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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연 Sep 28. 2023

사랑은 열린 문

저 옆방에 이사 왔는데요

기숙사 신청할 때만 해도, 가면 체육관, 시네마룸, 빨래방 등 공용 공간에서 친구를 사귈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아직 체육관이나 시네마룸은 어디인지 위치만 대략 알고 있다. 내 방에서부터 그런 공용 공간에 가려면 건물 밖으로 한 번 나가야 하는데 수많은 문 열림 버튼을 누르고 카드를 찍어야 갈 수 있다. 건물 밖에서 내 방까지 들어오는데 총 네 번의 카드를 찍어야 한다. 엘리베이터가 아닌 이상 딱히 사람들을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사우스햄튼에서 4일 차 되던 날, 옆 방 문을 처음으로 두드렸다. '왜 이 생각을 지금 했지?'싶었다. 이사를 왔으면 이웃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가. 그러나 이웃집에 노크하는 건 이웃 간의 정이 살아있던 10살 전에 살았던 아파트에서나 있었던 일이다. 그때는 아파트 반상회도 하고 같은 엘리베이터를 사용하는 세대 중에 몇 호에 내 또래 애들이 있는지 다 알았다.


첫 번째 4호는 조용한 남자애였다. 노크를 하고 나니, 안에서 마치 침대에서 내려와서 주섬주섬하는 소리가 들리니 떨렸다. 노크하기 전엔 제법 긴장되었다. 뭐라고 말해야하나는 둘째치고 안에 사람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다행히 노크에 문을 열어주었고 인스타그램 공유도 했다. 나보다 더 내향적이고 차분한 성격의 학생인 것 같았다.


두 번째 7호는 중국인 여자애였다. 마찬가지로 노크를 하자 얼굴만 뿅 하고 내밀더니 내가 얼마 전에 이사 와서 인사하고 싶어 들렸다고 하니 문을 활짝 열고 맞이해 주었다. 처음엔 다소 당황한 듯 보였는데 그도 그럴 것이, 잠옷 차림이었다.


이번엔 번호 교환하고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문제의 6호를 같이 이웃으로 두고 있는데, 옆방이 음악을 크게 트는 소리를 이 친구는 벌써 2주째 참고 있었다고 했다. 그동안 도대체 이 EDM 음악 소리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근처에 클럽이라도 있나 싶었는데 덕분에 범인을 알게 되었다. 6호는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어 7호에 갔던 것이었는데 음악 소리가 들리자 다시 한 번 가보기 위해 일어났다. '내가 가서 한 마디 할게'까지는 아니었지만, 뭔가 이번엔 조금 더 비장했다.


6호 역시 남자였다. 지금까지 방 주인들과는 다르게 먼저 악수도 청해줬다. 인사한 김에 지금 밤이니 음악 소리도 좀 줄여달라고 했다. 다행히도 방에 돌아오니 음악 소리가 조금은 줄어있었다.


매번 문을 두드리니 마치 엘사 보고 놀아달라고 하는 안나가 된 기분이기도 했다. '똑똑똑'이 아니라 안나가 두드리듯이 리듬에 맞춰서 '똑 똑똑 똑' 두드리려다 참았다.


마지막은 바로 맞은편에 있는 11호였다. 3호, 8호, 9호 등 다른 방이 각기 다른 시간에 두 번씩 두드려도 대답이 없어서 이 친구들은 밤늦게 집에 들어오나싶어 이제 그만할까 하던 참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11호 문이 열렸다. 이번엔 세 명의 여자 친구들이 있었다.


이번엔 방이 아니라 복도처럼 되어있기에 '여긴 뭐지' 싶었다. 처음엔 내가 들어와선 안 되는 공간에 문을 두드렸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여기는 나를 포함해 다른 방처럼 원룸이 아니라 공용 거실, 공용 주방을 쓰는 사람들의 복도였다. 11호 문을 열면 3개의 다른 방문이 또 있던 셈이었다.


중국어로 '한국인들은 왜 이렇게 피부가 좋냐'라고 얘기하는 걸 듣고 '나 중국어 좀 알아들어'라고 했다. 나보고 피부가 건성이냐 지성이냐, 피부는 타고나는 거냐라고 하니 새삼 기분이 좋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인스타그램을 공유했다. 마침 최근에 업로드한 게시글 중에 중국 노래 커버가 있어서 그걸 듣더니 너무 좋다고 칭찬해 줬다. 중국인 친구들 앞에서 내가 부른 중국 노래가 흘러나오니 왜인지 모르게 내 몸에 소름이 돋았다.


11호에 사는 세 친구들은 전부 같은 전공에 대학교 2학년 학생들이었다. 각자 중국에서 고향은 다르지만 이미 2학년인 만큼 많이 친해진 듯한 모습이었다. 한국에서 혼자 온 거냐며, 영국에 아는 사람 없냐고 물으니 "맞아. 그래서 노크했어"라고 했다. 그러니 너는 중국어를 할 수 있어 친구 많이 사귈 수 있을 거라며 격려해 줬다.


이사 온 첫날부터 중국어를 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건물에 사는 학생들 60-70%가 중국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다들 영어를 할 수 있지만, 자기들끼리 중국어로 얘기할 때 내가 아무것도 못 알아듣는다면 무척 소외감이 들었을 거다. 가뜩이나 사우스햄튼 도시에 와서는 한국어를 한 번도 못 들었으니 말이다. 물론 중국어를 영어처럼 100% 알아듣는 건 아니지만, 모르는 게 있어도 대략적으로 유추하고 알아들을 수 있어 매번 감사하고 있다.


이렇게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같은 거실, 주방을 공유하며 같이 밥 먹고 이야기하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부엌을 공용으로 사용하며 요리를 하기에 불편한 점도 많을 것이다. 영국에 오기 전까지는 이렇게 요리를 많이 해야 하는 줄 몰랐다. 자취 생활 1년 9개월 동안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김치볶음밥을 벌써 두 번이나 해 먹었다.


바로 맞은편에 노크만 하면 놀러 갈 수 있으니 참 잘됐다는 생각에 지금까지 노크 여정 중 어느 때보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다음엔 안나처럼 노크해 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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