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을 넘긴 어린이 기획자
이런 저런 우여곡절 끝에 기획자가 된지 4년차다.
하지만 조금은 특수한(?) 기획 업무라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기획이라기 보다는
기존 상용화 프로그램의 사용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우리 프로그램의 제한 사항을 감안한 제반 정책을 설정
하는....써놓고도 뭔소린지 모를 묘한 기획 업무를 담당한지 4년차.
그러던 차에, 기존의 업무와는 전혀 다른 신규 사업 개척에 대한 로드맵이 마련되었고 사내에서는 천연기념물에 가까운 극소수의 개체수를 자랑하는 기획자 2인(전원)이 해당 신규 사업의 기획 업무에 참여하게 됐다.
1개 앱 기획에 2명의 기획자가 붙으면 다행이겠지만 현실이 그렇게 아름답게 그려지더냐.
기존 업무는 그대로 유지한 채 총 3개 신규 앱에 대해 2명의 기획자가 기존 업무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완전히 새로운 '어플' 기획이라는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으니 나이라도 젊으면 도전 의식에 불이라도 지펴지겠지만 이미 둘다 불혹을 넘긴 나이(팀장 횽아는 나보다 더 늙었음)라 새로운 분야에 대한 학습과 시도가 상당한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벌써 도입부부터 암울한게 근미래의 스팀펑크 SF같은 이미지가 그려지지만 어쨌거나 지난 4개월동안 경험했던 새로운 분야에 대한 학습, 실험등의 사건들에 대해 어플이 출시되는 시점에서 하나씩 풀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혹시라도 기획 업무에 대한 막연한 분홍빛 꿈을 그리는 예비 기획자, 새내기 기획자가 이 글을 읽는다면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라는 반면교사의 대상으로, 닳을대로 닳은 베테랑 기획자가 이 글을 읽는다면 '헤헤 바보들'하고 비웃는 조소의 대상으로 삼아도 좋다.
하지만 현업에 있는 개발자, 디자이너, 마케팅 담당이라면 '바보같은 기획자들도 나름 치열하게 사는구나'라는 이해의 심정으로, 바다와 같은 넓디 너른 포용력으로 글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극존칭)
신규 사업에 대한 계획이 발표되고 그 즉시 사원들을 대상으로 한 아이디어 공모가 진행되었다. 산지에서 직송된, 다듬어지지 않은 아이디어를 분석해서 사업적 가능성 여부, 기 출시 앱에 대한 사전 조사의 과정을 거치는건 오롯이 기획 파트의 업무.
문제는 산지 직송의 신선한 아이디어들의 숨겨진 진의를 파악하는것이 예상보다 힘들었다는 사실이다. 아이디어의 시장성을 분석하는 기획자도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기획자가 아니고, 아이디어 제공자 역시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는 훈련을 받은 인재가 아닌 개발자 집단이었으니 서로 대화는 하고 있지만 뭔가 내용은 겉도는 회의 진행이 거듭된 것.
약 1개월의 시간동안 논의에 논의를 거듭한 결과, 10여개의 아이디어 중 총 3개 아이디어가 선정되었고 그 중 2개의 아이디어는 나름의 구체화 과정을 거쳐 '이러이러한 앱을 만들면 된다'라는 합의에 도달하게 되었다.
우리집 보일러가 자꾸 말썽을 일으키던 2018년 1월 초의 상황이었다.
선정된 아이디어에 대한 시장조사, 기 출시 앱의 특징 등이 몇 번의 리뷰를 통해 공유되고 최종적으로 각각의 아이디어에 대한 개발 및 기획 담당자가 배정되었다.
하지만 실제 앱 기획/개발 업무 돌입 전, 올해 진행되는 '앱 개발'이라는 신규 사업에 대한 방향,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기존 업무와는 다른 롤 배정'이라는 주제의 회의에서 개발과 기획의 의견 차이, 혹은 표현의 차이를 실감하게 되었다. 바로 이런 주제였다.
기획 :
아이디어에 대한 기획 회의는 기획/개발이 함께 참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발과 기획이 서로 논의를 통해 목표를 설정하는 등 기존 업무와는 다른 프로세스가 필요해요.
개발 :
의도는 알겠습니다. 서포트, 혹은 의견 제시의 역할은 개발이 도울 수 있겠지만 말 그대로 도우미의 역할이지 기획이 고민해야 할 부분이 훨씬 많을겁니다. 최소한의 롤은 서로 구분해야죠.
지금 생각해보면 기획과 개발 모두가 지향하는 바는 같았다. 기존 업무와는 다르게 '같이 기획하고 개발하자'에 가까운 롤의 변화.
하지만 그 미묘한 표현의 차이가 조금씩 둑을 쌓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정 반대의 입장차이가 되는 양 벽으로 가로막히게 되더라. 수 년간에 걸쳐 함께 일하던 개발자와 기획자들이 새로운 롤에 대한 이해의 차이, 아니 표현의 차이로 인해 서로 낯선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성 관계라면 신선하기나 하지, 이건 '내가 알던 그사람이 아니네'라는, 좋지 않은 낯설음이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상품 역기획'
실제 앱 기획 및 개발이라는 구체적 업무에 돌입하기 전, 기존의 업무 프로세스와는 다른 '공동 기획' 개념을 개발자와 기획자가 조금이라도 서로 이해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함을 느꼈다.
하지만 개발자가 원하는 '기획자의 빠른 방향 제시'와 기획자가 원하는 '빠른 방향 제시를 위한 공동의 기획'이라는 이해와 표현의 차이는 생각보다 멀고도 깊더라.
고민끝에 내린 결론은 아래와 같다.
기존에 출시된 제품이 어떤 기획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졌는지를 유추해 보고 제 3자의 입장에서 해당 상품을 기획과 개발이 분석해 본다면 뭔가 같은 지향점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좀 더 풀어 이야기하자면, 서로를 바라보지 말고 나란히 서서 목표를 바라보자는 것.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추상적으로 진행되는 사고의 방향을 '진동칫솔'이라는 뜬금 없는 상품으로 구체화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지금 생각해도 뜬금없다.)
3만원 내외의 저렴한 진동칫솔 시장이 존재한다.
10~20만원대의 다기능 고성능 진동칫솔이 대세인데 왜 성능도 나쁜 저가형 제품이 출시되었을까?
고가형 진동칫솔의 가격적 단점뿐만 아니라 또 다른 이유때문에 저가형 진동 칫솔이 출시된건 아닐까?
그렇다면 저가형 진동 칫솔의 지향점은 무엇일까? 칫솔의 핵심 기능은 뭐지? 세정력? 상쾌함?
결국, 기획 단계에서 진동칫솔의 핵심 기능은 일부만 유지하고 부가기능을 제거함으로 인해 단가를 낮추고 불필요한 거치형 충전식 대신 교체형 배터리를 선택하는 등 저가형 진동칫솔 시장을 파악하고 공략 제품 기획을 했을거야!
순진하기도 하여라.
어쨌더나 이러한 역기획의 흐름을 본다면 반대로 상품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왜 공동의 기획이 필요하고 서로 의견을 나눠야 하는지에 대한 필요성을 서로 이해할 수 있을거라 생각한거다. 이때 사용한 문서는 아래와 같다.
10여페이지의 ppt문서로 뜬금없는 역기획 자료까지 만들어 이해를 구했지만 사실상 같은 기획자 (팀장님)에게도 딱히 동의를 구하지 못한 실패한 작업이 되었다.
결국 이론적인 설명과 설득 이외에 다른 방법, 즉 실제 기획 및 개발에 진입해서 몸으로 느끼고 서로 이해해 나가자는, 한편으로는 대책없고 한편으로는 대안없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어쨌거나, 실질적인 앱 기획 및 개발이 시작된 셈.
보일러가 고장나서 찬물로 샤워하다가 감기에 걸린 2월 중순의 시점이었다.
재미없이 길어지기만 해서 이 즈음에서 1부 마무리합니다.
2부가 바로 이어집니다.
2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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