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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doseeker Apr 21. 2019

쓰루노유 다이어리 - 7

쓰루노유 데일리 리포트



적절한 크기로 자른 캔버스 천 네 장, 캔버스가 씌어져 있는 작은 정사각형 나무틀 두 점, 작은 용기에 옮겨 담아 가져온 과슈 열 두 색, 붓 열 자루, 수채화 파레트, 플라스틱 파레트와 그 위에 붙여서 쓸 종이 파레트 몇 장, 캔손 수채화용 스케치북 두 권, 그 외에 자잘한 연필이나 지우개, 칼 등등의 도구들. 쓰루노유에서 이 주간 작업하기 위해 가져온 작업 도구들의 전부다. 캐리어의 절반의 공간을 차지한 덕에 (나머지 절반은 일주일 치 음식으로 채웠다) 여기서는 거의 단벌신사로 지내고 있다. 어차피 하루 일과라고 해 봐야 a.house의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대부분이고, 패션쇼를 하면서 여행 인증샷을 찍는 데에는 취미가 없으니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쓰루노유에서의 나의 하루 일과는 마치 성실한 학생의 시간표처럼 흘러간다. 오전 여섯시 반쯤 일어나 가볍게 노천탕에 들어갔다 나와 a.house로 출근해 부엌에서 커피와 함께 간단하게 아침을 해 먹고, 쓰루노유 온천 주변의 숲길을 따라 산책을 조금 하다 다시 카페로 돌아올 즈음이면 대개 이토상도 출근해서 커피를 끓이고 있다. 이토상과 조금 이야기를 나누다(하루를 시작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카메짱에 대한 것들이다) 카페 카운터 앞 한편에 마련된 작업대에 앉아 어제 저녁에 쓴 글을 바탕으로 펜과 수채물감으로 두 세 장의 일러스트를 그린다. 브런치에 글을 업로드 해야 하므로 그림을 보기 좋게 칼로 재단하고, 햇빛이 잘 비치는 곳으로 가져가 사진을 찍고, 노트북으로 옮겨 포토샵으로 보정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어제 쓴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들을 수정 한 뒤, 이미지를 넣어 브런치에 업로드하는 일과, 이메일로 날아온 이런저런 서류작업들을 마치면 시계는 오전 11시나 12시를 가리키고 있다. 카페 홀에는 오전에도 이따금 손님들이 많은 경우가 있으므로, 점심은 카페 부엌에서 해결한다. 정말이지 다양한 즉석 조리 식품(비빔밥, 제육덮밥, 심지어는 부대찌개 등등)을 가져왔기 때문에 쓰루노유에서 일주일을 보내는 내내 나는 단 한 번도 하루에 같은 메뉴를 두 번 먹은 적이 없다. 이토상은 이 부분에 대해 무척 놀라워했다. 식당에서도 먹어본 적 없는 <평양식 온반>을 오직 전자레인지만으로 오 분 만에 만들어 먹을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점심을 먹고 나면 두 번째 산책에 나선다. 루트는 정해져있다. 정오 즈음에는 쓰루노유 온천 뒤편의 숲길의 볕이 좋기 때문에 주전부리 몇 개와 커피를 내려 보온병에 담아 나선다. 아직 눈이 충분히 녹지 않아 걸을 때마다 서벅거리는 숲길을 따라 걷다 볕이 잘 드는 탁 트인 둔덕에 올라 떨어진 삼나무 가지들을 모아 방석 삼아 앉아 커피를 마신다. 가끔은 발을 잘못 디디는 바람에 무릎까지 눈에 빠져 숙소로 돌아와 젖은 양말을 갈아 신어야 하는 경우도 생기지만 개의치 않는다. 산책이 끝나면 오후 한 시쯤이다. 다시 카페로 돌아와 오후에는 캔버스 위에 작업을 시작한다. 수채 작업보다 시간과 노력이 두-세배 정도 더 들어가는 작업이다. 작업을 하다보면 종종 손님들이 다가와 궁금한 눈빛으로 말을 건네지만, 나는 일본어라곤 인사말과 네, 아니오, 그리고 오코노미야끼, 타코야끼 정도밖에 모르는 수준이기 때문에 내가 간절한 눈빛으로 이토상을 바라보면, 이토상은 한-일, 일-한 동시통역을 시작한다. 내가 이곳에 온 사정과, 작업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고 난 손님들은 내게 “간바레!(화이팅!)”라고 말하며 미소를 지어주곤 한다. 온천만큼이나 따뜻한 사람들.      





카페 홀이 너무 바빠져서 이토상이 벅차 보이면, 사람들이 떠난 자리를 치워주거나 설거지 정도는 도우려고 했지만, 카페는 대체로 무척 한가했다. 아마도 이번 주말부터 일본 황금연휴라고 하는 긴 휴일이 시작되면 손님들이 많아질 거라고 이토상은 말했다. 아무튼 그렇게 카페가 닫는 오후 다섯 시까지 작업을 계속 한다. 서울에서 그랬던 것처럼 매일 쉬는 날 없이 작업을 하고 있지만, 수채 작업은 열 장 째 작업한 반면에 가져온 캔버스 천은 이제 고작 두 장 째 진행 중이다. 크기부터 차이가 있고, 작업 방식도 다르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이따금 작업이 완성되는데 투입되어야만 하는 시간과 노력이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 있다는 걸 깨달을 때면 더 지쳐버리기 때문에, 붓을 움직이는 데에 일단 집중한다. 다섯 시가 되면, 이토상이 카페를 마감하는 걸 돕고, 함께 저녁을 먹는다. 이토상은 쓰루노유 인근의 스키장 리조트에서 출퇴근하기 때문에 작은 상자처럼 생긴 스즈키 웨건을 운전해 퇴근하고, 나는 잠시 노천탕에 몸을 담갔다가 다시 작업대에 앉아 하루를 정리하는 글을 쓴다. 그러고 나서 아홉시나 열시 쯤 밤하늘을 보며 목욕을 하고 마이클 핀들의 <숲속의 은둔자>를 조금 읽다 잠드는 것이 하루 일과의 끝이다.      



좋아하는 일이 일이 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그 이상의 스릴이 있다. 내 앞에 펼쳐진 시간들의 눈금에 아무 표시도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늘 설렌다. 게다가, 지속할 수 있는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는 쾌감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일들도 가능하게 만들어 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사실 이런저런 거창하고 대단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나는 정말 운 좋게도 내 삶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조금 일찍 알게 됐고, 그러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아침 산책길.



“아무 표시도 되지 않은 순수한 시간들은 보물과도 같다. 반면, 단위시간들의 행렬은 킬로미터를 주파하는 것보다 더 우리를 정신 없게 만든다. 우리의 눈은 아름다운 광경에 결코 질리는 법이 없다. 사물은 우리가 더 깊이 알면 알수록, 그만큼 더욱 아름다워진다.” - 실뱅테송, <희망의 발견 : 시베리아의 숲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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