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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양엄마에게 (2)

by 이가연

오빠는 결코 날 답답해한 적 없이 항상 내 입장에서 생각하고 공감한다. 엄청난 공감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사람 한 명 한 명에게 진지하지 않고 나의 친해지려는 노력을 받아주지도 않았으면서 외롭다고 말한 사람들도 이해가 안 가고, 매번 약속에 늦었거나 카톡 답장을 일주일 뒤에 하면서 사과도 안 한 사람들도 이해가 안 가고, 나에게 불만이 있었으면 진작 말할 것이지 갑자기 터트려서 황당하고 서럽게 만들었던 사람들도 이해가 안 간다. (이런. 구체적으로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군.) 그런데 오빠는 정말 종교인처럼 거의 모든 사람을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나에게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굿굿굿굿굿 리스너다. 결코 함부로 조언하지 않는다. 이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누구나 상대방이 답답해 보이면, 조언이 툭 튀어나올 수 있다. 그게 자기가 속 편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쉽게 쉽게 조언만 뱉는 사람들을 같이 뭐라 해줘서 속이 시원하다.


누가 그렇게 똑같은 사람 얘기를 무한정으로 들어줄 수 있겠나. 하루 '최소' 3번이라고 쳐도 2천 번이다. 꿈에 나올만하다. 오빠가 이제 지지를 철회했다고 말해도, 매우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그것이 나에 대한 지지를 안 하겠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 너무 고맙다.

챗GPT가 할 수 없는 영역이다. 챗GPT가 하는 말 듣고 있으면, 어쩔 때는 전혀 현실적이지 않고 안 와닿을 때가 있다. 이건 무슨 기업의 경영 전략 찾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서 온 아픔이다. 무조건 사람하고 대화해야 했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 다른 건 다 어떻게 알아서 잘했을 텐데 이 문제는, 이 오빠가 없었더라면 작년부터 어떻게 살았을지 도무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잘 이해하려면, 타고난 공감 능력도 중요하지만 똑똑해야 된다. 박학다식해야 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를 말해도, 그 속에 숨겨진 뜻이 저절로 파악되는 똑똑함이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지금 말을 똑바로 알아듣게 못 했나?'싶은 적들이 있다. 그런데 이 오빠는 내가 느끼기에도 지금 내가 감정적이어서 말을 잘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상황에서도, 잘 말하고 있다고 격려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이 오빠를 알게 되었던 무렵, 무슨 파양 당한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정확히 작년 2월 11일이었다. 자작곡 'Cheating Man'을 2월 7일, '거짓말의 이유' 2월 8일에 썼기 때문에, 두려움, 증오, 슬픔, 안타까움, 처절함, 절망과 같은 복합적인 감정을 느낀 지 며칠 안 된 시점이었다. 진짜 하늘이 날 생각해서 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늘도 내가 앞으로 닥쳐올 미래를 이 오빠 없이는 정상적으로 못 살 거 같으니 내려준 거 같다.


파양 당한 강아지가 새로운 집에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처럼, 나도 그랬다. '안전하다'는 감각을 느끼면서도 마음 깊이 편안해하기 어려웠다. 만일 내가 막 카톡으로 화를 냈다고 치자. 그러면 나는 기본적으로 상대방도 막 나에게 뭐라고 할 상상이 되면서 피해망상처럼 심박수가 확 치솟고 온몸이 반응하며 미친다. 그런데 오빠는 나에게 화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안전함을 느낀 거다. 나는 갈등 상황에서 한국인 모두에게 그런 반응이 온다. 원래 영어로 얘기할 때만 심리적으로 안전하게 느낀다. 한국어로는 올해까지도 내가 너무 많이 부서졌다. 이건 생애 최초의 데이터다.


작년은 단언컨대 성인 이후로 가장 힘들었던 해였다. 그래서 작년의 나를 품고 지금까지 관계를 안정적으로 이어올 사람이라면, 정말 그 어떤 고슴고치 같은 사람이라도 품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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