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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이 사랑

영국이다

비행기 끄적 2

by 이가연

영국이 일본 위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왔다. '그만큼 쉽게 못 가고 머니까 더 그리운 것이 아니냐..'라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현실적으로 5시간은 어떠냐. 기술이 얼른 발전하면 좋겠다. 순간 이동까지도 안 바란다.

잘생긴 영국인 만나고 싶다. 몇 달 살아도 없었으면서 2주 가는데 말이 되냐고? 내가 똑같은 사람을 2년 가까이 좋아하고 있는 것보단 말이 된다. 영국인 남자만 이번에 만나면, 어떻게든 영국 취직에 성공하려 노력할 거 아닌가. 영국인을 만나면 브런치 글도 다 안 지워도 된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했다. 기내에서 소튼 가면 어딜 갈지 적어봤다.
1. 웨스트키 : TGI랑 자라
작년 초에 친구랑 TGI 가서 '기억 덮기'를 시도했는데, 주문도 못하고 일어나서 그냥 다른 데로 갔다. 아직 걔랑 어디 테이블 앉았는지까지 기억하니까 갈 거다. 걔랑 간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자라... 이후에 몇 번 갈 때마다.. 걔가 걸쳐보라고해서 걸쳤던 숄이 파나 찾았는데 안 팔았다. 왜 안 팔아!!! 이젠 가을 시즌이니까 팔지 않을까. 물론 그땐 11월이었고 지금은 9월이긴 하다. 왜 이러냐구요? 걔가 골라줬던 청바지 잃어버린 줄 알고 울었던 작년 여름과, 롱패딩은 엄마가 좀 버리라고해서 버렸다가 30분 만에 울면서 다시 갖고 들어온 작년 겨울의 기억이 있습니다.

살아생전 내가 쇼핑을 하거나 누가 옷을 골라준 일도 엄마밖에 없다. 작년부터 걔가 '아빠의 따뜻한 버전'이었다고 했다. 이야... 두 부모 중에 한 쪽만 있으면 힘들 수 있는데 그게 한 사람 몸에 합쳐져 있는 사람이 어딨어요. (이래서 영국 오빠가 "나는 이제 걔가 존경스러울 정도야."라고 했다.)

2. 파스타
내가 데려갔던 파스타 가게가 있다. 여기도 어디 앉았는지 기억이 난다. 왜 이렇게 기억력이 좋아..

3. 칵테일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디 앉아있다가 내가 걔한테 칵테일을 쏟아서 자리를 어디로 옮겼는지도 기억 난다.

문득 또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여태 언급한 적이 없다. 이런 거까지 걔가 알게 되면 너무 부끄럽기 때문이었다. 어디까지 솔직해질 수 있는지 나도 요즘 놀라는 중이다. 뭐가 계속 에피소드가 더 나온다.

결제를 해야하는데 카드가 갑자기 안 됐었다. 그래서 카드 좀 빌려달라고 해서 결제했다. 그 뒤로도 결제해야하니까 "카드 좀"라고 하는 게 재밌었나보다. 두 번 그러고 난 뒤에, 내가 카드가 하나 더 있었는지 뭔가 다른 방법으로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그러질 않고 그냥 가서 "카드 줘" 이랬다. 지금까지 살면서 부모가 아닌 이상, 누구한테 카드 달라고 한 적이 없다. 그 순간에 그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부모였다니까요. 그리고 이건 쌍방이에요. 걔는 뭐 안 미묘했겠나요. 이건 친구가 아니라, 애를 육아하다가 버리고 간 거예요. 그때는 정말 친구였다. 물론 내 무의식에선 뭔가 피어오르고 있었겠지만, 적어도 나는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거 다른 짝사랑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모종의 사건으로 자각하게 된다. 상당히 아프게 자각했다. 이틀을 밥도 못 먹고 몸살 수준으로 앓았는데, 그 얘기는 나중에 하겠다. 소설에도 그건 생략했다.

쌍노무새끼... 누군가 나의 작년 8월이든 9월이든 12월이든 올해 어느 달이든, 정말 랜덤하게 골라서 내 머릿 속을 들여다본다면, 얘 욕을 안 할 수가 없다. 아무렇게나 골라도 모든 날 모든 순간 생각을 지배당하고 있었으니까. 창원 한달 살기 같은 거 안 한 게 용하다. 글쓰기가 아니라 미치지 않기 위한 발악이었다.

영국이다. 나의 영국, 걔의 영국, 우리의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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