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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doseeker Sep 18. 2018

숲, 온천 그리고 불꽃 (1)

5일 간의 일본 아키타 유랑기 < 글, 그림 | 김선우 >

ⓒ 2018. 김선우


태풍 두 개가 나란히 한국과 일본 두 나라를 휘젓고 유유히 빠져나가던 올해 여름의 끝자락에 부슬부슬 비를 뿌리는 먹구름을 뚫고 도쿄로 향했다. 일본은 그동안 일, 여행 등의 수많은 이유로 오간 덕분에 도착하고 나서도 이제는 외국에 왔다는 큰 감흥은 없다고는 해도, 긴 여행이든, 짧은 여행이든 여행을 준비하며 캐리어에 옷가지를 쑤셔 넣고, 행여 빠뜨리는 것이 없는지 두세 번씩 다시 열어보는 그 순간-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오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시간-은 이방인의 시선과 혀의 긴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일상과는 다른 제 삼의 감각을 열어준다. 


이번 여행은 한국과 일본의 예술가가 서로 교류하는 목적으로 작년 일본 아키타 지역에서 진행된, 인페인터글로벌이 주최한 <한·일 크리에이터 교류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일이 인연이 되어 다시 아키타에 오게 된 것이었다. 이번 여정 또한 지난 프로젝트만큼이나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도쿄에서 신칸센을 타고 일본 북서쪽의 토호쿠 지방에 속해있는 아키타로 이동해, 다시 대중교통을 이용해 뉴토온천향(乳頭温泉郷)의 규카무라 온천(休暇村)으로 다시 이동한 뒤, 온천장 인근의 숲에서 야외전시를 진행하는 것이 주목적. 일정 중간에는 ‘오마가리(大曲)’라는 마을에서 열리는, 일본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불꽃놀이인 '오마가리 하나비(大曲花火)' 관람을 한다. 일 년에 단 한번 열리는 전국 불꽃놀이 경연대회이며, 일본인들조차도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하다는 초대형 불꽃 축제다.      



ⓒ 2018. 김선우


사실 최근의 나의 시간은 이전에 비해 딱 두 배 정도 더 바쁘고 분주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잡고 있고,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조차 제대로 들여다 볼 새도 없이 시간과 갈등을 빚어나가고 있었다. 마치 무척 빠른 템포의 탭댄스를 추는 것 마냥 위태롭게 써내려갔던 일상 속에서 나는 자꾸만 누군가의 발을 밟고, 제대로 사과도 하지 못한 채로 계속해서 무리한 춤을 추어 나갔다. 스스로에게 실망할 겨를도 없이. 어쩌면 그래서 자꾸 그 분주한 틈바구니 속에서 데이비스 소로나 실뱅 테송의 은둔하는 삶을 동경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소로와 테송 두 작가가 살아간 시대는 한 겹 정도 다르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자동차 경적소리와 무의미한 대화로 가득 찬 콩나물시루 같은 도시로부터 도망쳐 깊은 숲속으로 숨어들었다. 실뱅은 몇 개월간 바이칼 호숫가의 작은 통나무집에서 은거하며 쓴 에세이에서 시간과의 해묵은 갈등을 해결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그의 삶은 언제나 탈출로 시작되어 결국에는 시간과의 경주로 끝나버렸다며. 결과적으로 숲에서의 은둔 생활은 그에게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대하는 방법을 선사한다. 마치 우리 내면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어떤 야생동물을 다시 끄집어 내, 열두 숫자에 못 박혀 버린 우리의 시간들을 난폭하게 해방시키듯이. 그래서 어쩌면 수많은 현자들이 자연 깊은 곳으로 은둔했을지도 모른다. 자연은 그 어떤 갈등도 중재해 줄 수 있는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 



신칸센을 타고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달려 이국의 낯선 숲을 향해 달려가는 와중에, 한편으로는 실뱅이 지냈던 숲 속의 통나무집을 생각하면서도 미처 해결하지 못한 일들과 해결해야만 하는 일들이 수많은 부표처럼 떠올라 종종 오줌 마려운 강아지 마냥 혼자서 안절부절 못하는 상태가 되기도 했지만, 결국 늘 그랬던 것처럼 이렇다 할 결론도 없이 무거운 눈꺼풀이 꼬리를 잇는 생각의 스위치를 내려버리고 말았다.     


ⓒ 2018. 김선우


늦은 오후 도착한 규카무라 온천장은 빽빽한 너도밤나무 숲속 한 가운데에 고립되어 있다시피 위치해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던 날은 비가 꽤 내리고 있었는데, 마치 어느 산중의 고즈넉한 산사를 찾아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신비로운 모습이 온천장의 첫 인상이었다.


ⓒ 2018. 김선우


일정상 도착한 당일부터 온천장에 작품 설치를 해야만 했기 때문에, 우리는 짐을 제대로 풀기도 전에 작품들을 먼저 꺼내 온천장의 로비 한 쪽 벽면을 채워나갔다. 함께한 작가들 모두 작품 설치에는 이골이 난 만큼 베테랑들이었기 때문에-혹은 서둘러 온천에 몸을 담그고 싶은 마음 덕분에-온천장 로비는 순식간에 전시장으로 탈바꿈했다. 이제 이 깊은 숲속의 온천을 찾은 많은 사람들은 바다 건너온 옆 동네 예술가들의 자기 고백을 보게 될 것이다. 거기서 저마다 오순도순 나누게 될 그들만의 이야기를 엿들어 보고만 싶다.     



ⓒ 2018. 김선우


그런 말이 있다. 우리는 두 번 다시 같은 물에 몸을 담그지 못한다고. 깨달음은 결코 반복될 수 없다는 이야기. 그러나 노천의 냉기가 벌거벗은 몸을 휘감아 서늘해진 체온을 뿌연 증기를 내뿜는 온천수에 담금질 하듯 집어넣는 순간은 언제 겪어도 새롭다. 어느새 가을의 온도로 변해가는 차가운 비가 주륵주륵 쏟아지는 가운데 반쯤 몸을 담그고 있자면, 어떤 특별한 생각을 해 보려고 애쓰게 되기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눈앞에 보이는 것들과 귓가를 스쳐가는 소리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게 된다. 무수한 나뭇잎 위로 떨어지는 그 만큼의 빗방울들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소리. 너도밤나무 숲이 서로 수도 없이 만나고 헤어지는 파도 같은 소리. 자욱한 물안개로 농밀하게 채워져 흐릿하게 보이는 숲 속 저 편.        



ⓒ 2018. 김선우


이 동네에는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이 지역의 일곱 개 온천을 체험할 수 있는 ‘온천 순례 수첩(湯巡り手帳)’이 있어서, 목욕통을 지붕에 이고 다니는 귀여운 모습의 온천 순례버스를 타고 각 온천을 돌거나, 순례라는 이름답게 숲을 걸어서 온천을 체험하는 이들을 볼 수 있다. 목욕 수건을 들고 삼삼오오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어쩐지 포대기에 싼 아기처럼 뽀얗게 보이는 건 그저 착각일까. 그들은 일곱 개의 온천에서 일곱 개의 서로 다른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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