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크아웃 시간을 11시에서 12시로 늘렸다. 호텔 안내 책자에 요청하면 상황 봐서 가능하다고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3일 연속 공연은 무리였다. 특히 어제가 문제였다. 감정 소모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그게 제일 큰 소모다.
찾아보니 어제 파스타 맛집은, 미슐랭 별이 있는 게 아니라 미슐랭에서 가성비 맛집으로 뽑아준 거였다. 가게에 미슐랭이라 써있으니 헷갈릴만 했다. 어쩐지 가격이 너무 괜찮았다. 다음에 런던 오면 제일 먼저 갈 거다. 어차피 런던만 가면 꼭 가는 코벤트 가든에 위치하고 있다.
어제 덕분에, 엄청 졸릴 때 노래해도 노래는 나온다는 걸 발견했다. 하기사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데도 어찌 심히 졸릴 수 있겠나. 30분 남았는데도 너무 졸려서 기다리기 힘들어서 호텔 가는 걸 고려했을 정도였는데, 끝나고 나니 잠이 다 깼다.
영상도 아예 못 건진 건 아니다. 첫 곡은 마이크 스탠드 때문에 아웃이지만, 두 번째 곡 1절은 괜찮다. 1절 끝나자마자 그 이상한 아저씨가 아주 이상하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간주 동안 그 이상한 박수를 들으며 '이번 곡도 영상 망했구나' 생각했다.
문득 영국에서는 불편한 상황에서 "노 잉글리시"하면 된다는 생각이 났다. 물론 이미 영어를 유창하게 한 뒤에 그러면 좀 그렇긴 하다. 그런 수동적 대처는 나중에 '그 때 한마디 할 걸'하고 열받는다.
노래 연습하고 싶다. 그동안 연습을 잘 안 했던 건, 필요성이 크게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연을 자주 해야 한다. 실전에서 깨닫는 게 있어야, 다음 공연에서 더 잘하고 싶어서 연습을 하게 된다.
캐리어를 끌고 기차 타러 가는 길에, 또 누군가가 "Do you need help?"하며 같이 들어줬다. 이번엔 여자여서 같이 들었다. 한국도 그러나.. 생각해 보니 편안하게 공항 버스만 타고 다녀서, 무거운 캐리어 끌고다닐 일이 없었어서 이런 일이 없었을 수 있겠다. 괜히 '한국은 죽어도 안 개입할 걸'할 필요는 없다.
오늘 본머스에 체크인하여 토요일까지 있는다. 무려 5박 6일이다. 그동안 8월, 12월, 5월 전부 사우스햄튼에 며칠은 숙박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없다. 걔 생각하면서 또 지지리 궁상 염병을 하고 있을 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매거진 '이 사랑'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제 안 그런다는 걸 알았다. 앞으로는 편안하게 제 2의 고향에 숙박하면 되겠다.
어차피 본머스 호텔에서 사우스햄튼 시티 센터까지 1시간 밖에 안 걸린다. 목요일에 갈 예정인데, 그 전에 한 번 갈 수도 있다. '이럴 거면 그냥 소튼 숙박하지 왜...' 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동안 어지간히 지지리 궁상이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이해한다. 걔가 아니더라도 애증의 도시다.
지금은 기차 안이다. 이 기차는 사우스햄튼, 브로큰허스트를 지나 본머스에 도착한다. 브로큰허스트도 한 번 가봤는데 당나귀들 보고 싶어서 또 갈 수도 있다. 뒷 좌석에서 계속 통화하여 캐리어를 한참 끌고 자리를 옮겼다. 자리를 옮겨도 시끄러울 수 있단 것도 알고, 통화 소리가 비상식적으로 컸던 것도 아니다. ADHD라서 남들에겐 별 소리 아니더라도 칠판 긁는 소리처럼 너무 거슬리는 거다. 작은 소리도 누가 내 위장을 막 긁는 기분이라, 자리가 있든 없든 일어나서 시도를 해야한다. 시도를 하고도 실패하는 건 가능해도, 절대 가만히 못 있는다. 그런데 이런 ADHD 특성이 발전을 만든다. 삶에 있어 가만히 있는 거보다 움직이는 게 늘 낫다. 하다못해 커플들도 장기 연애 하면 권태기가 온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하도 인생이 버라이어티하여 권태기 같은 거 안 올 자신이 아주 있다. '아오. 역시 ADHD라서 저 정도 전화 소리도 못 참네.' 싶었지만, 지금은 편안해졌다. 기본적으로 KTX 만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