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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가연 Jun 08. 2023

나를 설레게 하는 '나'

'그 회사, 그 학교에 맞추지 말고 있는 그대로 나를 보여줘라' 


지원서나 자기소개서를 쓰는 사람에게 흔히 할 수 있는 조언이다. 대다수는 '말이 쉽지'라고 생각할 거다.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나는 대학원 원서 쓰는 일이 즐거웠다. 먼저 나는 한국에서 실용음악과를 나왔기 때문에 입시를 위해 자기소개서를 쓰지 않았다. 보컬 전공 입시는 1분 30초가량의 입시곡 한두 곡이 당락을 좌우한다. 더불어 특별히 면접을 보는 게 아니라, 노래가 끝나고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퇴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 이 학생이 뮤지션으로서 자질이 있는지를 평가한다. 계란프라이 하나 만들 시간이면 몰라도 한 사람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를 하기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다. 


물론 학교별로 학교마다 특성에 맞추어 입시곡을 다르게 선택하는 학생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이 학교는 재즈가 유명해서 해야 한다든데'라든가 '이 학교는 파워풀한 가창력 있는 학생을 좋아한다든데'라는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재즈에 자신이 없을뿐더러 내가 가진 장점은 파워풀함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스타일이 무엇인지 알았고 성인 이후로 꾸준히 공연해 오면서 더 나 자신에 대해 알아갔다. 그 시간이 십 년이 쌓여 대학원 원서 접수를 하며 얼른 나를 보여줄 생각에 설렜다. 


크게 자기소개서와 이력서, 공연 영상을 제출했다. 이력서는 이미 개인 홈페이지에 한국어와 영어로 올려두었으니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 넣으면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지금까지 해온 음악 경험을 세세하게 적으니 9.5 포인트로 A4 1장이 넘었다. 이렇다 할 '경력'이 아니라 '경험'한 모든 것을 적었다. 


이 홈페이지를 즐겨찾기 해두고 이따금씩 클릭하곤 한다. 지금까지 해온 활동을 쭉 한눈에 보고 나면 괜히 마음이 일렁이면서 몽글몽글한 기분이 든다. 경력이 대단하고 화려해서가 아니다. 작디작은 경험 하나하나가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든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서다. 그동안의 나를 통해 앞으로 나아갈 용기와 위로를 받는다. 


심사위원 앞에서 단 2분 안에 당락이 판가름 나던 때와 다르게 대학원은 뮤지션으로서 가진 역량을 최대한 어필할 수 있어 반가웠다. 학교에서 학생을 뽑고자 할 때, 제대로 시간을 들여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알아봐 주길 바라왔다. 하지만 한국 대학 입시는 보컬 전공 3명 뽑는데 천명이 넘게 지원하기도 했으니 현실적으로 불가했다. 


물론 한국 대학에서도 그날 컨디션이 좋지 못해서, 긴장해서, 심사위원이 잠깐 딴생각하고 졸아서 등의 이유로 아깝게 놓치는 실력 있는 학생이 있을 거라 알고 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선 실용음악과를 선택한 이유, 앞으로의 목표와 포부, 추구하는 음악 스타일에 대해 자기소개서나 면접을 통해 확인하고 싶을 거다. 그렇지만 지원자는 천명이 넘고 모집 인원은 매우 적기 때문에 점수를 주기에 애매하거나 더 궁금하지 않은 이상 한 명당 2분 이상 시간 소요할 수 없다. 


그동안 발매했던 음원 중에 가장 좋아하는 곡과 자신 있는 공연 영상을 첨부하며 기분이 좋았다. 자기소개서 역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가', '앞으로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다시 한번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기뻤다. 


지금까지 내 모습이 나를 설레게 한다. 미래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도 과거의 내가 포근함으로 감싸준다.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 온다고, 기회를 잡을 수 있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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