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고통 후불제 지불하겠습니다.
드문드문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배 아래로 감각이 없음에도 절개한 느낌이 생생히 드는 듯했다. 그냥 잠을 자고 싶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계속 자려고 노력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전날 유도분만을 하며 밤을 새운 탓도 있었다. 출산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긴장감 같은 것들이 한 번에 아기와 같이 내 몸속을 빠져나온 것도 이 피곤함에 일조했으리라 생각했다.
몇 시간쯤 지났을까 헤롱거리는 나를 두고 남편은 괜찮냐고 물어봤다. 그냥 누워있겠다고만 반복해 얘기했다. 아기모습이 궁금했지만 그냥 쉬고 싶었다. 간호사님들은 몇 번이고 입원실에 들어와 내 배를 푹푹 누르셨다. 자궁에 남은 오로와 찌꺼기등을 빼내기 위해서였다. 그때마다 진통만큼의 고통이 내게 왔다. 금방 수술부위를 봉합했는데 이렇게 누르다간 다 터질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하루동안은 못 움직이는 나를 위해 간호사님들은 기저귀를 갈듯 내 패드를 갈아 주셨다.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정말 대단하시다 생각했다. 고마웠다.
간호사님은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고 하셨다. 다리도 허리도 계속 움직이라고 하셨다. 그래야 내일 아기를 보러 갈 수 있다고 하셨다. 하반신 마취가 깨고 슬슬 다리에 감각이 들기 시작했다.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고 옆으로 돌아눕기를 반복했다. 출산할 때 아기를 못 봐서 미안한 마음이 꿈틀거렸다. 내일은 꼭 아기를 보러 가야만 했다.
남편이 휴대폰으로 찍은 출산직후의 아기는 나를 꼭 닮아 있었다. 아니 내 친동생이 얼굴이 보이기도 했다. 남편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나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기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정말 내 뱃속에 있다가 저렇게 큰 아이가 태어난 게 맞나. 생명의 신비를 다시 한번 느꼈다.
1월에 출산을 한 탓에 병원 입원실은 전체 만실이었다. 1인실을 기대했는데 6인실에서 당분간 지내야 한다고 했다. 커튼 칸막이로 대충 가려만 놨지만 좁고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특히 남편은 간이 보호자 침대에서 생활해야 했는데 새벽에 남편이 자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핑 돌았다. 나의 보호자로서 저렇게 새우잠을 자는 남편이 대견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다인실의 제일 고역은 밥냄새였다. 점심이 지난 후 정신이 들어 저녁시간이 되니 환자들과 보호자들 밥이 나왔다. 남편밥은 밥이 나왔고 난 밥이 없었다. 난 소변줄을 빼고 스스로 화장실에 다녀와야 식사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 전날 마지막 끼니가 두유였고 24시간을 굶었다. 못 먹는 다는데 음식 냄새가 나니 짜증이 났다. 남편은 배가 고팠는지 허겁지겁 배식판을 다 비워냈다. 난 등을 돌려 누웠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계속 몸을 뒤집다가 남편에게 일어나 보겠다고 했다. 소변줄은 새벽에 이미 뺀 상태였기에 어차피 화장실도 가야 했다. 그간 제왕절개 후 일어날 때 장기가 쏟아지는 느낌이라느니 고통 후불제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다느니 다음날 일어나는 게 제일 힘들고 아프다고 많은 후기를 봐왔다. sns에도 제왕절개 후 고통스럽게 일어나는 산모들의 영상을 힘들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움직여야 했다. 저녁면회시간까지 걷는 연습을 해야 아기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괜찮겠냐고 수십 번을 되물었다. 해보겠다고 답했다. 천천히 앉아 봤다. 수술부위에 통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뭔가 수술부위가 터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는 덜 아팠다. 장기가 쏟아지는 느낌이라고들 하던데 그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몇 분 앉아있다가 다시 눕고 다시 일어나고를 몇 시간 반복했다. 화장실을 가야 금식이 해제된다는 말에 빨리 일어나고 싶었다. 점심쯤 돼서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찌푸둥해서 기지개를 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허리도 제대로 피지 못할 고통에 꼬부랑 할머니처럼 등을 굽힌 채 화장실을 갔다.
저녁엔 밥이 나왔다. 미음이었다. 제왕절개 후엔 미음을 먹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실망하거나 하진 않았다. 맛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오랜만에 먹는 미음맛은 아픈 채로 약 48시간의 공복에 먹는데도 맛이 없었다. 누구는 출산 후 먹는 첫 미음이 평생 기억될 정도로 맛있다고 하던데. 그건 다 출산의 아픔에 허덕인 뇌가 착각을 일으킨 게 분명해 보였다. 미음에 간장을 있는 대로 다 부어 넣고 먹어도 반정도 먹다 남기고 말았다.
저녁 7시, 드디어 아기를 보러 갈 수 있었다. 6시 50분이 되자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등 굽은 할머니가 되어 신생아실이 있는 층으로 갔다. 진통제를 치렁치렁 달고 링거대를 끌며 내 새끼를 보러 가겠다는 나의 의지가 웃기면서도 신기했다. 그전에 없던 의지였다.
이름표를 보여주고 신생아실 유리창을 통해 아기를 볼 수 있었다. 남편이 찍어준 사진보다 훨씬 작았다. 처음 보자 말자 한 말은 "왜 이렇게 작아?"였다. 사진으로 볼 때 보다 훨씬 더 작은 그 생명체는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뭔지 모를 감동이 밀려왔다. 저 작은아이가 세상밖으로 나오겠다고 얼마나 애를 썼나. 내가 힘들어한 그 하루의 시간 동안 저 작은 아이도 힘들었을걸 생각하니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정말 장하다 내 새끼!
다음날부터는 아침저녁으로 아기 면회를 갈 수 있었다. 게다가 3일째 되는 날 저녁부터는 수유콜이 왔다. 아기를 직접 만지고 안을 수 있었다. 내가 낳은 아이인데 내 품에 안기까지 3일이나 걸린다니. 이상한 시스템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그 시스템 덕에 좀 덜 힘들게 회복할 수 있었지 않았나 이제야 생각이 든다.
아기에게 처음 젖을 물렸다. 그 느낌과 감동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아직은 어설픈 엄마의 손길에 얼마 안 있다가 으앙! 하고 울어 버리던 모습이 우리 아기와의 첫 만남이었다. 아기가 젖을 문다고 바로 모유가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젖병으로 먹는 것보다 모유수유를 하는 게 아기에겐 100배 이상의 힘이 든다고 했다. 그래서 자연스레 편한 걸 찾는 거라고 했다. 우리 아기는 그렇게 엄마 젖을 거부하고 젖병을 찾았다. 태어난 지 3일 만에 유두혼동이 와서 힘들어하는 아이를 보며 나도 속으로 엉엉 울었다.
제왕절개를 했기에 일주일을 입원해 있어야 했다. 우리는 입원 4일째가 돼서야 1인실로 옮길 수 있었다. 그간 간이침대에서 쪽잠 자며 버텨준 남편에게 미안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옮겨달라고 간호사실을 매일 들락 거렸는데 다행히 4일째 되는 날 급하게 방이 나왔다고 했다. 짐을 챙겨 들고 1인실로 이사를 했다. 화장실도 딸려있는 원룸정도 되는 방이었다. 공용 화장실과 샤워실을 이용해야 했기에 남편은 며칠을 싰지 못했고 난 화장실을 제대로 이용하기 힘들었다. 개인 화장실이란 우리에게 천국 그 자체였다. 남편은 이사를 끝내자 말자 한참을 싰고 나와 곧바로 잠이 들었다. 얼마나 피곤하고 고됐으면 저렇게 잠이 들까 생각하며 그간 고생한 남편에게 너무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시댁에서, 친정에서 연락이 계속 왔다. 괜찮냐고. 남편은 내가 헤롱헤롱했던 그날 내내 어른들께 안부 전화를 하느라 바빴다고 했다. 정신을 좀 차리고 다인실에서 1인실로 옮기고 나니 엄마생각이 났다. 엄마가 되어봐야 엄마의 마음을 안다고 했던가. 새삼 엄마가 보고 싶고 그리워졌다. 나를 낳을 때도 엄마는 이렇게 힘들었을까. 나를 낳고도 엄마는 나를 보며 감격스러워했을까. 그렇게 애지중지 사랑하며 키운 내가 속상하게 했을 땐 얼마나 배신감이 들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엄마생각에 밤새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제 나는 엄마가 되었다. 철부지 같던 내 남편도 아빠가 되었다. 우리 부부는 부모가 되었다. 앞으로 얼마나 힘들고 고된 일이 있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육아의 힘듦을 sns로 이미 간접 경험했기에 잔뜩 긴장을 했다. 하지만 다들 입모아 얘기한다. 그 고통과 힘듦을 다 감내할 만큼 아기가 너무 사랑스럽다고. 너무 이쁘다고. 그러니 우리 가족 한번 열심히 알콩달콩 살아보자! 아기가 태어나 새로운 시작이 열린 거 같아 벅차고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