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면에서 본 과거 장면이 마음에 각인되었다.
최면 상담에서 과거의 장면을 돌아볼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게 특정 기억을 떠올리는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무의식의 흐름을 따라갔다. 거의 대부분 학교 캠퍼스 안이었다. 내가 진심으로 행복해했던 장소여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와중에 딱 하나의 과거 장면을 떠올렸다. 정말 예상치 못했던 장면이다. 장소는 기숙사 앞 5분 거리, 다른 펍과 다르게 조용해서 자주 가던 곳이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 속 등장인물 네 명 모두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같이 만났던 장소였다. 이후론 영국인 친구와 둘이서 자주 갔다. 펍 이름도 'Heartbreakers'여서, 영국인 친구도 전 남자친구와 사이가 안 좋을 당시에 '우리 진짜 이 펍 이름 따라 뭐냐'싶었다.
뭔진 몰라도 걔가 웃는 장면이었다. 그게 강했다. 당시에 내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는데, 그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티 내지 마라. 조용히 해라." 따위를 내가 무슨 밀지 전달하듯 말했던 기억이 있다.
둘 다 웃고 있었다. 최면에서 무슨 얘기했는지까지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냥 둘이 웃는 장면, 그거뿐이었다. 과거를 떠올리며 지난 1년 중에 그렇게 맑게 웃어본 적이 있었을까. 그래서 최면받은 것에 감사하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 느낀 신성함, 따뜻함이 생생하다.
이 글을 쓰는데,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울고 있으니 참 기이하다. 그게 아마 최면에서 이 장면이 떠오른 이유일 거다. 양가감정 때문에 마음 편히 회상을 한 적이 없으니, 최면 상태에서만은 행복해했다. 나는 그 느낌이 절실했다. 애증 말고, 아픔 말고, 좋았던 그 순간 그대로 더럽혀지지 않은 상태.
당시 관련된 사진을 거의 모두 즉시 지워서, 남아있는 건 대개 음식 사진이다. 나는 누군가를 한두 달 좋아하고 나면, 사진부터 싹 다 지우는 것이 습관 되어 있다. 설령 사귀었던 사이라도, 사진 하나 남기는 걸 1초도 주저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무조건 지웠어야 하는데 안 지운 사진이 한 장 있다. 그때부터 이건 지금까지와 인생 챕터가 다르단 걸 알아차렸어야 하는데.
지난 5월, 친구와 사우스햄튼에서 만나며 저 펍을 갈까 말까 엄청 고민했다. '내일 괜찮을 거 같으면 가야지'했는데 안 괜찮아서 못 갔다. 다른 펍도 많은데, 굳이 아픈 기억을 들쑤시는 거라 생각했다. 진작 최면 상담을 받아서 그 기분을 맛봤다면, 안 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아픈 기억이 아니라, 행복했던 기억인 줄도 모르고 너무 오랜 시간을 괴로워했다.
기억은 쉽게 편집되고 왜곡된다. 같은 기억을 상대방만 다르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도 계속 달라진다. 최면은 그 당시 느꼈던 그대로, 내 무의식에 남아있는 그대로를 불러일으켜줬다. 의식에선 아프고 괴롭게 느꼈을지 몰라도, 무의식에선 내내 달랐단 걸 알고 나니 자주 웃음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