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22 본머스에서 누드 드로잉

by 이가연

역시 매우 만족스러웠다.

부끄럽다고 생각할 여지가 전혀 없다. 모델은 다들 누드모델 일에 자부심이 있는 사람들이다. 참여하는 사람들도 예술에 진심이다. 물론 나 빼고 전부 젊은 남자들로만 드글드글 했으면 의심했을 수도 있다. 이번이 세 번째인데,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 젊은 여자나 노년층 위주다.

파리에서 했던 건 미술 클래스였다. 내가 그리고 있으면 뒤에서 슬쩍 선생님이 오셔서 봐주셨다. 그런데 작년 윈체스터랑 이번 본머스에서 한 건, untutored 세션으로 선생님이 없고 진행자만 있다. 진행자는 스톱워치로 시간을 재고, 몇 분 남았는지 알려준다.

세션은 2시간이었고, 시간이 정말 금방 갔다. 처음에는 2분 크로키 3장으로 시작했다. 그다음은 5분으로 넘어갔다. 역시 나는 2분과 5분이 제일 재밌다. 2분은 스릴 있고, 5분은 스릴도 있고 더 완성도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좋다. 그다음은 10분이었는데, 사실상 5분 주나 10분 주나 그림에 별 차이는 안 났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들은 디테일하게 수정하겠지만, 나는 뭘 더 손 봐야 할지 잘 모른다.

오늘 모델은 여자였다. 파리에서는 여자와 남자 모델 두 명이었는데, 그래서 두 사람 간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물론 앞으로 비용적으로 모델이 두 명이기는 어려울 거 같다. 오늘 참여비는 2만 3천 원이었고, 윈체스터에서도 비슷했는데, 파리에서는 훨씬 비쌌다. 나도 이 가격대가 제일 부담 없는데, 선생님이 좀 봐주는 거면 더 좋을 거 같긴 하다.

진행자가 사람들 그림 그리는 모습 사진 찍는데 혹시 싫은 사람은 말하라 하고, 모델에게 모델은 안 찍힌다고 말해주는 그 배려가 좋았다. 또한 막판엔 20분 포즈도 있었는데, 모델에게 중간에 힘들면 편하게 스트레칭해도 된다고 무리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것도 진행자의 배려가 느껴졌다.



그 틈을 타서, 진행자에게 내 핸드폰으로 사진 좀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전에 파리에서 찍은 사진은, 너무 집중해서 무표정으로 심각하게 찍혔던 기억이 있어 이번엔 좀 웃으려 노력했다.

이번에는 벌써 세 번째라고, '내가 잘 그리든 못 그리든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걸 알아서 좀 힘 빼고 했다. 끝나고 사람들이 잘 그렸다고 말해줘서 좋았다. 그러곤 다른 사람들 것을 봤는데, 일단 연필로 그린 사람은 거의 나 밖에 없고 다들 집에서 채색 도구를 가져왔다. 그래도 종이, 연필, 지우개, 파스텔 등은 제공되었다. '아니 2분 동안 나는 아주 정신없이 겨우 저거 그렸는데, 저 사람은 채색까지 했어?'싶은 사람도 있었다.

모델이 벗고 있어서 부끄러울 일은 없고, 본인이 그림을 못 그려서 부끄러울 수는 있다.

참고로, 아무리 누드 드로잉이라 해도 모델이 중요부위를 그다지 노출하고 있지 않다. 한국인들은 미대생이 아니고서야, 누드 드로잉을 접할 일이 거의 절대 없기 때문에 궁금증 해소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내가 그린 그림과 같이, 보통 저렇게 다리나 발로 가려진다.



파리에서 처음 그 두 누드모델을 봤을 때는, 사람 몸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싶어서 경이로움을 느꼈다. 오늘은 특히 마지막에 소파에 기대 누워 있던 20분 포즈가 기억에 남는다. 아름다웠다. 그 포즈를 보면서는,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한국은 누드모델에 대한 인식이 한참 후졌을 것이 분명하여, 영국 한정 가능하다. 나는 포즈를 취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ADHD라서 계속 눈만 껌뻑껌뻑하며 똑같은 자세를 취해야하는 게 더 문제다.)

내가 그린 것보다, 다른 사람이 그린 걸 봐야 제대로 이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나는 보이는 걸 제대로 그리기에 바쁜데, 저 그림에서는 감정이 느껴진다. 뭔가 몽글몽글, 뭉클뭉클하다.

토요일 오전에도 세션이 있다는데, 한 번 더 할까 고민이다. 오늘처럼 토요일에도 날씨가 안 좋다면 무조건 한 번 더 할만하다. 앞으로 영국 올 때마다 하려 한다. 한국 같은 보수적인 나라는 상상도 안 되겠지만, 여기는 런던 같은 대도시뿐만 아니라 사우스햄튼, 본머스 급 도시면 다 이런 누드 드로잉할 수 있는 곳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오늘 아침부터 밤까지 내내 날씨가 안 좋았다. 영국 날씨는 하루 안에도 변화무쌍한데, 이러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아침에는 아쿠아리움에서 즐겁게 보내고, 저녁에는 드로잉 세션에서 행복하게 보내서 감사하다. 날씨가 안 좋으면, 실내에서 영국에서만 즐길 수 있는 걸 하면 된다. 주말에 친구랑 만나게 될 텐데, 설령 날씨가 안 좋아도 계속 펍에서 수다할 거다.

영국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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