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엄마 말, 새끼 말

Lyndhurst

by 이가연

린드허스트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는 졸려서 타이틀곡 다시 한번 모니터링했다. 밀크티 마시면 잠 좀 깰 줄 알았는데. 발라드를 듣는데 어떻게 잠이 깨냐고? 이 노랠 들을 때마다 심장을 자갈밭에 두고 굴리는 기분이다. 맨발로 지압길 걷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진짜 잠 깼다.

이젠 아주 노래하고 대화를 하는 지경이다.


네가 준 상처를 뒤로 한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어 > 니가? 그래. 한 걸음은 나아간 거 같다. 어느 세월에 갈래.
아직 네가 보고 싶어 > 언젠 안 보고 싶었냐.
잊으려 하진 않을 거야 > 웃기시네. 겁나 노력했거든. 그러다가 역효과 제대로 맞아서 더 괴롭잖아.


영국 버스에서 그동안 멀미를 더 하던 이유를 깨달았다. 서울처럼 길이 고르지가 않다. 어쩜 이렇게 계속 울퉁불퉁한지, 또한 근교 갈 때는 1시간씩 탈 때도 꽤 있었다.


12시 반에 수업 시작할 때만 해도, '이거 끝나고 어디 가지.' 그랬다. 끝날 때쯤, 린드허스트나 갈까 하며 결정했다. 이미 수업 끝난 2시에 너무 졸렸는데, 호텔에서 아주 잠깐 쉬고 바로 버스 타러 나왔다. 버스가 1시간에 1번 오기 때문이다.


린드허스트(Lyndhurst)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내 영어 이름이 원래 'Lyn'이었다. 어릴 때 영어 학원에서 쓰던 이름이고 커서는 가연을 고수한다. 그런데 이 '린'이라는 이름이 보통 'Lynn'이나 'Lin'으로 알아서 내가 스펠링을 불러줘야 알았다. 그래서 내 이름이 들어가 있어서 좋았다.

도착 하니 여기도 사방이 유니언잭이었다. '뭐지' 하고 자세히 보니 5월 8일이 VE DAY라고 적혀있었다. 연합군이 나치 독일을 물리친 날을 기념하는 거라고 한다. 역사 상식이 하나 늘었다. (근데 나 작년 5월 8일에 여기 있었는데 왜 이거 기억에 없냐.)


이젠 태극기만큼이나 유니언잭 보면 가슴이 움직인다. 나는 과연 영국인과 결혼하게 된다면, 한국 국적을 버릴 것인가. 국적은 모르겠는데, 미시스 블라블라로 성을 갈진 않을 거다.

'얘네 다 어디 갔어.' 지난번엔 언덕 초입부터 당나귀들이 있었는데 오늘은 안 보였다. 언덕을 올라가도 여전히 없었다. 린드허스트 오면 무조건 볼 수 있던 거 아니었던가. 역시 사람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에는 사실이 아닌 게 많다.

'땅바닥에 똥이 이리도 많은데 이걸 싼 당나귀, 말, 조랑말 등은 다 어디 있나.' 싶었다. 눈앞에 노부부가 있길래 혹시 다 어디로 갔냐고 물었다. 그들도 나를 보며 멋쩍게 웃음 지으며 내가 참 운이 안 좋았던 거 같다며, 열심히 찾아줬다. 나보다 시력이 좋으신지 풀숲에 숨어있는 저 멀리 말도 찾아서 알려줬다. 그리곤 사진도 찍어주겠다고 하셨다.

백인에게 아무 말 없이 사진 찍어달라고 하면 이렇게 된다.



하늘 좀 많이 보이게 해달라고 하면 이렇다. 그러니 포기하지 마라. 잘 찍어주려고 노력하는데 몰라서 그런 거니까.



본머스에서도 그랬는데 노부부가 손 잡고 걸어 다니는 걸 보고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말 끝마다 달링도 그렇고 영국 참 스윗하다.

당나귀가 수십 마리 있지 않아서 아쉬워할 필요 없었다. 눈앞에 어미 말과 아기 말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됐다.


처음에 발견했을 땐 어미 말만 풀을 뜯고 있었고, 너무 멀리 있어서 땅바닥에 저게 뼈인가 싶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생명체였다. 백인 아주머니가 죽은 게 아니길 바란다고 말하니까 갑자기 확 무서워져서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움직여서 안도했다.


이렇게 작은 말은 처음 본 거 같았다. 어제 당나귀든, 오늘 말이든 만져보고싶다는 생각을 안 했는데 얘는 진짜 귀여워서 마음 같아선 안아주고싶었다.



크기도 너무 조만하고 풀은 아예 먹지 않고 엄마젖만 먹는 걸 봤을 때 진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 같았다. 엄마만 졸졸 쫓아다니면서 젖 먹는 게 참 귀여웠다. 새끼 말이 뛰어다니니 어미 말이 쫓아다니기도 했다. 사람하고 똑같군. 역시 인간이고 동물이고 아기들은 귀엽다.



누가 아빠냐. 그럼 그렇지, 어미 말이 흰색, 검은색인데 새끼가 왜 갈색 흰색이냐. 새끼 말이 어미 말하고만 붙어있어서 아무리 지켜봐도 아빠 말을 알아낼 수 없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 귀여운 새끼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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