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있는 친구들은 내가 무언가 공유하는 것을 고맙고 즐겁게 생각해 준다. 그게 맞다. 아무에게나 그러는 것도 아니고, 인스타 릴스 하나, 사진 하나 공유하는 것도 전부 상대방을 믿고 좋아하기 때문이다. 내가 똑같은 내용을 대여섯 명에게 막 뿌리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과거 사람들을 붙잡고 속마음을 물어볼 순 없지만, 귀찮아하고 무시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소중한 마음이 너무 쉽게 버려졌다.
그건 과거 내가, 지금의 나보다 '셀프 러브' 실천을 더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를 진정 아꼈더라면, 내 마음이 그런 식으로 버려지는 걸 놔둘 수 없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내가 만나자고 한 열 번을 물어봐도 계속 거절하는 사람을 열한 번째 더 물어볼 수 있었겠나. 사회적 눈치가 없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런데, 나 자신을 아꼈다면 덜 일어났을 일이다.
'저 사람이 나를 귀찮아하는 거 같으니까 하지 말아야지'는 내가 못하는 일이다. 애초에 당시 귀찮아한다는 발상도 안 떠오르고, 훗날 되어야 '아. 그때 그 사람이 나를 귀찮아했나 보다.'라고 생각한다. 이걸 사회화시키는 건 '뇌 고문하기'다.
반면,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지금 속상하고 서운하고 점점 화가 난다. 누구도 나에게 그런 기분을 지속적으로 느끼게 할 수 없다. 저 사람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할 수 있다.
결국 나 자신을 아껴주는 것에 해결책이 있었다. 물론 한 가지 예외가 있다. '저 사람을 너무 사랑해서 내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든 전혀 상관없이, 그 어떤 감정보다 사랑의 감정이 앞선다'에 해당할 수도 있다. '내'가 다 버려져도 좋다, '내'가 다 없어져도 좋다, 의 마음이면 이건 누가 뜯어말려도 어쩔 수 없는 거 같다.
'와 나 진짜 이젠 내가 너무 망가져서 안 되겠다.'싶어서 저 해결책을 시도한 적도 당연히 있었다. 그런데 '대신 총도 맞을 수 있다'의 마음이면 저거 안 통한다. 또한 '내 마음이 그런 식으로 버려지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몇 달, 몇 년 뒤든 내가 만든 창작물들이 울림을 줄 것이다'라는 믿음이 방탄 조끼 수준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그 정도면 싫다고 확실하게 한 거 아니냐'라고 했어도, 이 믿음은 상대방 본인만 부술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 정말 모든 희망이 사라지면,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겨줄 거라 믿는다. 흔히들 말하는 해외 커리어 기회나 잘생긴 새로운 남자가 아니라, 난 거기에 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