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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24 불편하게 할까봐

by 이가연

에비뉴 캠퍼스에서 커리어 컨설팅이 끝나고는 15분 걸어서 하이필드 캠퍼스로 이동했다. 에비뉴는 지난 5월 커리어 상담 받으며 처음 와봤다. 좋았어서 또 일부러 여기로 신청했다. 다음주부터 학기 시작이라, 거의 아무도 안 걸어다니고 평화로워서 좋았다.

도서관 카페에서 서울에서도 만난 적 있는 직원과 잠깐 얘기한 뒤,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졸업생도 간단한 폼을 작성하면 들어갈 수 있다. 엔지니어링 책장에서 제일 얇은 책을 꺼내봤다. 그만 알아보기로 했다. 이게 영어야 수학이야.

마지막 약속을 위해 음대 사무실로 갔다. 미팅이 아직 안 끝났다고 하기에 문 앞에서 기다렸다. 지나 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문이 안 열렸다. 아까 유효 기간 만료된지 1년 된 학생증을 찍었을 때 에비뉴 캠퍼스에서는 출입 거부 떠서 안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여긴 문이 열려서 놀랐다. 역시 이래서 일단 다 해봐야 된다.

자세히 들여다봤는데, 이 교수도 어지간히 나에게 질문 많이 한다. 한 30분 만났는데, 적어도 20번은 들었다. 그런데 이미 2년이나 아는 사이이니 낫다. 처음 만난 사람이 그럴 때는 무차별 공격 받게 느껴서 목 졸리는 거다. 이렇게 꽤나 아는 사람은, 그게 다 나를 생각해서 물어보는 거란 걸 알아서 1시간도 아니고 몇 분은 괜찮다.

이 그나마 괜찮은 데이터도 소중하고 힌트가 된다. 물론 어차피 영국 올 때만 잠깐 만나는 걸 알아서 참은 것도 있다. 그런데 이 분은, 나에게 질문을 와다다 함으로써 내가 가진 문제를 해결해주려하고, 실제로 해결 능력이 있기 때문에 내가 흔쾌히 대답하는 거다.

"너 박사를 할 거야, 일을 할 거야. 뭐가 먼저야. 박사 하려는 키워드들이 뭐야. 다 말해봐. 영국 일하러 올 거면 뭔 비자로 와." 등이다. 내가 워홀 비자 신청하면 돈만 내면 나온다 하니, 홍콩은 그게 있다가 없어져서 다 없어진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 식으로 내가 뭐라 답했으면 한 문장이라도 그에 대해 덧붙이고 다음 질문을 하면 낫다. 아니... 그게 지극히 매우 정상이다.

내가 새로운 사람이랑 말하는 걸 얼마나 좋아하고 못 참는데, 이렇게 극혐 극혐, 불안 불안에 떠는 게 아깝다. 오늘 커리어 상담 전에도 또 질문 공격 당할까봐 좀 심히 걱정했다. 급똥 신호라고 온 척 해서 "Sorry I'm feeling really uncomfortable bye"하고 뛰어 나가는 시뮬레이션까지 돌렸다. 그렇듯 불편감이 극.심.하.다.

그런데 오늘 컨설턴트는 한 번 슬쩍 얘기했는데 바로 받아들여줬고, 교수는 말 안해도 자리를 뜨고 싶게 불편하지 않단 걸 발견했다. 이런 데이터가 더 쌓여야 한다. 이건 마인드 컨트롤로 될 게 아니라, 안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내가 인간에 대한 신뢰가 다시 쌓이는 거 아닌가. 지금은 신뢰 상태가 쓰레기 바닥을 기어댕긴다. 감사하게도 이런 경험이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될 수 있다. 첫째, ADHD를 진단 받았든 안 받았든 있는 사람만 맞다는 건 이미 알았지만, 다시금 확인되었다.

둘째, 나한테 질문을 아무리 해도, 그게 질문을 통해 내 상태를 파악하고 나를 도와주려는 사람이면 괜찮다. 당연하다. 그 의도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이딴 질문을 왜 하는지, 내가 그런 질문을 얼마나 많이 들었을지 생각을 안 하는 건지, 그걸 몰라서 내가 이러고 있는 거 같은지 싶어서 계속 욱했다. (의사가 내가 지능이 높아서 그런 거라고 했던 말을 계속 되뇌이며 다스려야 된다.)

마지막은 하나 물어봐서 내가 대답했으면, 그거에 대해 한 문장이라도 이어 붙이는 게 필수다. 내가 대답했는데 그에 대한 대꾸 한마디 없이 바로 질문하면 한국어고 영어고 일본어고 기절하게 싫으니 다 박멸할 거다... 그런 경우는 아무리 그걸 피하려고 나도 억지로 질문해도, 소용 없다. 지 대답에 질문을 또 붙여서 똑같이 반복이다.

갑자기 급성 스트레스라 이 글을 괜히 쓰는 거 같지만, 이걸 확실히 알아두기 위해 오늘 만남들이 있던 거 같다. 내가 어떤 사람은 가능하고, 어떤 사람은 절대 안 되는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 어정쩡하게 열어뒀을 때가 힘든 것이다. 나를 지키려면 아주 냉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네 명이랑 대화하고 왔더니, 별로 걸은 것도 없는데 심히 피곤하다. 죄다 긴장 상태였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나를 불편하게 할까봐 늘 그렇다. 적절히 대처해야하기 때문에 항상 방패를 들고 돌아다니느라 팔 떨어지게 아픈 그런 거랄까. 안 그럴 수 있다면 참 좋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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