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그렇게 상처로 남은 순간을, 저 사람이 왜 그 말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생각하고 생각한 적이 있던가. 절대 없다. 있어도 한두 번이다.
오빠에게 '걔와의 마지막 순간'을 200번 말하는 동안, 아프고 슬펐다는 얘기를 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올해부터는 확실히 달랐다.
내 기억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또 분석했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얘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이젠 이해가 되어도 너무 된다. 상대방이 없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던 너를 이해해.'라고 이미 수차례 말한 기분이다.
같은 얘기를 내내 들은 오빠도, 나랑 성별만 다르고 똑같다고 했다. 그러니 더더욱 역지사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을 마음에 들일 사람도 아니고, 무조건 마음이 따뜻하고 여린 사람을 마음에 담는다. 사람에 진심이고, 진지한 사람이 아니면 나는 쎄함을 느끼고, 안 맞다고 느끼는 그 감이 굉장히 살아있다.
나 같은 사람이면, 본인이 상처 주고도 마음에 상처 입었다. 본인이 뱉은 말을, 부메랑처럼 맞았다. 그래서 내가 품을 수 있는 가장 큰 마음으로, 내 영상이든 노래든 글이든 모르길 정말 바라야한다고 생각했다. 수없이 분석한 바로는, 나에게 이 정도까지 크게 남겼다는 생각에 많이 고통스러울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겪은 모든 걸 정말 다 알게 되면, 죄책감이 턱 끝까지 차올라서 걔야말로 숨을 못 쉴 거 같다. 이 믿음은 수도 없이 흔들려왔지만, 그래도 그렇게 믿는다.
그랬으니, '보고 싶다.'에서 출발한 슬픔을 강하게 느낄 뿐, 상처받은 것을 전처럼 느끼지는 않게 되었다. 그냥 그때로 끝날 줄 알았지, 이 정도로 오래 나에게 영향을 미칠 걸 알았다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걸 안다.
사람이 없어도 역지사지하는 능력을 길렀다. 그리고 상대의 정말 속을 볼 줄 알게 되는 마음도 키웠다. 하늘이 내가 그 능력을 키우게 하기 위해 이 시간들을 겪게 했다고 해도 납득이 간다. 꼭 필요했던 시간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쌓은 건 사라지지 않는다. 이 기억은 평생 심장에 남아, 가족, 친구와 같은 다른 소중한 누군가도 이해할 수 있게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