑은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겠지만 작곡가 이사랑은 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때도 얘기했지만 이 사람은 사랑 씨한테 해가 되는 사람이에요. 좀만 더 갔으면 이거 가스라이팅이지. 마음이 없는 건 아닌데... 보통 사람이 누가 마음에 들면 그 사람한테 잘 보이려고 하고, 싫어하는 행동 안 하려고 하고 노력을 해요. 근데 이 사람은 아니란 말이지. 사랑 씨를 위한답시고 자꾸 지 입맛대로 컨트롤하려고 하고, 기분 좀 안 좋다고 괜히 화풀이하고. 나쁜 놈이야 이거.”      

“그... 그.. 랬군요.” 


핸드폰 액정에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멍하니 벽을 쳐다본다. 벽지가 마치 노란색이었다가 초록색이었다가 보라색으로도 보이는 것 같다. 머리 아프기로는 이미 머리가 터지기 직전이다. 눈물이든 콧물이든 얼굴 자체가 그냥 뜨겁게 타서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사람이 자기가 그게 힘들고 한계면 그렇다고 말을 해요. 나 같은 경우에도 이렇게 상담하는 거 오늘은 더 이상 내가 무리다 싶으면 더 안 받아요. 근데 사랑 씨가 전화하는 거 이 사람 매일매일 다 받아줬잖아. 자기가 할 일이 있으면 그걸 말을 하고 끊었으면 되는 건데 지금 사랑 씨한테 잘못을 다 뒤집어씌우고 말이야.”    

  

언니 말이 맞다. 이 무당 언니도 없었으면 나 정말 어쩔 뻔했나.      


“그래도 그 사람.. 연락 올까요?” 

“이번 달 안에는 그래도 올 거예요.” 

     

내가 붙들 수 있는 유일한 한 마디였다.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으니까. 나에게 해가 된다고 힘주어 말하던 무당 언니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렇지만 신찬성에게 그렇게 차단당한 뒤 지금 내 모습보다 더 나빠질 수도 없을 것만 같았다.      



이틀 동안 숟가락 한 번 들지 못해 2킬로가 빠졌다. 그냥 눈물만 흐르는 것이었다면 차라리 견딜만했다. 그 차단당하던 순간이 떠오를 때마다 심장에 턱 하고 화살을 맞으면서 울기 시작하는 게 문제였다. ‘꺼져’라는 말을 들었던 그 순간, 그 순간이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울릴 때면 심장은 땅 끝까지 철렁하고 온몸이 부서졌다. 대체 몇 번을 더 반복해야 이 철렁함이 무뎌질까 싶었다. 내가 지금 헤어진 것도 아닌데 왜 이러나.      

차단 안 한다며. 나에게는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문득 얼마 전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니 보면 예전에 알던 여사친이랑 똑같애. 내가 이런 얘길 누구한테 뭐 하겠나. 우리 부모님이랑 그 여사친이랑 니 밖에 없다.”

“그렇구나..” 

“내가 뭐 누구한테 이런 진지한 얘기를 막 하겠냐. 사람들이 싫어해 그러면.” 

“나는 진지한 얘기 좋은데... 왜 싫어해..”      

여자친구와도 이런 대화를 안 하는 건가. 보통 애인은 부모님 다음으로 가장 가깝게 뭐든지 얘기 나누는 존재가 아닌가.      

“그 여사친은.. 날 좋아했어. 나중에 고백하더라고.”

“헐. 그때 여자친구 있었어?”
“있었지 그때도. 난 걔 냅뒀어. 내가 안 흔들릴 자신 있으니까.”      


그 여사친과 똑같다며. 왜 내겐 그런 배려도 없었나. 

     

며칠 전 빼빼로데이엔 내가 빼빼로도 줬는데. 아무 날도 아닌데 요즘 고마웠다고 선물도 주고 편지도 써서 줬는데. 신찬성과 있었던 시간들이 뒤죽박죽 섞여서 마구 떠올랐다. 건축학과에선 뭐 배우는지 궁금하다고 하니 자기가 만든 설계도도 보여주고 나도 자작곡을 쓸 때마다 들려주며 내 꿈을 이야기하였는데.      


그런데 이렇게 추억을 곱씹고 하루종일 우는 건 연인과 헤어졌을 때나 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것도 아닌 사이였는데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심장의 울컥함이었다. 차단당한 이후로 1분 1초도 심장의 저릿함이 멈출 줄 몰랐다.      


학교에서 찍은 새벽 3시의 자작곡, ‘사랑한다고 말했더니 꺼지라고 했다’를 피아노 치며 부르는 영상을 계속 돌려봤다. 아티스트로서 참 성공했다. 이렇게 진심을 가득 담아 또 한 곡의 곡을 써내다니. 내가 아팠던 만큼, 겪은 만큼 멋진 퀄리티의 곡이 나오는 건가. 작곡가로서는 기쁘지만 나로선 고통이었다. 


          

연락은 오지 않았고 처음으로 무당 언니가 틀렸다. 카톡은 이미 차단했으니, 행여 문자는 아직 차단하지 않았을까, 단 한 번 남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문자를 보내기 위해 얼마나 고치고 고치고 외울 정도로 고쳐 썼는지 모른다. 마치 조선 시대 아녀자가 내일 억울하게 처형당하기 직전의 남편을 구하고자 상소문을 쓰는 심경이었다. 졸업 공연 때까지만이라도 연락을 계속해주면 안 되겠냐고 빌었다. 


     

그리고 2주가 지났다. 이미 연락처도 차단해서 문자도 보지 못한 건가. 전화해 보면 알 수 있을 텐데. 연결음이 들리면 바로 끊어야지.      


신찬성에게 전화 버튼을 누르는데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차단당한 이후로 연락처를 지웠어도 내 머릿속에 남아있기에 의미가 없었다. 숫자 하나하나 숨을 가쁘게 쉬며 번호를 눌렀다.    

  

디리릭. 1초는 흘렀나. 통화 연결이 된다는 것만 확인하고 후다닥 끊었다. 그런데 곧바로 전화가 울렸다. 신찬성이다.      


으아악. 저장되어있지 않은 번호로 신찬성에게서 오는 전화가 계속 울렸다. 1초, 2초 , 시간이 흐르는 동안 숨은 턱 막힌 채 어쩔 줄 몰랐다. 전화를 받지 않고 얼른 메시지창을 열었다.      


나 너무 무서워서 못 받겠어 ㅠㅠ 나중에 전화하면 안 될까      


왜 전화하는데 


나중 없으니까 지금 받으라고      


이렇게 말하는데도 내가 전화를 걸어야 하나. 나중 없으니까... 라니. 대체 무슨 말하려는 걸까. 무슨 말을 하고자 하든 상관없었다. 무슨 말이든 듣고 싶었다.           



“니 내 좋아하나.” 

“...”      


대답을 하지 못한 채 3초가 지났다. 5초가 지나니 내가 이미 대답 없음으로 대답했음을 깨달았다.    

  

“니 그 노랜 뭐냐. 내가 일부러 찾아보려고 한 게 아니라 현우랑 연지가 이미 다 알려줬다. 니 왜 여자친구 있는 사람한테 사랑한다고 했는데 꺼지라고 했다라고 제목 안 썼냐. 그걸 보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아니 그건.. 내 곡인데.”      

“니랑 친구 하기 싫다고. 그냥 좀 끝내. 아니 끝낸다는 말도 웃긴다.”

“...” 

“아직도 할 말이 남았어? 왜 못 알아듣는데 이걸? 연락하지 말라고.” 

“...”      


내가 말이 없어 정적이라도 흐르면 신찬성이 확 전화를 끊어버릴까, 잠깐만... 아니 잠깐만... 하며 울먹일 뿐이었다. 신찬성이 눈앞에 있었다면 무릎이라도 꿇고 빌고 있지 않았을까.      


“연락하지 마라.”           


시간이 지나 졸업 공연 날짜는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매일 같이 학교 연습실에 가도 신찬성은 마주칠 수 없었다. 매번 학교에 갈 때마다 신찬성을 마주치는 상상을 했다. 그 상상 속에서도 나는 신찬성과 말 한마디 나눌 수 없었다.      


김현우... 김현우라도 연락해 볼까. 김현우는 그래도 아직 신찬성과 연락하고 있지 않을까.     

 

오빠 나 내일 졸업 공연 2시에 하는데 보러 올래? 학교에서 해 ^^      


평소 김현우답지 않게 빠르게 답장이 왔다.      


미안. 나 내일 해외여행 가서 못 갈 듯.      

오.. 어디 가는데?       


마지막 물음에 대한 대답은 영영 듣지 못했다. 상관없었다. 신찬성과는 연락하고 지내는지, 최근에 신찬성과는 만난 적이 있는지, 내가 어느 순간 신찬성에게 스며들어 신찬성을 사랑하게 되었음을 행여 들었는지 궁금했다. 그동안 아무런 교류도 없었으니 갑자기 김현우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신찬성에게 차단을 당했는데 말 좀 전해 달라는 부탁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니 내 좋아하나. 신찬성이 그 말을 뱉은 순간, 어쩌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을지도 모르겠다. 김현우는 과연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가늠도 할 수 없는 채로 관계가 끝이 났다. 하지만 신찬성은 하고 싶은 말을 전부 곡에 쏟았고, 그 곡을 그도 들었고, 모진 말로 끝이 났다. 

          


12월에 이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고 길을 걷다니. 신찬성이 골라준 블라우스를 입고 그 위엔 또 신찬성이 골라준 롱패딩으로 꽁꽁 감싸고 졸업 공연을 하기 위해 캠퍼스로 들어섰다. 이 공연 의상은 신찬성이 마음에 들어 했을 텐데.      


오래간만에 학교에 오니, 신찬성에게 차단당한 다음 날 비틀거리며 연습실에 가던 내 모습이 새삼 떠올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무대 위에서 울지만 않으면 성공이다.      


졸업 공연에서 선보일 노래는 두 곡이었다. 하나는 김현우 때문에 처음으로 썼던 곡이다. 진작 졸업 공연에 올릴 곡으로 생각해 뒀다. 하지만 다른 하나는 예상하지 못했다. 신찬성은 그렇게 내 일상을 다 바꿔놨다.  

    

공연장에 도착하자 객석에는 나와 같이 졸업 공연을 올리는 사람을 보러 온 친구, 지인들이 하나둘 자리하고 있었다. 김현우는 해외여행 갔고, 김연지는 알바 가서 못 온다고 했으니, 객석에 아는 사람은 있을 수 없었다. 신찬성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과도 같은 기대가 마음 한편에 자리할 뿐이었다. 김현우에게 들었을 수도 있지. 내 인스타에서 봤을 수도 있지. 아 참, 신찬성은 인스타 안 하지.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졸업 공연을 잘 마치는 거다’, ‘아니다 신찬성이 올지 안 올지가 제일 중요하다’ 하는 두 가지 마음이 공존했다. 대학 4년을 마무리하는 이토록 중요한 공연에서 신찬성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짝사랑도 사랑이지 않나. 혼자만의 사랑인 만큼 내가 더 소중히 여겨줘야 했다. 아무것도, 어느 대단한 것도 바라지 않는 마음. 그저 상대가 보고 싶은 마음 하나였다.      


무대에 올라 피아노 앞까지 걸어가던 그 10초의 순간에도 신찬성이 보고 싶었다. 이 공연이 소중한 만큼, 신찬성도 소중한 존재였다. 건반에 손을 올리고 객석을 바라보았다. 센 조명 탓에 제일 앞줄을 제외하곤 사람들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나를 보러 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괜히 흐릿하게 보이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차갑고 딱딱하게만 느껴졌다. 결국 아무도 없이 이 무대를 하는구나.      


나를 보고 있다면 제발 

지금 올 수 없다 해도 

웃어볼게 멀어지지 않도록 여기 서있을게      


김현우 때문에 썼던 곡을 이제는 오로지 신찬성을 생각하며 불렀다. 김현우로부터 답장이 언제 오나 두근두근 설렘 반, 애타는 마음 반으로 부르던 곡이었다. 그땐 마치 봄날에 예쁘게 핀 꽃밭에 나비가 날아다니는 그림이었다면 이제는 천둥 번개가 치는 겨울 숲 속이 떠올랐다. 같은 곡인데도 이렇게 곡을 대하는 아티스트의 심리 상태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구나. 신찬성 덕분에 음악적으로 많이도 성장했다. 참 고마웠다.      


첫 번째 곡이 끝나고 이제 두 번째 곡 차례가 왔다. 그러던 그때 뒤쪽 문이 슬며시 열리는 모습이 보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실루엣이다. 설마 아니겠지. 조명 때문에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아 눈을 찡그렸다.     


  

왔구나. 나를 망친 나의 구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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