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13 최악의 밤

by 이가연

타로는 그냥 일어나서 호텔 가라고 했다.

5시 반에 펍에 도착해서 오픈 마이크 시작하길 기다렸다. 7시에 라인업 작성을 받고, 8시에 시작한다고 했다. 나는 6시 반부터 이미 매우 졸렸다. 7시 반이 되니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졸려서, 그냥 가는 게 나을지 타로를 봤다.

호텔 가는 게 나아보였다. 계속 있어서 공연을 하게 되어도, 여기가 내가 있을 장소가 아니라고 느낄 거 같았다. 결과는, '얻는 게 없다'가 정확한 해석이었다.

사우스햄튼에서는 그래도 오픈 마이크로 3곡은 하게 해주던데, 엊그제나 오늘이나 2곡이었다. 첫 곡은 '그런 너라도', 두 번째는 '너도, 알겠지'를 불렀다. 둘 다 영상을 굳이 안 확인해보고 싶을 정도로, 부르면서도 별로였다.

내 직감을 좀 잘 믿어주면 좋겠다. 내 노래 부를 분위기가 아니라고 느낀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친구라도 얼굴을 보며 불렀어야하는데, 내 시야에서 안 보이는 옆에 있었다. 그렇게 내가 여기서 이 노래를 부르는 게 안 맞다는 생각이 들면, 집중이 당연히 될리 없다. 그 분위기에서는 팝을 부르고 싶었는데, 엠알은 자작곡만 된다고 했고 피아노가 없었다.

고로 깨달았다. 첫 날 '아직, 너를' 부르며 온몸에 생전 처음 느끼는 전율을 느낀 건, 환경 덕이 크다. 앞에서 이상한 짓 하거나 시끄럽게 하는 관객도 없고, 음향도 엠알과 내 목소리의 밸런스가 맞고 목소리도 잘 들렸다.

그런데 이번엔 음향마저도 정말 엉망이었다. 첫 곡 부르고 내 목소리가 안 들려서, 마이크 소리 좀 키워달라고 요청했다. 그럼에도 별로여서 두 번째 곡은 '마이크가 후진 거냐 진짜 이게 뭐냐' 싶어하며 불렀다.

심지어 영상도 못 건졌다. 첫 곡은 마이크 스탠드가 나를 가려서 망했고, 두 번째 곡은 어떤 사람이 혼자 박수를 너무 이상하게 쳐서 부르는 데도 짜증 났다. 첫 곡은 끝나지도 않았는데 막 환호 소리 내며 박수 쳤다.

그 박수를 이상하게 치던 사람이 제일 끝판왕 빌런이었다. 나에게 한 첫 마디가 노래를 잘 들었다도 아니고, 북한이랑 남한이랑 언어가 같냐는 거였다. 너가 북한 사람이었으면 좋았을텐데 그럼 설득할 수 있었을텐데 했다. 펍이라 시끄러워서 진짜 내가 잘 들은 게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이상한 소리였다... 살면서 앞으로 북한 사람을 보게 될 일은 없을 거라고, 그들은 나라 밖을 못 나간다고 두 번을 말했다. 내가 그렇게 말하거나 말거나 계속 개 짖는 소리를 하자 "한국 사람에게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예요."라고 하고 친구와 같이 펍 밖으로 나갔다.

친구 말로는 공연할 때도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고, 나이도 많은데 나에게 안 좋은 마음 품고 그러는 게 느꺼졌다고 했다. 아니나다를까, 끝나고 나에게 오니 친구가 으억 했다고 했다.

하지만 어떤 여자가 내가 옆에서 하는 말을 듣고는, 따라 나와서 나보고 괜찮냐고 저 사람을 치워버리면 되는 거지 내가 나갈 필요는 없다고 해줘서 고마웠다. 하기사 내가 정색하고 강하게 "한국인에게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라고 했는데, 시끄러워서 다른 말은 안 들렸어도 그 말은 들렸을 거다. 그럼 남자가 대단히 인종차별적인 말을 했거니 하고 신경 쓰였을 거다.

공연 전 말 걸었더니 질문충을 연달아 세 번 만난 것으로, 진지하게 여기서 공연하지 말라는 뜻 아닌가 싶었다. 질문충도 레벨이 있는데, 가장 힘든 레벨로 세 명이었다. 1분에 질문 5-7개 하는 꼴이다. 물어보고 내 답을 들었으면 그거에 대해 문장을 하나라도 해야하는데, 정말 너무 숨 막힌다. 한국어는 질문 2개 연달아 들으면 그즉시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마이너스가 되는 마당에, 연달아 세 명이 나를 가장 높은 레벨로 공격했다. 그래서 타로도 본 건데, 좀 타로 말을 들었어야 했다.

한국에서 내가 무료 오픈 마이크 공연을 하는 데엔 조건이 있다. 이 조건에 대해, 영국 생활하던 당시에도 글로 적어둔 바가 있다. 해외라고 기준을 버려버리면 내 마음이 다친 걸 알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절박해지는 게 이렇게 위험하다. 기준이 없어진다. 영국에서 한 군데라도 공연 경력을 더 쌓는 게 절박해서 오늘도 남아있던 거다. 분명 호텔로 돌아가는 게 나을 거 같아서 타로도 봤다.

나는 분명 여기 몇 달을 살았던 사람이다. 왜 오픈 마이크를 세 번 밖에 안 했겠나. 물론 오자마자 3일 연속 공연한 나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오늘로서 정신 차렸다. 나는 여기서 오늘 같은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다. 무료였어도 첫 날은 관객들의 수준이 높았고 (음악 수준이 아니라 대화 수준이다.), 어제는 뮤지션 대우를 받았다. 오늘은 정말, 내가 노래를 부르는 게 이 장소에 기여한다는 느낌도 못 받았다.

생각보다 내가 대처를 잘한다는 걸 깨달았다. 노래보다 이게 너무 뿌듯하다. 가장 상위급 질문충이라고 혀를 내두르며 어쨌건 그 세 명으로부터 목 졸리는 그 느낌을 받자마자 거의 바로 벗어났다. 막판 또라이 남자를 겪고는, '와 아까 그 최상급 질문충들.. 하늘이 나에게 이 불편한 상황 즉시 벗어나는 훈련을 시킨거구나.' 싶었다. 그 분들이 있었기에 내가 더욱 단호히 자리를 뜰 수 있던 거 아닌가.

유학 생활 내내 나에게 북한 언급하는 사람은 못 봤어서 좀 적잔히 충격 받았다. 50대인지 60대인지 나이가 아주 많았으니 그러려니 한다.

토토로 관람을 제외하고 적잖이 고생한 하루였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부터 이미 발이 아팠으며, 친구 지각으로 너무 열 받아서 주위 분산시키기도 어려웠다. 연극 끝나고는 너무 피곤해서, 예쁜데 세 군데 알아뒀는데 평범하디 평범한 이 펍으로 곧장 오게 됐다. 와서는 기다리는 게 너무 졸리고 힘들었고, 졸음 깨려고 이 사람 저 사람 오픈 마이크하려 온 사람들에게 말 걸었는데 죄다 질문충이었다. 보통 나에게 무슨 장르 하냐? 물어서 내가 대답했으면 본인도 무슨 장르한다고 말을 한다. 그게 정상이다. 너 무슨 장르해? 어디서 왔어? 얼마나 있어? 등 아무리 봐도 그 속도가 1분에 7개 물어봤다. 대답을 거의 듣지도 않고 말 자르듯 바로 다음 질문하는 아주 최상위급 질문충이다. 스피드 퀴즈하는 줄 알았다. 전혀 안 궁금하면서 그냥 막 공격하는 거다.

본인에게 불편한 상황을 즉시 피할 수 있는 스킬은 ADHD에게 너무 너무 필수 스킬이다. 안 그러면 폭발해버린다. 이게 탑재되어있단 걸 깨닫고 마음이 좀 놓였달까. 그냥 나랑 안 맞는 질문충은 그냥 그 즉시 자리를 뜨면 그만이고, 무례한 사람은 한 마디 하고 뜨면 그만이다. 솔직히 내 얼굴 인상만 보면 다 받아줄 거 같이 생겼는데, 참 잘하는 거 같다. 한국인 중에는 특히 더 아무나 가진 능력 아니다. 이건 영어 실력과 별개다.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기분 나쁜 상황에서 한 마디 하고 나가는 거 어렵다. 영어 문화권 마인드까지 탑재되어 있단 생각이 많이 든다.

노래도 집중 못 하고, 심지어 영상도 엉망이고, 막판엔 제대로 기분 나쁜 경험까지 하고 언뜻 보면 최악의 밤이었다. 너무 힘들어서 토토로 연극 본 게 불과 몇 시간 전이 아니라, 한참 전 같다.

그래도 확실히 배운 점이 있다면, 나를 믿어줄 거다. 내 직감에 타로까지 더해지면, 무당이 따로 없는 거 같다. 분명 그 쪽 감각이 있다. 나를 더 믿어주기만 하면 된다. 뚜렷한 증거가 당장 눈에 안 보여도, 내 몸이, 직감이 반응하면 그냥 그걸 따라가면 된다. 당장 뭐라 설명할 수 없어도 좋다. 나중에 다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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