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치석처럼 쌓이는 거 같다. 이를 안 닦아서 치석이 쌓이는 게 아니다. 음식물이 낀 게 보였으면 제거를 했을 텐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치석이 쌓이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스케일링을 받으러 가야 한다.
올해 들어서 막 심각하게 운다거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침에 눈 떠서 잠들 때까지 슬픔이 항시 적어도 10%에서 40%까지 잔재한 채 살아간다는 건 알고 있다. 당연하듯 공존하는 거라, '지금 감정의 청소를 해야 돼!'라고 느끼지 않는다. 아무리 오디션에 합격하고, 영국에 가도 (아. 영국은 오히려 업이군) 항상 지금 느끼는 감정 바구니 밑바탕에 깔려있는 게 느껴진다. 더 큰 좋은 소식이 들려와도, '나는 이런 거 다 필요 없단 말이야. 나는 돈 한 푼 안 들이고 수다만 떠는 게 제일 행복하단 말야.'라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반작용으로 더 커질 수 있다.
어제는 아이유 새 앨범에 있는 'Never Ending Story'를 듣고, 내가 불러도 잘 어울리겠다 싶어서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러다 노래도 눈물도 막 토해져 나오기 시작했다.
슬픈 노래를 듣고 눈물이 나는 건 작년으로 끝난 일이다. 이제는 어떤 노래를 단순히 듣는다고 해서 눈물이 나진 않았다. 계속 그러고 살 순 없으니까 의식의 뒤편으로 보낸 느낌이다. 그러다가 그렇게 피아노 앞에 앉은 어느 날이면 의식이 '너 이리 와봐'하고 불러서 뇌에게 일깨워준다. 여기 아직 있다고. 그럼 뒤로 밀려난 감정들이 많이 서러웠는지 좀 격하게 알려주는 거 같다. 스케일링도 6개월 만에 치과에 갔을 때와 달리, 1년 만에 가면 막 피나고 아플 수 있다. 그런 느낌이었다.
안타깝게도 스케일링과 다르게, 그런다고 깨끗하게 없어지진 않는다.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가글에 가깝겠다. 약간 시원한 기분이 들긴 하니까.
차라리 노래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면, 그때그때 감정이 조금씩 표출된다. 슬픔을 느끼는 건 똑같은데, 눈물이 나지 않으면 계속 안에서 쌓이기 때문에 풀어줘야 된다는 걸 느꼈다. 감사하게도 나는 노래를 잘한다. 혼자 노래를 막 부르는데 본인이 듣기에도 음치이면 그것도 유쾌하진 않았겠다. 아마 그랬으면 다른 방법을 찾았을 거다. 가끔 내가 노래를 부르는 중에도 소름이 돋을 때가 있다. 나도 공기 중에 울려 퍼지는 내 노래가, 마치 제삼자가 듣는 것처럼 분리되어 찌릿하게 들린다. 내가 가창자이자 청자가 된다.
글로써 해소하는 건 50% 정도란 생각이 든다. 카톡으로 와다다 실시간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둘이나 있어도, 안 하는 것보다 나은 정도다. 직접 말로 하고 싶다. 나는 곡을 쓸 때도, 상대방에게 하고 싶은 말을 허심탄회하게 풀어내듯이 쓴다. 그러니 노래는 나에게 말하기와 비슷했다.
직접 말로 해소할 수 없다면, 노래하며 살아온 인생이 문득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릴 적부터 노래는 나에게 유일한 표현 수단이었다. 커서는 말로도 글로도 잘 표현하게 됐지만, 여전히 노래가 가진 힘이 있다.
(그나저나 진짜 스케일링받으러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