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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연 Jun 06. 2023

나를 꿈꾸게 해

일주일 동안 런던 여행을 계획했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로는 대학원 선택을 위한 세 개의 캠퍼스 투어였고, 두 번째로는 해리포터 팬심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겐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팬심을 챙기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음악에 뛰어들기 전, 해리포터는 어린 시절 나를 한껏 위로해 주고 꿈과 희망을 느끼게 해 준 세상이었다. 이 두 가지 목표를 만족시키기 위해 여행을 계획하였고, 학교 캠퍼스 투어를 더불어 영화 촬영지 탐방, 해리포터와 저주받은 아이 연극 관람, 워너 브라더스 스튜디오 투어 등 일정을 정해진 시간 안에 완료하였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단순히 즐기는 마음으로 런던을 경험하는 것보다는 "15년 동안 못한 일들을 끝내는" 것처럼 서두르듯이 발을 희생시켜 가며 애쓴 것 같은 아쉬움도 있었다. 지나고 나면 모든 순간이 기억에 남는 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 일분일초를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 매일 바쁘게 일정을 소화했다.      


킹스턴 대학교는 첫날 저녁에 방문한 런던에서의 첫 번째 학교였다. 킹스 크로스역에서 예쁜 사진을 찍고 싶어 원피스를 입고 갔는데, 저녁이 되자 조금 추웠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아침에 풍요로웠던 기분과는 달리 학교의 첫인상은 다소 어둡게 느껴졌다. 겨울에 런던은 해가 빨리 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6시에도 밤 9시와 같은 느낌이었다. 어두워서였는지 캠퍼스 행사에 참석하려면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안내 표지판도 찾기 어려웠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여겨졌지만 내가 사용할 음대 건물은 이미 문이 닫혀서 구경할 수 없다고 하였고 내 전공과는 상관없는 강의실만 대략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예상보다 빨리 끝난 투어에 아쉬운 마음을 가득 안고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학생 스태프들이 근처에 버스 타고 한국 식당이 많은 뉴몰든에 가보라고 알려줬다. 덕분에 런던에서 첫 저녁으로 맛있는 김치볶음밥도 먹을 수 있었다. 학교 근처에 이렇게 한국 식당이 많은 거리가 있는 줄도 몰랐는데 너무나 위안이 되는 정보였다.  

    

런던에 머무는 일주일 동안 킹스턴 대학교 외에도 두 개의 학교를 더 방문했지만 예상외로 실망의 연속이었다. 이대로 한국에 돌아가기엔 아쉽다는 마음이 피어오르던 찰나, 킹스턴 대학교에 방문했을 때 음악학부 안내를 맡아 함께했던 교수님이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시간이 되면 음대 캠퍼스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마지막 날은 일주일 동안 행여나 변수가 생겨 못다 한 일정을 채우기 위한 빈칸으로 남겨두었고 그동안 둘러본 세 개의 학교 중에 킹스턴이 가장 마음에 들었기에 마지막 날 일정으로 다시 한번 교수님을 만나기로 약속을 잡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런던에서 내린 많은 선택 중에서 가장 만족스럽고 현명한 선택이었다. 음대 캠퍼스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바로 그 건물을 사랑하게 되었다. 영화 속에서만 보았던 백 년 전 유럽의 집과 같았다. 약간 삐걱거리는 계단, 과거를 느낄 수 있는 나무 향기, 방 안에는 두 대의 그랜드 피아노와 창문을 통해 보이는 푸른 숲과 나무, 지저귀는 새소리가 어우러져 나를 한 순간에 20세기 유럽으로 끌어 들었다. 그랜드 피아노와 창문을 동시에 바라보며, 바로 드레스를 입고 공연을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유럽에 와서 처음으로 학교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단순히 캠퍼스 건물이 아름답다고 해서 학교를 선택할 순 없었다. 두 번째로 학교를 방문하여 이전과는 달리 교수님과 개인적으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당시 'LA로 가야 할까, 런던으로 가야 할까'라는 고민도 교수님이 미국인이셔서 솔직하게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는 메모장에 LA와 런던 킹스턴 대학교를 선택했을 때의 장단점을 분석하기도 했다.


이 두 학교는 장단점이 확실히 대조적으로 나타났는데, LA는 장점만큼 단점도 많았고 런던은 나에게 장점만 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조언이나 정보가 더 필요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내가 LA에서 느낀 단점은 불쾌한 길거리 마리화나 냄새, 해가 지면 밖에 나가기 어려움, 이동의 불편함 등이었는데, 이런 단점들은 누군가에게는 견딜만하고 면허가 있다면 차를 이용할 수 있으며 밤에도 쉽게 돌아다닐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런던은 겨울에 해가 빨리 진다'는 객관적인 사실과 '런던의 날씨는 좋지 않다'는 사람들의 말에도 크게 불편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겨우 일주일 살아보고 날씨가 심리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말하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생각보다 런던 날씨가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의 얘기에 너무 경계심을 품은 것 같았다. 또한 한국 내에서 학교의 인지도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총 세 곳의 영국 학교에 합격했지만, 대학 순위만 보면 킹스턴 대학교가 가장 낮았다. 학교를 선택할 때 어떤 사람은 대학 순위, 어떤 사람은 캠퍼스, 어떤 사람은 저렴한 학비를 우선시한다. 나에게는 '이 학교에서 음악을 하면서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학비나 대학 순위와 같은 구체적인 숫자는 없었고, 실제로 학교를 방문했을 때의 느낌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느낌' 안에는 그 지역에서 식사를 하면서 체감했던 물가, 교수님과 대화를 나눌 때의 기분, 캠퍼스를 돌아다닐 때 느꼈던 감정 등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내 삶의 궁극적인 목적과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도 집중해 보기로 했다. 세상에서 무대를 가장 사랑하지만 그것이 내 삶의 목적은 아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술로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싶다. 그것이 글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노래든 악기 연주든 강연이든 강의든 타로 상담이든 나의 예술성을 활용하여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나는 뮤지컬을 사랑하고 영국 음악을 좋아한다. 혼자 여행 다니는 것을 즐기며 음악 다음으로 여행을 가장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런던은 각 도시로 이동하기에도 좋았고 무엇보다 뮤지컬 본고장 웨스트엔드는 나를 들뜨게 했다. 겨울왕국 뮤지컬을 보면서는 내가 엘사 역할을 맡을 수는 없을까 상상해보기도 했다. 뮤지컬 극장에서 노래하는 내 모습, 펍에서 밴드와 함께 공연하는 내 모습 등을 그리며 런던은 나를 꿈꾸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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